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45화 (4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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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6: 주석 (1)

Episode 16: 주석 (1)

한참을 기다렸지만, 주석은 텔레포트 위치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주석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보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안 올라오는 거야.”

“여기가 어떤 구조인지 모르잖아요?”

“상상을 해봤겠지. 그것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나눠가면서.”

“준기 오빠처럼요?”

“그래, 나처럼. 하지만 정보 모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혹시 주석에 대해 들은 소문 같은 거라도 있어?”

“브릴리언트 길드라면, 서울 소재 대형 길드니까, 사실 다른 서울 길드 분들이 훨씬 더 잘 알 거예요. 전 주석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걸요.”

“브릴리언트 길드에 대해서는?”

“엘리트주의랄까, 그런 게 있다고 좀 까이는 길드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싹수가 보이는 유망주라면 저렙부터 키워준다고.”

“주석이 그런 유망주겠군.”

주석. 이준기는 전혀 모르는 인물이다.

이준기가 다른 구원자들에 대해 신경을 쓸 만큼 여유가 생긴 것은, 11월 중순에 ‘리베로’ 길드 메인 탱커가 된 다음부터다.

원래 역사에서 9월 하순에 죽어버린 주석에 대해 정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정도 실력의 구원자가 살아있었다면, 한일전쟁에서 큰 활약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국노가 아니라면 말이지.’

“아린아, 혹시 협회장 파벌, 반협회장 파벌 이런 얘기 들어봤어?”

“아, 오빠도 그 얘기를 벌써 들으신 거예요?”

“아는 대로 얘기 좀 해줄래?”

“지금까지 이상덕 협회장이랑 박충기 길마가 선거에서 붙은 게 총 세 번이래요. 준비 위원장 때 한 번, 그리고 협회장 선거에서 두 번.”

“응.”

“그러니 둘이 얼마나 철천지원수겠어요? 잘은 몰라도 협회장한테 떨어지는 정부 지원금이 한 달에 수백억이라고 들었어요. 그럴 만도 하죠.”

“협회장 자리에 욕심낼 만하군.”

“계속해서 선거에서 지니까, 박충기 길마도 자기편을 만드느라 아주 열심인가 봐요. 협회장 쪽이야 당연히 이미 세력이 있는 거고요. 제가 알기로는, 협회장 파벌이 6PM, 코리아, 탑픽 길드고요.”

“아하.”

“반협회장 파벌이 문경새재랑 신선자라는 거거든요. 신선자는 제가 있는 길드죠.”

“길드 전체가 한 몸처럼 같은 사람을 지지하기는 쉽지 않잖아? 길드 입회할 때 누굴 지지하는지 물어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죠. 그래서 사실 저는 누구 편도 아니에요. 솔직히 이상덕 협회장도 싫고 박충기 길마도 별로예요. 협회장 선거는 딱 한 번 해봤는데, 그냥 무효표 만들었거든요. 도장을 한 열 개쯤 찍어서 냈죠.”

“하하. 아린이,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성격이네.”

“그거, 칭찬이죠?”

“당연하잖아. 내가 이렇게 웃는 거 봤어?”

“헤헤.”

이준기는 텔레포트 위치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어차피 기둥 뒤에 숨은 채로 그쪽을 향해 앉아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주석이 나타나면 눈치를 못 채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위치다.

하지만 긴장은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길드 전체가 똘똘 뭉쳐서 한쪽을 미는 경우도 있나 봐요. 대표적으로 협회장 파 코리아 길드.”

“김형채 소속 길드 말이지?”

“네. 그 정반대 편에는 당연히 문경새재 길드가 있고요. 거긴 길마가 박충기니까, 당연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길마가 이상덕 협회장인 6PM도 똘똘 뭉친 협회장 파라고 봐야 할 텐데, 또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이 많아요.”

“왜지?”

“6PM에 길수연 힐러가 있어서 그렇죠 뭐. 길수연은 브릴리언트 길드 김나리와 함께 힐러 랭킹 1위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람인데, 협회장 선거에 아예 안 나오는 걸로 유명해요.”

“아, 그렇구나.”

“뭐 워낙 예쁘기도 해서 인기는 엄청 많은데, 인터뷰 안 하는 걸로도 유명하고요. 준기 오빠도 해운대에서 보셨잖아요?”

“그렇지. 메인 힐러였으니 나랑은 별 상관이 없었지만.”

“준기 오빠 표정을 보면 전혀 안 그런 것 같은데요. 설마, 길수연 힐러한테 관심 있어요? 얼굴 표정이 좀 이상한데?”

