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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8: 공동의 적 (1)
Episode 18: 공동의 적 (1)
호텔에 도착하니, 문아린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준기 오빠!”
“아린아.”
“커피숍에서 기다리라니까.”
“할 일도 없고, 오빠도 보고 싶어서 그랬지.”
“잘 지냈어?”
“잘 지냈지. 오빠는? 광주에 한 번 오라니까.”
“바빠서 못 갔네. 다음번에 갈게. 언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 죽은 다음에 오겠네.”
“무슨 소리야, 그게.”
“뭐, 사실이지. 구원자야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으니까.”
이준기는 ‘해운대’ 던전을 끝냈을 때가 생각났다.
원래대로라면 죽었을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살아남았다.
소현배도 김형채도, 원래대로라면 부산에서 죽었을 것이고, ‘종각’ 던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와서 희생됐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문아린의 운명이다.
해운대 던전의 사망자 명단에서 벗어나 이제는 종각 던전을 정리한 공격대의 생환 멤버다.
둘뿐인 생존자 중 하나.
그래서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중견 구원자, 문아린.
“한산하네. 기자들이 구름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 오빠는 포럼이 처음이라서 그렇구나. 원래 이래.”
“원래?”
“기자들 싫어하는 건 어느 나라 구원자들이라도 마찬가지라서 말야. 호텔 전체를 통째로 빌리는 건 기본이고, 정부 측에 요청해서 근방 1킬로미터 내 출입 통제. 그 조건 안 들어주면 그 나라에서 안 하면 되지. 포럼 열겠다고 줄 선 나라들이 하나둘이 아니거든. 포럼 한 번 하면 돈이 엄청나게 굴러들어온다고 하더라고.”
“하긴 그렇겠네. 이렇게 큰 호텔을 일주일 동안 전세 내고 놀고먹는 거니까.”
“행사장은 물론이고, 아마 오사카 시내 호텔 방은 전부 동이 났을걸?”
“난, 정보를 좀 얻으러 온 건데.”
“오는 사람들은 다양해. 오빠처럼 정보를 얻으러 온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어.”
“모든 던전을 직접 가볼 수는 없으니까. 다른 사람들 던전 공략 후기가 중요할 것 같아서.”
포럼이 열리기 전에 20레벨을 달성하고 성흔을 개방한 것도 다행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구원자들의 다양한 스펙을 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곧 침략해올 일본 구원자들에 대한 정보 수집이 제일 중요하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구원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디 있는 거야?”
“골프장, 수영장, 그리고 바에 있겠지. 커피숍에도 좀 있고. 뭐 하러 로비에 나와 있겠어?”
“그래? 그럼 우리도 커피숍에나 갈까?”
“짐은?”
“짐은 이게 단데?”
이준기는 어깨에 멘 냅색을 가리켰다.
“엑, 정말?”
“응. 갈아입을 속옷하고 양말. 뭐 더 필요한 게 있나?”
“하긴. 남자들은 그래도 되겠다.”
“상태창이 있으니까, 컴퓨터가 필요 없어서. 구원자가 되고 나니까 좋은 점 중 하나네. 예전이라면 랩탑은 가져왔겠지.”
“그럼 그냥 가방 들고 커피숍으로 갈 거야?”
“프런트에서 열쇠는 받아야지.”
이준기는 프론트에서 간단히 체크인을 끝냈다.
수속을 도와준 최정윤을 생각하니 좀 미안했다.
길드를 나왔으니 앞으로 볼 일도 없을 것이다.
참가비를 미리 입금해 놓은 게 다행이었다.
오사카에서는 제일 큰 규모의 호텔 중 하나지만 객실은 2,000개 정도.
참가 인원에 턱도 없이 모자란다.
인근의 다른 호텔에 묵으면 귀찮은 일이 하나둘이 아니다.
교통편도 그렇고, 기자들에게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옆에서 기다리던 문아린과 함께 이준기는 2층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이 정도 호텔이라면, 커피숍에도 사람이 많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예외.
포럼 참가자들만 들어올 수 있으니, 일반인은 거의 없다.
구원자들끼리는 서로 궁금해할 것도 많지 않으니, 관심이 없다.
커피숍 안에는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다.
동양인은 이준기와 문아린을 빼면 두 테이블 정도.
일본인들로 보인다.
그래서 밖에 새어나갈 염려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
“아린아. 부탁한 건 좀 알아봤어?”
“응. 나도 바쁜 사람이지만, 준기 오빠 부탁이라면 최우선으로 챙기지.”
