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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8: 공동의 적 (2)
Episode 18: 공동의 적 (2)
다시 한차례, 박수가 쏟아졌다.
“이번에 구라모토 협회장님의 지원 요청을 받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한일 양국 간에는 좋은 일도 있었지만, 솔직히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도 있었잖습니까. 옛날이야기뿐은 아닙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과거사 문제, 경제 마찰, 그리고 정치인들의 막말 배틀까지, 두 나라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구원자 길드 협회장이라는 사람이 직설적으로 입에 담는 건 의외다.
그것도 남의 나라에 와서, 그 나라 기자들 앞에서 말이다.
회의장에 출입이 허가된 기자들의 수는 만찬장보다는 많았지만, 여전히 3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절반 이상이 일본 기자들이고, 해외 기자단에는 자리가 얼마 배정되지 않았다.
한국 기자라고는 해당 분야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김대기 기자 한 명만이 취재를 허가받고 들어와 있었다.
웅성거림이 가라앉자, 이상덕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양국의 구원자들이 힘을 합쳐서 어려운 일을 함께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양국의 화해와 발전적 미래 관계 정립에도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또 박수.
주최 측에서 바람잡이들을 미리 준비한 것이 틀림없다.
“차원문은 계속 진화합니다. 최근에는 난이도가 훨씬 높은 차원문, 그리고 상태창 정보만으로는 알 수 없는 변칙적인 차원문이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각국이 차원문 문제를 국제 협력으로 풀어나간다면, 인명 피해를 훨씬 줄이고 효율적으로 차원문 정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논리로도 완벽하다.
현재 한국에 30레벨 이상의 구원자는 한상태 단 한 명이지만, 일본과 연합한다면 30레벨 이상만으로도 공격대를 여럿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인력 풀을 구성해서 고난이도 던전을 공략한다면, 구원자들의 생존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일단 공격대 구성부터가 수상하다.’
커피 브레이크가 10분 정도 늦어졌지만, 회의장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휴식 시간에 회의장 밖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덕담을 나누면서 한일 연합 공격대 발족을 축하했다.
회의장 맨 뒤에 서서 발표를 듣던 이준기.
바깥으로 나와 우선 커피 줄에 섰다.
커피를 받고 간식거리를 챙겨서 스탠딩 테이블에서 잠깐 있다 보니, 문아린이 따라 왔다.
“휴. 사람이 정말 많네.”
“아린아.”
“응.”
“전용택 길마, 너희 길드잖아. 알고 있었어?”
“우리 길드 마스터지. 그런데, 처음 듣는 얘긴데.”
“오늘 회의장에 있었어?”
“응. 난 방청석 뒤쪽 줄에 앉아 있었는데, 길마는 맨 앞줄 지정석에 앉았거든.”
“괜찮을까?”
그때, 난데없이 큰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도협이었다.
“우하하, 준기 씨. 여기서 또 만나네. 이쪽은?”
“안녕하세요. 신선자 길드 문아린이라고 합니다.”
“아, 아름다운 분을 만나서 영광입니다. 지난번에 우리 준기 씨랑 같이 공격대에 참여하신?”
“네, 맞습니다. 해운대에서도, 종각에서도.”
“오? 그렇네요? 하하하, 참 기막힌 우연이네요. 준기 씨, 행운이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 분이랑 공격대를 계속 같이 다니고.”
이준기가 물었다.
“이 회장님, 연합 공격대, 이거 미리 알고 계셨던 거죠? 갑자기 이런 얘기가 나오니까 어리둥절하네요.”
“음. 이상덕 협회장이 한 달쯤 전에 일본 측으로부터 요청을 받아서, 검토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상덕 협회장이 개인 자격으로 저에게 공격대 참가를 요청했고요.”
“전용택, 김나리, 고성하. 이분들도 다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시는 겁니까?”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무슨 문제 있나요?”
“아니요. 이렇게 큰 건이 비밀리에 진행됐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요.”
“이상덕 협회장이 워낙 일본 통이니까요. 아까 일본어 유창한 것도 들었잖아요.”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을 발동해서 이도협의 상태창을 훔쳐보았다.
주무기는 여전히 흑요석 칼날이지만, 왼손 무기가 크레센트에서 썬더볼트로 바뀌었다.
주석의 무기였으며, 이준기가 전리품으로 획득했으나, 그가 길드를 나오면서 길드에 양도하고 나왔던 물건이다.
‘그걸 낼름 챙기다니. 근시안적인 녀석 같으니.’
이도협이 끼어드는 바람에 이야기가 끊긴 것은 좀 그렇지만, 오히려 잘 됐다.
앞으로 적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한 일본 구원자들에 대한 정보 수집에 활용하면 된다.
이준기는 이도협에게 말했다.
“이도협 회장님. 연합 공격대 분들하고 통성명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명함이라도 교환하고 싶어서요. 배울 점도 있을 것이고.”
*****
“휴, 빠져나오느라 고생했네.”