‘그거야 죽기 직전까지 같은 팀이었으니까 그렇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준기는 빠르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장난치지 말고. 얘기 좀 계속해줘 봐.”

“흠. 알았어요. 협회장 파, 반협회장 파 이 구도에서 제일 웃기는 게 사실 충무공 길드예요. 오빠네 길드요.”

“어, 그래?”

“오빠야 얼마 전까지 저레벨이었으니까, 이런 얘기 관심 가질 겨를도 없었겠죠. 충무공은 권영호 길마가 반협회장 파벌이고, 이도협 부길마가 협회장 파벌이래요. 웃기죠?”

“정말 그렇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모든 게 다 실력이죠. 6PM 길드 입장에서는, 협회장 선거에 나오지도 않는 길수연이 마음에 들겠어요? 그런데도 내치지는 못하죠. 하이 랭커를 어떻게 내쳐요. 그래서 하이 랭커 해야 한다니까요.”

“하하.”

“권영호 길마도 죽기 전에 랭킹 2위였으니까 자기 맘대로죠. 충무공 길드는 권영호 길마가 아니라 이도협 부길마가 실세라는 말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충무공 길드는 사실 협회장 파벌인데, 권영호 길마만 반협회장 파벌이라고 다들 생각했죠. 그런데.”

“그런데?”

“권영호가 죽었잖아요. 이젠 충무공이 완전히 협회장 파벌로 넘어가는 거죠. 더군다나 마찬가지로 협회장 파벌이었던 탑픽 길드랑 합쳤잖아요? 이도협 농간이라는 말도 많고요.”

“아아.”

“그러니까 이제 오빠도 입장을 정해야 할 거예요. 21레벨이면, 랭킹 150위 정도 할 걸요? 중견 랭커죠. 길수연 같이 깽판치는 거, 아무나 못 해요.”

이준기는 예전 생각을 했다.

길수연도 길수연이지만, 이준기야말로 협회에 무관심한 대표적인 인물로 유명했다.

양쪽으로부터 회유도 많이 받았지만, 끝까지 그런 일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길드 전쟁이 협회장 파의 우세승으로 마무리 지어지고,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고 난 다음에야,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덕은 확실히 친일 세력이다. 아니, 일본의 프락치나 다름없지. 하지만 박충기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나? 그게 문제다.’

“아린이는 어느 쪽이야?”

“저희 길드가 반협회장 파벌이기는 한데, 전 뭐 아직 피라미라서요.”

“23레벨이면 100위권은 될 거 아냐?”

“음냐. 속물 같아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9월 24일 기준으로 56위랍니다.”

“근데 주위에서 가만 놔둬?”

“전용택 길마가 자꾸 잔소리해서 짜증 나요. 길드를 옮기든지 해야지 원.”

“중립 길드는 많이 있어?”

“주석이가 소속된 브릴리언트 길드가 대표적이죠. 랭킹 1위 한상태 탱커가 길마로 있는 ‘퇴마문’ 길드도 중립이긴 한데, 거긴 워낙 작은 길드라서요.”

“공부 많이 했네. 고마워, 아린아.”

“던전 나가면 밥 한 번 사요. 거하게.”

“하하. 당근이지. 맛집이나 알아봐 줘.”

“그건 나한테 맡겨요.”

*****

사원 안이라서 여전히 조명이 밝았지만, 밤이 되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아린아, 일단 먼저 좀 자둬. 망은 내가 볼게.”

“후아. 그럼 좀 부탁할게요. 너무 졸리네요.”

“당연한 거잖아. 벌써 열한 시네.”

컵라면까지 먹고 기다려도, 주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경계를 놓을 수는 없다.

혼자인 주석과 달리, 이쪽은 두 명.

숫자의 우위는 단지 화력의 우위에 멈추지 않는다.

‘잠을 잘 수도 있단 말이지.’

이준기는 던전 입장 전에 언제나 그러하듯, 잠을 많이 자두었다.

잠이 저축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는 도움이 된다.

3년 동안 공시족 생활을 하다 보니 하루에 딱 여섯 시간만 자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고.

‘주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밤중에 기습을 해올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나 새벽 한 시, 두 시가 되어도 이준기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거 곤란한데. 나도 조금쯤은 자둬야 하는데. 이왕이면 내가 불침번 서고 있을 때 좀 올 것이지.’

새벽 네 시가 되었다.

문아린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준기 오빠, 몇 시예요?”

