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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1:. 용병과 주술사 (3)
Episode 21:. 용병과 주술사 (3)
하늘에서 콰르릉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검은 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번개가 번쩍였다.
오크 도시 쪽으로 내리 찍히는 번개가 먼 거리에서도 잘 보였다.
상태창에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놀 주술사의 번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모든 능력치가 1 증가합니다.
- ‘오크 도시 공략’ 미션을 성공했습니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1시간 내에 차원문이 소멸합니다.
-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놀 주술사의 번개’ 업적 달성 메시지는 이준기에게만 뜬 것이지만, 던전 클리어 메시지는 다른 공격대원들에게도 떴다.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진 공격대원들이 전투태세를 풀고 뒷걸음질 쳤다.
고블린들도 마찬가지였다.
벙찐 얼굴의 아시카가가 묻고, 이준기가 답했다.
“이거 뭡니까?”
“던전 클리어했습니다.”
“누가요?”
“제가요.”
“이런 어이없는 일이···”
“당신들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포기하고 나가세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시카가가 도끼를 휘두르며 이준기에게 달려들었다.
전용택이 방패로 도끼를 쳐내면서, 아시카가를 막아섰다.
이준기가 아시카가에게 소리를 질렀다.
“꼭 죽어야겠다는 겁니까?”
이준기가 아시카가의 옆구리에 카데쉬로 일격을 먹였다.
쓰러진 아시카가를 대신해서 다케다 시게히데가 방패와 검을 들고 들어왔다.
이쪽에서도, 이준기를 대신해서 전용택이 다케다를 막아섰다.
탱커들끼리의 대결.
아시카가가 뒤로 빠져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붉은색 책들이 떠올라 빙빙 돌기 시작했다.
다케다를 전용택에게 맡기고, 이준기가 아시카가를 향해 돌진했다.
오른손의 오캄, 그리고 왼손의 카데쉬로 이준기는 빠르게 아시카가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의 주위를 돌던 책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 카데쉬가 적의 스킬 시전을 차단했습니다.
다시 뒤엉켜 싸우는 두 무리.
한일 연합 쪽은 여전히 일곱 명이지만, 인간-고블린 동맹 쪽은 고블린 여럿이 죽어 나가서 전력 누수가 조금 있는 상황.
동쪽 수풀 사이에서 새로운 고블린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이 수풀을 제치고 달려오면서 외쳤다.
“친구들! 우리들이 왔다구! 의뢰인이 죽으면 잔금은 물 건너 가니까 말야!”
뒤엉켜 싸우던 고블린 용병대장이 동쪽을 바라보며 반갑게 말했다.
“어이, 기다렸다구! 왜 이렇게 늦었어?”
“차 마시다가 늦었어. 비가 내려서 티타임이 엉망이 됐다구!”
“아무튼 잘 왔어! 이놈들 좀 빨리 몰아내자구!”
고블린 용병 스무 명이 추가로 투입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동료들이 하나둘 쓰러질 때도 고블린 특유의 억지 미소를 유지하던 고블린들.
증원군이 가세하자 억지가 아니라 진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이준기에게 일격을 맞고 뒤로 빠진 아시카가의 자리에 이도협이 들어왔다.
이도협이 쌍 단검을 휘두르며 치고 들어왔지만, 이준기 역시 이도류로 맞받아쳤다.
한 차례 칼날들이 엉켜 불꽃을 튀기고 난 뒤, 둘은 다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이준기, 많이 컸구나! 한 달 전만 해도, 나랑 눈도 못 마주치던 녀석이었는데 말야!”
“그러니까 평소에 연습 좀 하셨어야죠. 스킬 써서 우유팩이나 옮기니까 발전이 없는 거 아닙니까.”
“연습? 난 그런 거 안 해도 돼. 천재거든. 타고났단 말이지.”
“그럼 한 수 가르쳐 주시죠. 돌아가시기 전에 말입니다.”
“뭐가 어째? 죽는 건 너다!”
이도협이 단검 두 개를 앞세우고 돌진해 들어왔다.
다혈질인 성격 때문인지, 폭발력은 있지만 치밀함이 부족하다.
‘도발이 이렇게 잘 먹히는 상대도 많지 않지.’
이준기는 찌르고 들어오는 이도협의 칼날을 오른손의 오캄으로 받아넘겼다.
춤이라도 추는 듯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비켜서는 이준기.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한 그의 몸에서 카데쉬를 든 왼손이 뻗어 나왔다.