“여기가 정말 맛있다는 거죠?”
윤동직과 문아린이 말했다.
둘은 이준기와 함께 회의장에서 빠져나와 이준기가 추천하는 라멘 가게에 왔다.
목은 아주 좋은 곳에 있었지만, 가게 외관은 그냥 평범했다.
‘가마쿠라.’
가게 앞에 서 있는 자판기에 지폐를 집어넣으며 이준기가 너스레를 떨었다.
“자, 여러분! 일단, 여기 자판기에서 식권을 뽑으세요. 제가 쏘겠습니다. 하하.”
“자판기? 재미있네.”
식권을 뽑아 든 일행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가게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주방을 둘러싼 바 자리가 전부.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자리가 하도 비좁아서 가방이나 외투는 벽에 걸어야 한다.
세 명이 같이 앉을 자리를 찾느라 안쪽까지 들어와야 했다.
“가격은 싸고, 맛도 좋고 해서 사람이 늘 많더라고요.”
“그런데 준기 씨는 이 가게를 어떻게 아는 거야?”
“예전에 알바하던 회사에서 일본 출장을 잠깐 보내줬거든요. 그때 알게 됐죠.”
라면이 세 그릇이 나왔다.
보통 크기의 라멘 두 그릇, 그리고 훨씬 더 큰 그릇의 라멘 하나.
직원이 물었다.
“곱빼기에 차슈 추가하신 분은 누구신가요?”
“저요. 접니다.”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이준기가 대답했다.
라면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자, 문아린이 말했다.
“우아아! 이걸 다 먹는다고요, 오빠가!”
“어. 그건 네가 할 대사는 아니지 않나. 지난번에 나랑 같이 밥 먹어 봤잖아.”
“그땐 그때고요. 그땐 던전에서 나온 직후라서, 배 고프니까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죠.”
윤동직도 거들었다.
“준기 씨. 돼지껍데기는 안 먹더니 이건 엄청 대짜로 먹네? 라멘 좋아하나 봐.”
“아무래도 탄수화물 중독인가 봐요.”
차슈 몇 개를 덥석 집어 먹고 나서, 이준기는 그릇 안을 휘휘 저어 큼직한 면발 덩어리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폭풍흡입.
학교 다니던 시절, 방학 중에 알바를 하던 출판사에서 일본 출장을 보내줬을 때, 그때의 그 맛, 그대로였다.
벌써 5년이나 전의 일이다.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윤동직이 말했다.
“그런데, 도톤보리가 바로 저기 앞이잖아. 여긴 통제도 안 하고, 사람들도 많네.”
“도톤보리가 동서 방향으로 길이가 조금 있잖아요. 차원문은 동쪽 끝에 가깝게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여긴 그렇게 해서 통제가 되나? 몇 겹으로 둘러치지 않고?”
“가보면 알겠죠.”
“내일 출정식 가보려고?”
“많이들 가보지 않을까요? 내일 오전은 그것 때문에 회의도 없잖아요?”
어느새 빈 그릇. 국물까지 반 이상 마셔버린 이준기의 그릇을 보고, 문아린이 말했다.
“오빠, 제 꺼 좀 드실래요? 배 불러서 다 못 먹겠어요.”
윤동직이 그걸 보고 말했다.
“아린 씨, 괜찮으시겠어요? 좀 드셔야죠. 저녁인데. 너무 적게 드시는 것 같은데.”
“아뇨. 많이 먹었어요. 오후에 커피 시간에 간식도 많이 먹었고.”
문아린이 그렇게 말하며 자기 쪽으로 밀어준 라멘 그릇.
그걸 바라보는 이준기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라멘 앞에서 이준기에게 체면치레 따위는 없었다.
“정말 괜찮아? 그럼 내가 이거 다 먹는다?”
“응. 괜찮다니까. 배 불러.”
“그래, 그럼. 고마워.”
이준기는 웃으면서 문아린의 라멘 그릇을 가져다가 자기 앞에 놓고 또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5년 만에 먹으니까 꿀맛이네. 여기 매일 와야 하나?”
“그렇게 맛있어? 한국에도 라멘 가게 많잖아?”
“그거랑은 달라. 난 여기 라멘하고 비교라도 해볼 수준이 되는 라멘 가게를 아직 못 찾았거든.”
이준기가 드디어 식사를 마치자, 윤동직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보자고 한 거야?”
“제가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두 분뿐이더라고요. 그래서요.”
“특별히 할 얘기가 있는 거야?”
“일본과 연합 공격대, 이거 괜찮은 생각일까요?”
“아까 이상덕 회장이 말은 잘 하두만. 다 맞는 얘기고.”
문아린도 말했다.
“제 생각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두 나라에서 고레벨로 골라서 공격대 짜면, 해운대 같은 던전에서도 더 많이 살아남았겠죠.”
“그런데 만약 누가 죽으면?”
이준기의 물음에 둘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그들에게, 이준기가 이어 말했다.
