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47화 (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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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6: 주석 (3)

Episode 16: 주석 (3)

넓은 홀의 반대편 기둥 뒤에서, 이준기가 걸어 나왔다.

둘 사이의 거리는 50미터 정도.

“주석! 여기 퀘 하러 온 거냐? 소리 질러서 오크 사원 무너뜨리는 거야?”

“오오, 이준기 선배, 드디어 다시 만나네요. 농담은 좀 썰렁하기는 하지만 반갑습니다. 문 선배는요? 문아린 선배?”

문아린이 기둥 뒤에서 나오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석.”

“이야, 2대1은 좀 치사하기는 하지만 봐줄게요. 그래도 내가 여기서 최고 레벨이니까요.”

“우린, 여기 미션 거의 다 진행했거든. 2층에 올라가서 몬스터 하나만 잡으면 끝나. 어때? 같이 가겠어?”

“아아, 그건 흥미로운 제안이네요. 사실 저도 미션 거의 다 진행했거든요. 2라운드 끝나고 다섯 명 중에서, 과반수니까 어디 보자, 2.5명 죽이면 되거든요. 현재까지 2.0명 죽였네요. 0.5만 더하면 되니까, 제가 더 빠를 것 같은데. 어때요?”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지만,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우린 두 명이거든.”

“저, 26레벨이라니까요? 저렙 두 분이 절 당해낼 거 같아요?”

“우리 둘 레벨 합치면, 44레벨인데?”

“아아, 제발요! 이준기 선배. 아저씨처럼 썰렁하게 그게 뭐예요?”

“좋아, 그럼. 내가 진지하게 한 가지 제안해도 될까?”

“제안이야 언제든지 환영이죠.”

“1대1 결투로, 어떻게 할지 정하는 거야. 내가 이기면, 사람 죽이는 거 그만두고 오크 사원을 깨는 쪽으로 던전을 클리어하는 거다.”

“제가 이기면요?”

“그럼 날 죽여. 그럼 네 미션을 깰 수 있겠지.”

“아주 좋은 제안이기는 하네요. 약속이 지켜지냐가 문제겠지만. 문아린 선배가 바로 저어기 있는데, 제가 이 선배를 막 죽이려고 할 때, 가만히 있을까요?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 제가 그런 제안을 믿을 상황인지 말이죠.”

“글쎄.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도 괜찮은 제안인데? 넌 기습도 안 하고 우릴 그냥 불렀잖아. 2대1을 각오하고 그렇게 한 거 아냐?”

“각오요? 그건 너무 무거운 단어네요. 그냥 2대1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거죠.”

“그러니까 도중에 아린이가 약속을 깨고 내 편을 들어도, 넌 뭐 원래보다 불리할 것도 없잖아?”

“아하, 그렇군요. 저한테 아주 유리한 제안이었군요. 그렇다면, 문아린 선배!”

문아린이 대답했다.

“왜?”

“문 선배 생각에도 이게 공정한 것 같습니까?”

“아니. 나는 준기 오빠가 너무 봐준다고 생각해. 살인자는 그냥 죽여도 된다는 게 내 생각이거든.”

“이거, 이거··· 여성 구원자분들, 너무 무서워요. 하 선배도 말은 되게 무섭게 하더라고요.”

이준기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래서, 하민서를 죽인 거야?”

“제가 아까 2.0명 죽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2.0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누군가 죽었겠죠.”

하민서를 꼭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준기는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주석. 꼭 피를 봐야겠어?”

“네. 이 던전은 그런 던전이잖아요?”

“난 그냥 널 때려눕히고 던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재판에 회부할 생각이다. 살인이기는 해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니까.”

“이준기 선배! 그거 진심 아니죠? 재판이라니 어디 재판요?”

“어디 재판이냐니? 너, 외국인이었냐?”

“설마, 저를 일반인들 재판에 넘기겠다는 거예요? 레알?”

“그럼 군사재판에 넘기랴?”

“우린 구원자잖아요. 일반인이 감히 우릴 재판···한다고요?”

“주석. 뭔가 착각이 심하구나. 너나, 나나, 그리고 여기 아린이도 전부, 인간일 뿐이다.”

주석이 잠깐 고개를 숙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준기를 향해 말했다.

“우아, 이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고리타분하고 짜증 나는 성격이시네요. 뭐, 좋아요. 맘대로 하시죠. 이 선배 혼자든, 문 선배와 둘이 덤비든, 상관없습니다. 둘 다, 죽여드릴게요.”

주석의 양쪽 손에 단검이 하나씩 쥐어졌다.

*****

지하층에서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기계실 쪽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쓸데없이 빌딩이 높네요. 한 층 올라가는 계단이 보통 건물 3, 4층 높이인 것 같아요.”

“그러게 말야. 오크가 인간보다 좀 크기는 해도, 건물을 이렇게 높게 지을 이유가 있나?”

만 하루 동안 열심히 움직여서 그런지, 둘 다 계단 오르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걸 겨우 다 올라와서 1층으로 나오려는 순간.

“이준기! 문아린!”

1층의 그 광대한 공간을 주석의 에너지 넘치는 샤우팅이 꽉 채웠다.

