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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20:. 번개를 기다리며 (1)
Episode 20:. 번개를 기다리며 (1)
“주술 의식을 끝냈다. 이제는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놀 주술사가 그렇게 얘기한 것이 10분 전.
이준기는 나무 뒤에서 던전 입구 오두막을 주시하고 있다.
그들이 차원문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10분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아직까지는 오두막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준기는 굳이 자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저들은 이미 그가 이곳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안다.
굳이 흔적을 지우면서 돌아다닐 이유가 없다.
만약 그들이 이준기를 사냥이라도 하겠다고 결정한다면, 그때부터 대책을 세우면 될 일.
이미 안면도 익힌 고블린 용병대를 이용하면 오히려 역습도 가능하다.
문이 열리고, 바깥으로 사람들이 나왔다.
제일 처음 나온 것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그러니까 김나리.
나오자마자 땅바닥을 살펴보며 몇 발자국을 걸었다.
“이준기 구원자가 이미 던전 안을 돌아다녔군요. 동쪽으로도, 북쪽으로도 발자국이 나 있습니다.”
이도협이 오두막을 나오면서 투덜거렸다.
“나리 씨, 문 앞에서 그렇게 엉덩이를 쭉 빼고 서 있으면 어떡해요? 오두막이 남서쪽에 있으니 발자국이 동쪽이랑 북쪽으로 났겠죠. 당연한 거 아녜요?”
곧이어,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
“하하, 이도협 회장님. 뭘 그렇게 신경이 날카로우세요. 정찰조도 아닌데. 힐러님 관찰력을 칭찬해 주셔야죠.”
이도협이 대답했다.
“제가 좀 예민해졌죠. 미안해요, 나리 씨.”
“괜찮습니다. 제가 길막을 했으니 죄송하죠.”
“마침 오늘 사고 친 녀석이 저희 길드 멤버잖아요. 제명하기는 했지만요. 그걸로 수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저희 길드 소속이었던 녀석이, 다른 나라에까지 와서 사고를 쳐서 기분이 좀 많이 상했어요.”
이준기가 사표를 낸 것은 이미 지난 토요일이지만, 수리를 거부하던 이도협.
결국 이준기가 던전 스틸이라는 사고를 치고 나니, 단박에 제명을 한 모양이다.
‘별 상관없다. 길드가 아니라 협회에서 제명당한다고 해도, 희소 자원인 구원자가 외면받는 일은 없다.’
이도협이 궁시렁거리는 소리에 이어, 또 다른 남자 목소리가 한국말을 했다.
“이준기 씨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공명심인가? 아직 20레벨 초반이라면서요?”
한국 사람이 네 명. 이도협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도 남자 목소리가 둘이 더 있다.
탱커라서 대체하기 어려운 전용택은 물론, 딜러 고성하까지 공격대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일본인 중 한 명이 이준기 대신 공격대에서 빠졌다는 얘기.
이도협이 엉성한 일본어로 말했다.
“아시카가 상, 동쪽으로 먼저 갑니까, 북쪽으로 먼저 갑니까?”
‘아니, 저 안에서 10분도 넘게 꾸물거렸으면서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정하지 않고 나왔단 말야?’
일본어 대답이 들려 왔다. 아마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도협이 말을 건 상대, 아시카가 타마유키 공격대장.
“북쪽으로 갑니다. 예전에 같은 유형의 던전을 클리어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 오크 도시가 북서쪽에 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북쪽입니까.”
한국 남자가 이도협에게 한국말로 말했다.
협회 데이터베이스 사진과 딱 판박이인 것이, 고성하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가늘어서 상당히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예전에 이런 유형의 던전을 들어와 봤는데, 그때 오크 도시가 북쪽에 있었답니다.”
“그렇군요. 일본어가 아직 짧아서. 하하.”
김나리가 묻자, 고성하가 답한다.
“일단 정찰만 한다는 거였죠?”
“그렇지. 일단 그렇긴 한데. 일본 사람들 의견은 정찰해서 위치 파악하면 곧바로 공격 들어가자는 쪽이라서.”
“아홉 명인데, 괜찮을까요? 설명도 ‘오크 도시’잖아요. 도시라면 수비 인력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그러게 말야. 그래도 아시카가 씨와 다케다 씨는 이런 타입의 던전을 클리어한 경험이 있다고 하니까.”
전용택이 바닥에 침을 뱉더니 한마디 했다.
“아, 이 자식들. 들어오기 전에 왕에게 절을 하다니. 조선 시대도 아니고, 역겨워서 혼났습니다.”
“쉿! 일본 사람들, 한국말 알아들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요? 일본 사람들이 한국말을 많이 안다고요?”
“그렇다기보다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많아서요.”
“덴 뭐시기라고 했다가 다 알아들을 뻔했네. 왕이라고 하길 잘했네요. 왕이라기보다는 왕초에 가까운 놈이지만.”
“그러게요. 아무튼 전 회장님, 오늘 수고 부탁드립니다.”