“하하, 고맙구나.”
“주요 길드 마스터 중에서는 박충기를 제외하고 전원 다 온 것 같아. 박충기는 안 왔지만 문경새재 길드에서는 사람들이 꽤 온 것 같고. 뭐, 노는 데니까, 안 올 이유도 별로 없잖아. 박충기는 아마 이상덕 얼굴 보기 싫어서 안 왔겠지.”
“박충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
“글쎄. 박충기나 이상덕이나 다 정치질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의견 같은데. 난 이상덕도 싫지만 박충기도 별로야. 하지만 우리 길드가 반협회장 파벌이라서, 박충기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이상덕보다는 말을 좋게 하는 편이지. 나도 그런 영향을 받았을 거고.”
“하긴 그렇겠다. 포럼 의제는 봤어?”
“의제? 그런 것도 봐?”
“놀고먹는 회의이기는 해도, 의제가 있잖아. 읽어 보니까 이상한 게 하나 눈에 들어와서.”
“뭔데?”
“여기 2-2번. 국제협력 강화. 국가 간 연합 공격대 시범 운영.”
*****
만찬 자리에서부터 이준기는 사람들의 상태창을 확인하기 바빴다.
상태창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으니, 명함을 받거나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기 전에는 이름과 데이터를 매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 대표단에 속해 있었다면, 일본 구원자협회의 구라모토 신스케 회장이나, 현재 일본 탑랭커라는 다케다 시게히데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준기는 소속 길드조차 없는 신세.
자기 돈을 내고 참가한, 초라한 형편의 구원자다.
일본 측 주요 인사들과 직접 통성명을 할 기회는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 개최되는 행사인 만큼, 공식 석상에 일본인 구원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개회사, 환영 만찬사, 의사진행발언 등.
그럴 때마다 한 명씩 알아보고, 모자라는 부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될 것이다.
역시나 환영 만찬사는 협회장 구라모토 신스케.
안경을 쓴 모습이 잘 어울리는, 회계사 같은 얼굴을 한 남자다.
31레벨에, 성흔은 없고, 스킬 트리는 잡다하다.
협회장이니 정치적으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던전에서 직접 마주쳐서 싸울 일은 없을 듯하다.
‘정치적으로 저놈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피를 흘리지 않고 전쟁을 막을 수 있겠지만. 내가 남의 나라 정치에 뭘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더구나 이준기는 일개 병사에 불과하다.
성채에 숨어 지시만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라, 전장에서 직접 칼을 맞대고 싸울 적 병사들에 대한 정보 수집이 더 시급하다.
만찬장에서 몇몇 사람들을 만나서 인사도 하고, ‘이르헬의 눈’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해서 정보를 캐보기도 했지만, 눈에 띌 만한 인물은 만나지 못했다.
현재 일본 탑랭커인 다케다 시게히데는 34레벨이라는데, 만찬장에서 만난 최고 레벨은 32레벨.
그렇게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정탐을 하던 중, 만찬장이 시끄러워졌다.
유명인사가 나타난 것이다.
영국 대표, 헬렌 카자크가 수많은 팬들과 구경꾼들, 그리고 기자들에 둘러싸인 채로 나타났다.
십여 명의 기자를 제외하면 일반인이라고는 없는 만찬장.
그러나 구원자들 사이에도 헬렌 카자크의 팬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오랜만에 만난 헬렌 카자크, 물론 그녀는 이준기를 아직 모른다.
게다가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근처에 다가가기도 힘들었다.
이준기는 간신히 5미터 거리에 접근해서 헬렌 카자크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이르헬의 눈’을 발동했다.
- 41레벨.
- 전문화: 불 41.
- 힘 44. 민첩 44. 체력 70. 정신력 82. 물리 저항 30. 마력 저항 30.
- 성흔: 라로슈의 변칙.
- 획득 스킬: 도깨비불, 불새의 낙인, 플레임 스트라이크, 화염 정령 소환, 점화.
- 인벤토리: 다마스커스, 강화 롱보우, 강화 화살 20개, 불꽃 광대의 장갑, 아카니스트의 로브, 레비테이터, 상급 힐링 포션 6개, 기본 식량 팩 4개.
라로슈의 변칙. 전설급 성흔.
불의 책에 올인을 한 헬렌 카자크가 다른 요소의 마법을 일부 쓸 수 있게 해주는 성흔이다.
게다가 사용한 책의 30%가 재생되는, 사기급 성능을 가진 성흔.
그러나,
‘다마스커스라니. 역시 헬렌답군.’