칼날은 이도협의 빈 옆구리를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갔다.
“커헉! 힐, 힐!”
다급하게 힐러를 불렀지만, 힐러 스즈키 사나에는 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힐러로서 대열 뒤쪽에 서 있던 스즈키를 향해, 고블린 용병대 소속 폭파병이 수류탄을 투척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나 쓰였을 법한 원시적인 수류탄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지금까지 탱힐딜이 제대로 갖춰진 풀 파티만 따라다니면서 편하게 힐만 하던 스즈키 사나에.
스스로 판단해서 대처해야 하는 돌발 상황은 처음이다.
난생처음 보는 수류탄에 기겁해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내빼기 시작했다.
제때 힐이 들어오지 않자 당황한 이도협이 옆구리를 쥐고 뒷걸음질을 쳤다.
이준기가 양손의 무기를 휘두르며 이도협과의 거리를 좁혔다.
한 번은 이준기의 공격을 단검으로 쳐냈지만, 그다음은 그러지 못했다.
오캄의 칼날이 이도협의 왼팔을 베고 지나갔다.
“크헉! 사, 살려줘! 힐러!”
“이도협 씨, 힐링 포션이라는 아이템, 모르십니까?”
“히, 힐링 포션!”
이도협이 인벤토리에서 힐링 포션을 잡으려고 오른손을 뻗었다.
단검을 쥔 이준기의 왼손이 기다렸다는 듯, 이도협의 오른손을 찔렀다.
“으아악!”
이도협이 애지중지하던 단검, ‘흑요석 칼날’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이도협은 피가 흐르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 뒷걸음질 쳤다.
다치지도 않은 다리를 쩔뚝거리면서, 이도협이 애원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주, 준기 씨! 날 죽이려는 건 아니지?”
“지금 그런 말을 할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요.”
“준기 씨가 설마 살인을 하겠어? 아니잖아!”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하려던 것은 그쪽입니다.”
“무, 무슨 소리야? 아니야! 오해라고!”
“이상덕, 고성하, 일본 놈들··· 그리고 당신, 이도협!”
“아냐! 오해야! 살려 줘!”
이준기는 오른손의 한손검을 휘둘러 이도협의 왼손 무기 역시 바닥으로 떨궜다.
이도협은 이준기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울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중얼거림은 우는 소리에 파묻혔다.
빠른 속도로, 이준기의 검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내려왔다.
*****
“항복! 항복!”
방패로 몸을 감싼 채 뒷걸음질을 치며 다케다가 소리를 질러댔다.
흘끔흘끔 주위를 둘러봐도, 이제 자기편은 하나도 없다.
힐러 스즈키 사나에는 고블린 용병들에게 쫓겨 숲으로 도망갔지만 돌아오지 못했다.
이도협은 이준기와 1대1 대결에서 패해 쓰러졌다.
고성하는 전용택과 고블린들의 포위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니와 아카네와 바바 히로코 역시 난전 중에 사망했다.
마지막까지 다케다 옆을 지키던 아시카가 역시 전용택과 이준기의 협공으로 쓰러졌다.
아시카가가 쓰러지는 걸 보고, 다케다는 전의를 잃었다.
보이는 것은 이준기와 전용택, 그리고 수도 헤아리기 힘든 고블린 용병들.
힐러 김나리는 고블린 용병들 뒤쪽에서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힐을 넣고 있다.
“항복! 살려줘! 무조건 항복이다!”
이준기가 오른팔을 들었다.
고블린 용병대의 리더가 이준기에게 말했다.
“저놈은 살려주는 건가?”
“항복은 받아줘야지.”
“그래? 휴우. 이제 끝났군.”
“수고했어!”
고블린들이 포위한 채로, 다케다는 무기와 방패를 전용택에게 넘겨주었다.
이준기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차원문 소멸까지 아직 15분 정도가 남았다.
이준기는 고블린 용병대 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정말 최고였어. 고블린 용병대는 역시 명불허전이군.”
“하하, 고맙다구, 친구!”
“서비스에 대한 수수료를 청구하라고, 친구.”
“사망자가 좀 발생하긴 했지만, 그건 우리 내부적으로 처리할 문제고. 용병 서비스에 대가는 아까 부탁했던 일, 그러니까 인간 공격대에 대한 방해 공작에 대한 수수료에다가, 또···”
“전투에 참여해준 것에 대한 보상.”