전용택의 말 상대를 끝낸 고성하가 일본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유창한 일본어 대화가 이어졌다.
“아시카가 상, 정찰 후에 오크 도시 위치를 파악하면, 곧바로 공격할 생각이십니까? 정말로요?”
“전투가 길긴 합니다만, 단순합니다. 많은 수의 오크를 지루하게 죽이는 거죠.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김나리 힐러님이 조금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 그리고 김나리 힐러는 일본어를 좀 할 줄 압니다. 그러니까 그쪽 이야기는 저와 함께 나중에 하시죠.”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조성하 딜러님이 저와 함께 리딩을 맡아주시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 둘이 앞서서 걸을 수 있으니까요.”
“아, 그럴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공격대장 아시카가와 이야기를 끝낸 고성하는 한국 사람들을 모아놓고 합의된 내용을 전달했다.
“김나리 힐러님은 뒤에서 천천히 따라와 주시고요, 만약을 대비해서 이도협 회장님이 옆에 같이 와주시기 바랍니다. 후위를 맡아주시는 겁니다.”
“흠. 네, 알았습니다.”
“전용택 회장님은 이도협, 김나리 두 분, 그리고 후지모리 상과 함께 오시면 됩니다. 탱커가 두 분이라 탱킹 전담을 둘로 나눴습니다. 다케다 상이 네 명, 전 회장님이 세 명요. 괜찮으시죠?”
“아, 뭐, 저는 괜찮습니다. 공격대장이 정하는 대로 하는 거죠. 장사 하루 이틀 합니까.”
“저는 다케다 상이 탱킹 맡는 1파티 쪽으로 갈 거고요, 아시카가 상이랑 진행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고, 여러분들께 논의한 내용을 전달도 드려야 하니까, 선두에 서겠습니다.”
“네.”
“그러니까 선두에는 아시카가 상, 다케다 상, 저, 이렇게 세 명. 중위에는 스즈키 상, 니와 상, 바바 상. 허허. 전부 여자분들이시네. 그리고, 후위는 전 회장님, 이 회장님, 그리고 김나리 힐러님. 아시겠죠?”
그렇게 말하고, 고성하는 앞으로 나가면서 모두에게 외쳤다.
“자, 출발합니다. 미나 상, 슈파츠데스요!”
한국 사람들과 자신들 사이에 사람들의 벽을 만든, 고성하.
곧 아시카가와 ‘그쪽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 내용을 들어야 한다.
공격대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조금씩 앞서 이동해야 한다.
이준기는 빠른 속도로 수풀 사이를 움직였다.
이미 정리해 놓은 길이다.
경계하며 움직이는 저들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다.
*****
국민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본인들이 포함된 공격대는 상당히 느린 속도로 전진했다.
세계적으로 봐도 구원자 사망률이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일본.
‘안전제일’이 모토라면 본받을 만하다.
인명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속도나 효율이 중요한 게 아니다.
고성하 역시 생각보다 신중한 성격이었다.
김나리의 일본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고성하와 비교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상당히 뜸을 들인 다음에, 그것도 여러 가지로 에두르는 표현을 쓰면서 말을 시작했다.
“아시카가 상.”
“네.”
“원래는 어땠습니까? 이 던전, 며칠 정도 생각하고 들어오신 건가요? 사흘 정도인가요?”
“글쎄요. 협회 기준으로 C급 던전은 4일을 기준으로 봅니다.”
“흠, 협회 기준이라. 그런 것도 있다니 선진국은 다르군요.”
“과찬입니다. 한국도 선진국인데 뭐 그런 말씀을.”
“그러니까, 아시카가 상. 원래는 이 던전을 나흘 만에 깨려고 했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나흘 동안 오크를 줄창 잡는··· 그런 방식으로요?”
“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던전을 깨는 방법이 보통 하나뿐인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글쎄요. 우리 협회 입장은 인명 제일주의라서요. 후퇴를 하더라도 최대한 조심해서 진행하고, 편한 방법이 있어 보이더라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을 사용하자는 겁니다.”
“오크를 줄창 때려잡는 것이 확실한 방법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고성하가 말을 흐리자, 아시카가가 냉큼 받았다.
“안전한지는 모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안전합니다. 적어도 던전 안에서는, 탱힐딜. 그게 진리죠. 그런 의미에서, 단 한 명이 정찰을 하러 들어왔다는 그··· 이준기 상?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건, 뭐,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정찰은 저도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러니까 같은 길드였던 이 회장이 노발대발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잠깐 동안 침묵.
“이도협 상은 원래 다혈질인가요? 이준기 상이 멋대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제명이라니. 23레벨이면, 한국에서도 그냥 버릴 정도는 아니잖습니까?”
“23레벨이면, 중견 구원자죠. 귀한 대접을 받아야죠.”
“그런데 그냥 제명해 버리다니.”
“이도협 상이 원래 좀 그렇습니다. 사실 저도 아주 잘 아는 사이는 아녜요.”