“국내 문제가 아니고 국제 문제가 되잖아. 이건 그냥 순전히 나의 편파적이고 비이성적인 가정인데, 만약에.”
“한쪽 사람들만 죽으면 어떻겠냐는 거지? 예를 들어서, 여기 도톤보리에서 한국 구원자들만 죽는다면.”
“네, 그거죠. 사실 극단적인 가정도 아녜요. 예컨대 딱 한 사람만 죽었다고 가정해 보죠. 두 명이라면 한국, 일본 한 명씩 사망자가 나와서 공평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한 명만 죽으면 그것도 안 되죠.”
문아린이 말했다.
“그렇네요. 오빠 말대로, 딱 한 명만 죽어도 문제가 될 수 있겠네요.”
“내가 조금 더 시나리오를 써볼까?”
“뭔데요?”
“한국 구원자들도 전부 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잖아. 만약에, 의견이 다른 사람이 딱 한 명 들어 있었는데 하필 그 사람이 죽는다면?”
“네?”
“엉?”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잠시의 침묵.
두 사람이 동시에 이름 하나를 말했다.
“저, 전용택!”
“전용택 길마요?”
*****
아침 여섯 시. 해가 밝아 오고 있다.
일본어 학원도 다녔고, 출판사에서도 일본 관련된 일을 했던 이준기.
이상덕과 비교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름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한다.
앞을 가로막는 자위대 군인에게 이준기는 일단 얼버무려 보기로 했다.
“구원자입니다. 한국 출신이고요. 포럼 참석차 오사카에 왔죠.”
“무슨 일이십니까. 여긴 통제구역입니다.”
“오늘 11시에 여기에서 출정식 있는 거, 아시죠?”
“죄송하지만 대답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제가 정찰대로 뽑혔습니다. 얼른 들어가서 몇 가지 확인만 하고 나올게요.”
“그런 연락은, 받은 바가 없습니다.”
이준기는 군인과 말씨름을 하는 동시에 상태창을 켜서 던전 정보를 확인했다.
- 차원문 고유번호 10079. 랭크 C. 1층 구성. ‘오크 도시 공략’.
- 차원문 입장 조건: 최대 입장 인원 10명.
- 차원문 소멸 조건: 오크 족이 도시를 포기하고 시민들을 대피시킴.
- 차원문 소멸 보상: 생존자 수에 반비례하여 보상 지급.
- 퇴각 페널티: 2레벨 강등.
“알겠습니다. 일단 물러나죠.”
“다시 오시더라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이준기는 물러나서 생각했다.
전경과 군인으로 이중 삼중으로 벽을 치는 한국에 비하면, 여기는 경비 상황이 단출한 편이다.
중화기가 준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경비를 서는 인력 자체는 한국보다 훨씬 적다.
군인들은 총을 휴대하고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실탄을 쏘지는 않을 것이다.
‘한일 전쟁을 어떻게든 막는 게 내가 할 일이다.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총 맞으면, 던전 진입 후에 힐링 포션 마시면 될 일이다. 공포탄으로 상처 나 봤자, 대단치 않을 테니.’
이준기는 계단 위를 올라가 자판기를 찾았다.
자판기 천국 일본답게, 자판기가 서너 개씩 몰려 있었다.
‘아침이니까, 우동 어떨까?’
이준기는 예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자판기 우동을 몇 개 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우동 면발을 불지 않게 유지할까, 그게 궁금했다.
하나를 뜯어서 먹어보았다.
‘흠. 이런 맛이군. 나쁘지는 않지만, 가성비가 좋지 않네. 그냥 참고 먹어줄 만한 수준. 곤약으로 면을 만드니까 이건 뭐 우동이 아니고 단단한 젤리, 아니 그냥 곤약이군. 간장 국물에 곤약 국수.’
이제 던전에 진입하고 나면 언제 음식다운 음식을 먹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판기 우동도 나쁘지 않았다.
반쯤 먹던 우동 그릇을 들고, 아직 뜯지 않은 우동 몇 개를 들고 그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아까 그 군인에게 다가갔다.
“아침, 생각보다 쌀쌀하네요. 이거라도 좀 드세요. 저도 군대 다녀왔는데, 이럴 때 근무 정말 힘들고 서럽죠.”
“근무 중입니다. 그런 건 받을 수 없습니다.”
“아이, 그냥 받으세요. 이미 샀는데 버릴 수도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이준기는 우동 포장을 뜯었다.
포장이 뜯어져서 국물이 찰랑거리는 우동 그릇을 그는 군인을 향해 밀었다.
“이거, 손 놓습니다.”
“어어어!”
이준기가 손을 놓는 동시에, 군인은 얼떨결에 떨어지려는 우동 그릇을 잡았다.
“맛있게 드세요.”
그렇게 외치면서, 이준기는 차원문을 향해 뛰었다.
1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 2초도 안 걸린다.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하늘을 향해 쏘는 공포탄.
희푸른 소용돌이를 향해 이준기는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