아이템 욕심이 없는 정도를 지나, 아이템을 거부하는 듯한 헬렌의 인벤토리.
레비테이터라는 전설급 신발을 신고 있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평범하다 못해 형편없는 템들도 있다.
다마스커스라니, 물리 공격을 할 일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너무 형편없는 무기다.
29레벨 화염 법사 박충기도 ‘파이어 스타터’ 같은 좋은 마법 막대기를 들고 다니는데 말이다.
가공할 적을 상대로 끝까지 함께했던 동료, 헬렌 카자크.
조슈아 테일러의 검은 화살 비에 가슴을 꿰뚫려 쓰러진 것이 이준기의 기억 속에서는 불과 한 달여 전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고.
그녀를 멀리서 쳐다보면서, 이준기는 마음속으로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헬렌.’
*****
10월 11일 월요일 아침 10시부터 시작된 회의.
모더레이터는 스피디하게 의제들을 소화해 나갔다.
별 내용이 없는 허울뿐인 의제들이 대부분이지만, 회의 진행 속도는 칭찬할 만하다고 이준기는 생각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차단하고, 시간이 되면 칼같이 다음 의제로 넘어간다.
점심 식사 직후의 오후 첫 번째 세션.
졸면서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모두가 기다리는 커피 브레이크를 15분 남긴 상태에서, 모더레이터는 은근슬쩍 다음 의제로 넘어갔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재미없는 내용이니, 관심 가지지 말라는 듯한 진행.
의제 2-2, ‘국제 협력 강화’다.
얼떨결에 총의로 채택되는 걸 막으려면 질문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준기.
그가 손을 들까 생각하는데, 취재 기자 중 한 명이 먼저 물었다.
“그래서, 국가 간 연합 공격대라는 걸 장기적으로 고려해 보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계획이 잡힌 것이 있습니까?”
“오늘 너무 전격적으로 발표하는 것 아닌가 조금 걱정은 했습니다만, 이미 계획이 잡혀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
“바로 내일, 10월 12일 화요일 오전 11시에, 도톤보리 차원문에 연합 공격대를 투입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일본 구원자협회 직원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슬라이드에는 이미 공격대 참가 인원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취재 기자들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연이어 터졌다.
- 도톤보리 일-한 연합 공격대
- 공격대장: 아시카가 타마유키. 일본. 텐도 길드. 31레벨 딜러.
- 탱커.
- 다케다 시게히데. 일본. 사무라이스피리또 길드. 34레벨.
- 전용택. 한국. 신이 선택한 자들 길드. 29레벨.
- 힐러.
- 김나리. 한국. 브릴리언트 길드. 26레벨.
- 스즈키 사나에. 일본. 후지 길드. 25레벨.
- 딜러
- 니와 아카네. 일본. 아사히 길드. 30레벨.
- 고성하. 한국. 코리아 길드. 29레벨.
- 바바 히로코. 일본. 히토츠다케 길드. 29레벨.
- 후지모리 야스하루. 일본. 마스타즈 길드. 29레벨.
- 이도협. 한국. 발해의 후예들 길드. 27레벨.
“환상적이군요!”
“탑랭커, 다케다 시게히데가 출전합니까!”
“고성하, 전용택이라면 한국 랭킹 2, 3위의 강자들이군요!”
감탄사가 끝나자, 질문이 이어졌다.
“도톤보리 차원문이라면, 정찰대만 한 번 들어가고 본격적인 공략은 없었던 걸로 아는데요, 맞습니까?”
“맞습니다.”
“왜죠? C급 던전 아니었나요?”
“많은 분들이 던전 랭크를 보고 획일적으로 판단을 하시는데, 랭크가 반드시 난이도와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도톤보리가 만만치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정찰대 보고 결과에 따르면, 인명피해가 상당히 발생할 수 있는 그런 포맷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던전 공략을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 종합적으로 다시 브리핑을 드리겠습니다.”
“이번 일-한 연합 공격대가 나오게 된 배경은요?”
“일본 구원자협회에서 한국 길드협회에 정식으로 지원 요청을 했습니다. 그걸 한국 길드협회 이상덕 협회장님이 대승적으로 승낙하신 겁니다. 이상덕 협회장님께 박수 부탁드립니다.”
박수가 한차례 쏟아진 다음, 이상덕 협회장에게 마이크가 넘어갔다.
일본 통답게, 이상덕은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이상덕 협회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연합 공격대를 조직하게 된 배경, 그리고 연합 공격대로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지, 그것을 말씀드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