“그렇군요. 두 분 다 협회장 파벌이시니, 이 상과 고 상은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글쎄요. 비즈니스 관계라고 생각하시죠. 친구 관계가 아닙니다.”
“하긴 그렇군요. 공사가 확실한 건 좋은데요. 협회는 그렇게 이끌어야죠.”
“그래서, 아시카가 상, 어떻게 할 겁니까? 그냥 저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기만 해도 되는 겁니까?”
“그 일 말씀이시죠?”
“네.”
“많이 신경 안 쓰셔도 될 겁니다. 우리 일본에서는 비상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훈련을 하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자연스럽게 우리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길 겁니다.”
“그럼 우리는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까?”
거리가 있어서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아시카가의 얼굴에 조금 악랄해 보이는 미소가 떠올랐다.
“협회장 친구이신, 아니 비즈니스 파트너이신 두 분만 잘 피하시면 됩니다. 목표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다소간의 부수적 피해는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컬래트럴 대미지라고 하나요?”
“아, 그런 겁니까? 그 부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챙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일본 구원자 계가 세계 최저 수준의 사망률을 유지하는 비결이 그겁니다.”
“네? 아까는 인명 제일주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인명 제일주의라는 말을 오해하셨군요. 약한 놈 하나를 살리겠다고 공격대 전부가 뛰어들면, 전멸하는 겁니다. 그 한 놈이 희생하면, 나머지 전부가 사는 거죠.”
*****
“이상하군요. 지금까지 오면서 겨우 오크 무리를 하나 잡았어요. 이준기 상이 던전을 꽤 정리해 놓은 느낌이군요.”
“저도 내심 놀라고 있습니다. 던전을 혼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서, 몬스터를 잡고 다녔다니.”
“23레벨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자꾸 물어서 죄송합니다만.”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거의 다 왔군요. 성벽이 보입니다.”
아시카가의 말에, 고성하는 고개를 들어 멀리 앞을 보았다.
육중한 성채. 5미터, 아니 6미터는 되는 돌벽이 보인다.
저런 벽이라면, 정문을 돌파하지 않고 도시로 진입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거대한 문이 열려 있고, 그 양쪽으로는 경비 초소가 각각 하나씩 있다.
견고하게 돌로 만든 성곽과 대비되는, 허름하게 나무로 지은 경비 초소.
초소 앞에는 전방을 주시하는 경비병들이 나란히 서 있다.
검치가 난 입을 다물고 도끼를 양손으로 든 채, 무표정하게 서 있는 오크들.
이준기에게도, 오크 경비병들의 우울한 얼굴이 보였다.
‘11시 반이 넘었는데, 번개는 아직인가.’
하늘은 맑다. 그러나 주술 번개니까 마른 하늘에 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늘에서 눈을 떼고 다시 공격대를 쳐다보는 이준기.
성벽 바로 앞까지 왔으니 공격대는 다시 브리핑에 들어갔다.
아시카가와 고성하의 목소리가 교대로 들렸다.
순차 통역 중인 것 같다.
“여기 이쪽, 그러니까 큰길 서쪽 숲에서 몬스터들을 잡겠습니다. 다케다 상이 풀링하면 기다리고 계시다가, 오크들이 바로 여기, 이 선을 넘으면 그때 공격을 개시해 주세요.”
전용택이 물었다.
“저는 얼마나 모을까요?”
“전 상은 최대 네 마리까지만 어그로를 먹어주세요. 지금 공격대에 한 자리가 빠지니까, 아무래도 2탱 쪽은 화력이 좀 모자랍니다.”
“이준기는요? 안 찾아보나요?”
“그 문제는 아까도 논의했던 것 같은데요. 결론을 내지 못했잖습니까.”
“이준기 씨가 가세하면 10인 공격대 꽉 차는 거 아닙니까. 이준기를 찾아보는 게 순서 같은데.”
이준기를 먼저 찾자고 주장하는 게 김나리였다.
“김 상, 이 던전은 매우 넓습니다. 지금 걸어와 보셔서 아시잖습니까. 다른 C급 던전의 두 배가 넘어요.”
“안전제일이고, 인명을 중시한다고 하셨잖아요. 이준기 씨를 먼저 찾는 게 그 방침에 맞는 거 같은데요.”
“제가 말씀 안 드렸었나요? 금요일 오후까지는 던전을 정리하고 나가야 합니다.”
“네? 그 말씀은 처음 듣는데요.”
전용택도 한마디 했다.
“어, 정말? 그 얘기는 저도 지금 처음 들어요. 고 회장이나 이 회장은 들어 봤어요, 저 얘기?”
“글쎄요. 들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시카가가 다시 말했다.
“혼선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토요일에 포럼이 끝나잖아요. 금요일까지는 정리하고 나가서 토요일에 기념사진도 찍고, 결과 브리핑도 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건 그냥 목표죠? 만약 금요일까지 정리가 안 되면요?”
“그래도 그냥 나갑니다.”
“뭐요? 페널티가 2레벨 강등인데, 지금 장난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