“하하. 특이한 사람들 많네.”

“괜찮을까요? 몬스터가 듣고 달려온다든가.”

“그럼 오히려 좋을 텐데 말야. 2층 신관실은 문이 두꺼워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릴 거야.”

“타이밍 한 번 정확하네요. 1층을 다 치웠다는 사실을 알고 저러는 것처럼.”

“아무튼, 재미있는 캐릭터네. 살인자이긴 하지만.”

넓은 공간에 메아리가 가득 차 날아다니니, 주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양쪽으로 거대한 기둥들이 도열하고 있는 ‘그랜드 홀’ 한가운데라고 생각이 되었다.

계단에서 이어지는 1층 한쪽 구석에서부터, 둘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천천히 걸었다.

다시 주석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이준기! 문아린!”

기둥 뒤다.

아마, 텔레포트해서 처음 도착하는 위치 근처.

“훗, 나가봐야겠다. 저렇게 부르는데.”

“도대체 저 자신감의 원천이 뭘까요? 어이없네요.”

“우리가 불살을 맹세한 사람들로 보이나 봐.”

“착각도 심하네요. 오빠는 몰라도 전 절대 아닌데.”

“난 2라운드 클리어한 공인 살인자인데?”

“쩝. 그렇네요. 제가 살인자랑 함께 있었네요. 하하.”

“아린아.”

“네.”

“내가 주석한테 제안을 하나 할 건데, 너도 동의해줬으면 좋겠다.”

“뭔데요?”

“그냥··· 서로 죽이지 말자고 해보려고.”

“그게 되겠어요? 저쪽은 연쇄살인마인데?”

“일단, 제안은 해보려고.”

“알았어요. 주석하고는 처음 얘기해보는 거니까요.”

“오케이. 그럼 나간다.”

“네.”

이준기는 기둥 바깥으로 나가서 주석의 이름을 불렀다.

*****

장혁수, 소현배.

왜 그들과는 달리 살의나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까?

배시시 웃는 살인미소 캐릭터라서?

살인미소?

어쩌면 장혁수보다 더한 사이코패스다.

이준기와 주석.

검날 네 개가 현란하게 교차하며 불꽃을 튀겼다.

리허설이 잘된 두 명의 군무라도 보는 듯하다.

분명히 둘 모두, 날붙이 상대방의 몸에 닿게 하려고 저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칼날 네 개는 상대방의 몸에 닿지 못하고 중간에서 서로 만나기만 할 뿐이다.

“오오, 이준기 선배. 자신감 가질 만하네요. 저렙이라고 깔보면 안 되겠네.”

“주석, 너도 대단한데. 죽이기에는 실력이 아깝다.”

“누가 누굴 죽일까요?”

“글쎄. 궁금하냐?”

이준기는 주석의 칼날을 오른쪽으로 제치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잠깐 옆으로 기울었지만 금방 몸의 균형을 되찾은 주석이 한쪽 발을 중심으로 가볍게 피벗 해서 뒤로 돌았다.

돌아선 주석을 향해, 이준기의 숏소드, ‘오캄’이 위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려왔다.

피핏!

주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 준기 오빠!”

이준기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귀검, 주석이 장기로 내세우는 희귀 스킬.

가공할 위력이지만, 겨우 2초 동안 지속될 뿐이다.

2초 동안만, 전신 모든 감각의 날을 세우면 된다.

- 귀검. 어둠 4, 바람 6 소요. 즉시 시전. 자신의 이동 속도를 400%, 공격 속도를 100% 증가시킵니다. 2초 동안 지속됩니다.

공격 속도가 두 배가 되는 것, 분명히 엄청난 위력이다.

그러나 다섯 배로 증가하는 이동 속도가 훨씬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귀검’의 제물이 되는 사람들은 그 빠른 이동 속도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만다.

빠른 발놀림에 현혹되지 말고,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포인트.

챙!

“어라?”

단검이 이준기의 무기에 막힌 주석이 뒤로 두 걸음을 빼면서 말했다.

이준기도 무기를 앞으로 세운 채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놀라긴 아직 이른데.”

“이준기 선배, 잘난 척 할 만하네요?”

“생각이 좀 바뀌냐? 항복할래?”

“그럴 리가요. 저도 자존심이 있는데.”

“그래? 귀검, 그거 책 소모가 심해서 몇 번 더 못 쓸 텐데?”

“우와, 이준기 선배 공부 많이 한다는 말이 사실이었군요? 별걸 다 아시네.”

대화를 끌면서,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을 통해 주석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 26레벨.

- 전문화: 어둠 10, 바람 14, 마나 2.

- 힘 50. 민첩 70. 체력 40. 정신력 10. 물리 저항 25. 마력 저항 10.

- 성흔: 없음.

- 획득 스킬: 귀검.

- 인벤토리: 썬더볼트, 크레센트, 강화 국궁, 강화 화살 20개, 세련된 가죽 장갑, 애쉬 슈라우드, 숲 지기의 장화, 중급 힐링 포션 9개, 기본 식량 팩 4개.