“그렇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별도 요금이라서 말야. 다 합쳐서, 15만 골드야. 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놓고 닥돌하는 전투에 대해서는 요금이 비싸다구. 목숨값이니까 말야. 그건 이해해줘, 친구.”
“그래. 오늘 너희들 아니었으면, 골드고 뭐고 내 목숨도 없었겠지.”
“하하, 무슨 농담을. 아까 보니까 잘 도망가던데, 뭘. 우리가 없었어도, 잘 내뺐을 거야, 인간 친구는. 하하.”
“그거, 칭찬이지? 고맙군.”
고블린 용병대장이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아 참, 그래. 혹시 아까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어?”
“응, 뭐 말하는 거지?”
“도가니말야. 폭약 연성용 도가니. 돌기 네 개짜리.”
“아, 그거? 응. 잘 가지고 있지. 그걸로 만든 폭약 품질이 좋다고, 주술사가 아주 좋아하던데.”
“주술사? 흠, 누군지 몰라도 폭약을 좀 아는구만. 고블린 폭약은 세계 최고라고.”
“하하하, 그렇지. 오늘 제대로 효과 봤으니, 그건 내가 증언할 수 있지.”
“그래서말야, 인간 친구. 그 도가니를 넘겨준다면, 15만 골드 대신 그걸로 용병 수수료를 지불한 셈 쳐주겠어. 인간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 미련 같은 거 갖지 말고 우리에게 넘기라고.”
무려 1,500골드나 되는 거금의 가치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이준기는 살짝 갈등이 생겼다.
인벤토리에서 ‘폭약 연성의 도가니'를 꺼내 손에 들고 그는 생각했다.
지난번에는 80레벨이 되도록 본 적도 없는 아이템이다.
그게 없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1,500골드를 아낄 수도 있고, 더구나 상대방이 귀하게 생각하는 물건이니까, 이거야말로 윈-윈이다.
“그래, 그럼. 너희 가문의 가보라니까. 나보다는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겠지.”
이준기가 도가니를 건네자, 고블린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하하하! 정말 고마워, 친구! 이제 용병대 생활 접고,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집안 사업이나 물려받아야겠어. 고마워, 고맙다구!”
*****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해가 쨍쨍 내리쬐는 가을 오후가 돌아와 있었다.
나뭇잎에서 빗방울이 이따금 하나씩 떨어졌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 군데군데 있는 물웅덩이에 비치는 솜털 구름, 그리고 가끔 스쳐 가는 시원한 한 줄기 바람.
이런 평화로운 광경을 보면, 조금 전까지 피의 살육전이 벌어진 곳이라고 믿기 어렵다.
다케다는 노끈으로 손발이 묶인 채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살짝 보니, 기본 식량 팩의 포장을 묶는 노끈이다.
얼마나 튼튼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전용택과 김나리, 둘이 지키고 있는 데다가, 다케다는 방패와 무기를 빼앗겨 무장해제된 상태다.
던전이 소멸되기 전에, 다케다와 할 일이 남아 있다.
이준기가 다가가자, 다케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오늘 미션은, 사고사로 위장해서 전용택을 죽이는 것, 맞지?”
“그렇다.”
옆에 서 있던 전용택이 동요했다. 김나리도 눈이 커지면서 놀라는 표정이었다.
“누가 배후인지 말해라.”
“곤란하다. 임무를 실패했는데, 의뢰자의 신원까지 밝힐 수는 없다.”
이준기는 무릎을 굽혀 앉아 다케다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준기의 오른손이 쥐는 동작을 취하자, 그의 손아귀에 단검이 나타났다.
이준기는 다케다의 눈높이에 단검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부탁하는 게 아니다. 명령이란 말이다. 상황 판단이 안 되나?”
잠깐 동안 눈이 흔들리더니, 다케다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대답했다.
“협회다. 전 일본 구원자협회.”
“그게 다야? 정말 그게 다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협회에서 지시받은 대로 한 것뿐이다. 협회에 누가 의뢰를 해왔는지까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당신은 일본 탑랭커잖아. 전 일본 랭킹 1위라고. 그런데, 협회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개라고 말하는 거야? 그걸 내가 믿을 수 있을까?”
김나리가 말했다.
“10분 남았어요. 던전 소멸까지.”
전용택도 한마디 했다.
“이준기 씨. 그냥 죽여버립시다. 그게 깔끔하고 좋아요.”
다케다가 묶인 손을 풀려고 난동을 부리며 소리를 질렀다.
한국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분위기로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안돼! 죽이지 마! 다 말할 테니까!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