“네 시가 됐는데, 아직도 조용하네.”

“어, 벌써 네 시나 됐어요? 미안해요, 준기 오빠. 제가 보고 있을 테니까 오빠도 좀 자요.”

“그래, 그럼. 두 시간만 잘게. 꼭 여섯 시에 깨워줘. 물론, 그 전이라도 주석이 올라오면 곧바로 깨워주고.”

“네. 그럴게요.”

“주석 이 녀석만 처리하면 정말 푹 자고 진행해도 되니까.”

“네.”

*****

“헛!”

이준기는 깜짝 놀라면서 일어났다.

“몇 시야, 지금?”

“일곱 시요. 아직 아무 일 없어요. 더 주무셔도 되는데.”

“아, 아냐. 이제 일어나야지.”

이준기는 눈을 부릅떴다.

상태창을 열어 미션 내용을 확인했다.

24시간의 제한 시간이 있는 미션.

9월 25일 토요일 아침 7시 현재, 일곱 시간 반이 남았다.

‘병력 배치를 확인해야겠지만, 오크 사원 무너뜨리기 정도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걸 믿고 여기에서 계속 주석을 기다려도 될까?’

뭔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 이준기의 표정을 보고, 문아린이 물었다.

“주석, 혹시 죽은 거 아닐까요?”

“가능성이 0은 아니겠지만, 죽지는 않지 않았을까?”

“여기 붕괴시켜야 되잖아요?”

“아린이도 짐작하겠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주석을 기다린 이유는.”

“뒤통수 맞을까 봐 그런 거잖아요.”

“그렇지. 그 위험을 계산에 넣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 그걸 오빠가 저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의견은 들을 수도 있잖아. 참고만 할게. 부담 없이 의견만 줘봐.”

“음, 글쎄요.”

문아린은 엄지와 검지로 V자를 만들어서 턱을 괴고 잠깐동안 오른쪽 위를 쳐다보았다.

“음···”

“의견은?”

“일단 여기 진행해요. 주석도 제정신이라면 몬스터와 싸우는 우리를 기습하진 않겠죠. 우리 죽고 나면 자기도 죽을 텐데.”

“주석. 어떤 기술을 쓰는지 알아, 혹시?”

“몰라요. 오빠는 알아요?”

이준기는 거짓말을 시작했다.

“어제. 네가 먼저 여기 올라온 다음에, 주석이 한참 자기에 대해 떠들었거든. 거짓말이나 과장이 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주석의 성격을 보면 자기가 어떤 기술을 쓰는지에 대한 부분은 믿어도 될 거야.”

“그래요? 무슨 얘길 했는데요?”

“주석은 스킬 트리는 어둠과 바람. 희귀 스킬로는 ‘귀검’을 자주 쓴다고 하더군. ‘소멸’ 얘기를 안 한 거 보면, 아마 그건 습득하지 못한 것 같고.”

“귀검? 소멸?”

“귀검은 2초 동안 이동 속도와 공격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는 기술이야.”

“에, 그래요? 얼마나 빨라지는데요?”

“눈에 안 보인다고 하던데. 이건 주석의 말이 아니고 인터넷에서 본 거야.”

“엑. 그거 욕심나네.”

“소멸은, 연막탄 쓰고 사라지는 기술이지.”

“음? 아까 김형채가 투명 망토인지 뭔지를 쓰고 절 죽이려고 했는데, 그거랑 비슷하게 들리네요.”

“아마 비슷할 거야. 안 보이게 되지만, 기척은 감지할 수 있지. 소리, 냄새. 그런 걸로.”

“그러니까, 오빠 얘기는, 주석이 몬스터와 싸우는 우리를 공격해 죽이고 나서.”

“귀검을 써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였지. 역시 똑똑한 아린이.”

“’거였지’는 뭐예요?”

“귀검으로 도망갈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어. 아린이는 아마 경험이 없겠지만, 몬스터 이놈들은 한번 쫓아오기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들이라서.”

“에? 그래요?”

“소멸로 없어진 상대는 웬만하면 못 찾지. 그래서 포기하는데. 귀검으로 도망가는 건 결국 쫓아오거든. 귀검으로 몬스터의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던전을 나갈 경우만이야.”

“아하. 그렇다면, 주석은 소멸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우리만 죽이고 도망가는 방법은 사용하지 못하겠네요?”

“그렇지.”

“주석이 준기 오빠한테 거짓말한 거면요?”

“그래도 할 수 없지. 미션 시간제한, 이제 일곱 시간 정도 남았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군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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