‘무기는 괜찮은 편이지만, 성흔도 없고 획득 스킬도 귀검 하나뿐이다. 스탯으로 나타나지 않는 재능이라는 건가.’

“겨우 20, 아니 21레벨이라면서요. 이 선배 정말 대단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습이라도 할 걸 그랬어요.”

“너도 대단하다. 주석.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길드에서 유망주 취급받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 유망주 시절은 지났나? 암튼, 뭐 그랬어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 다시 시작할까?”

이준기가 오른손의 검을 치켜들고 치고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귀검’을 써서 이준기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주석.

피핏!

펑!

이준기가 ‘점멸’로 주석의 시야를 벗어났다.

평소의 다섯 배 속도로 움직이는 주석이 방향을 틀고 이준기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또 한 번, 이준기가 ‘점멸’로 달려드는 주석을 따돌렸다.

챙!

평소 속도로 돌아온 주석, 그리고 이준기가 서로 다시 칼날을 대고 있다.

문아린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40분.

전투를 시작한 지 10분이 지났지만, 양쪽 모두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생사가 걸린 일인데, 자존심 싸움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암튼 남자들이란.’

“이준기 선배, 아이템은 안 써요? 뽑기 아이템요.”

“응, 그거? 난 이미 썼는데?”

“뭔데요?”

“컵라면. 어제저녁에 아린이랑 하나씩 먹었지. 두 개 나왔거든.”

“엉? 정말요? 아이템 두 개 뽑은 게 다 컵라면이라고요?”

“나도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야. 운수 오지게 좋지?”

“뭐, 저도 똑같은 거 두 개 나왔는데, 어제 김형채 선배한테 다 썼습니다.”

“그렇군. 공평하네.”

“공평하네요. 그렇죠, 아린 누나?”

문아린은 대답하지 않고 서로 대치하는 둘을 쳐다보았다.

“대답도 안 해주시네. 좋아요, 좋아. 갑니다!”

다시 ‘귀검’을 발동해서 이준기에게 날아드는 주석.

‘썬더볼트의 효과로 발동하는 마지막 귀검. 이것만 피하면 된다.’

이준기는 정신을 집중하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석조 건물, 돌로 된 바닥이라서 그런지 발소리가 더 잘 들린다.

그걸 계산에 넣었는지는 몰라도, 바깥에서 싸울 때보다 주석에게 덜 유리한 상황.

챙!

오른쪽 뒤에서 달려드는 주석의 칼날.

이준기는 앞으로 한 발자국을 떼면서 오른손의 ‘오캄’으로 주석의 공격을 쳐냈다.

주석이 연속 동작으로 왼손의 단검을 찔러왔다.

푹!

주석의 단검이 이준기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주석의 왼손에 들린 단검, 크레센트가 이준기의 갑옷을 뚫고 들어왔다.

“아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주석.

다음 순간, 이준기의 검이 주석의 빈 허리를 가르고 들어갔다.

“헉!”

‘귀검’의 속도 버프가 끝난 주석이 왼쪽 허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이준기가 빠르게 달려들어 오른손의 오캄을 휘둘렀다.

쓰러진 채 왼손을 뻗어 오캄을 막으려던 주석.

그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져 나갔다.

“졌지?”

“웃기고 있네.”

주석의 손끝에서 검은색의 형상이 날아와 이준기에게 직격했다.

즉각적으로 대미지를 입히고 상대를 중독시키는 어둠 계열 스킬, ‘어둠의 화살’이다.

이준기가 비틀거리는 사이, 주석이 손에서 놓쳤던 단검을 다시 쥐고 일어섰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며 숨을 고르던 이준기와 주석.

이준기는 오른손의 검을 치켜들고, 주석은 단검을 든 양손을 벌리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쓰팟!

이준기의 검은 주석의 왼팔을 내리쳤고, 주석의 단검은 이준기의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펑! 펑!

- 마나 폭발로 6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 마나 폭발로 5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마나 폭발을 한 차례 교환한 둘.

이준기는 주석의 왼쪽 어깨를 대리석 기둥에 밀어붙였다.

“이런 방식으로는 날 못 이겨.”

주석도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죽여봐, 새꺄!”

칼날을 맞댄 상태로 둘은 다시 마나 폭발을 맞교환했다.

펑! 펑!

- 마나 폭발로 9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 마나 폭발로 7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둘이 뒤로 한 발자국씩 떨어졌다.

“난 아직 마나 폭발을 쓸 수 있다. 항복해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새꺄!”

주석이 양팔의 단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준기는 검을 사선으로 세우고 주석의 칼날을 비켜 내렸다.

펑!

- 마나 폭발로 14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이준기의 마나 폭발이 작렬하면서, 주석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주석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마나 책 두 권을 이미 소모한 주석은 더 이상 마나 폭발 스킬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부상으로 이성이 흐려진 걸까, 아니면 그저 발악을 한 걸까.

몇 차례 피를 토하던 주석의 몸이 흔들거리는 걸 멈췄다.

언제나 웃던 그의 얼굴은 고통과 분노로 잔뜩 일그러졌다.

그 얼굴에서 곧 생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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