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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5: 고공 침투 (3)
Episode 15: 고공 침투 (3)
나무 아래에 도착하자, 문아린이 이준기에게 물었다.
“상태창을 열고, 던전 정보로 들어왔어요. 그 다음엔요?”
“던전 정보에서 ‘미션’을 클릭하면 3-2 ‘고공 침투’ 나오잖아. 그걸 눌러.”
“아, 됐다. 여기서 ‘예’ 클릭하면 되는 거예요?”
“응. 빨리.”
“자, 그럼 클릭합니다. 어? 어어?”
눈앞에서 문아린이 사라졌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주석이 나타났다.
양팔을 들고 이준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는 다가왔다.
“말로만 듣던, 이준기 선배!”
“주석. 넌 왜 사람들을 죽이는 거지?”
“네? 뭐라고요? 그게 미션이잖아요! 퀘스트라고요. 던전 들어왔더니 그걸 시키는데, 어떡하라고요?”
“미션은 두 개인데, 혹시 몰랐어?”
“아! 그, 뭐랄까, 오크 잡는다는, 그 식상한 퀘스트?”
“올라가자. 같이 오크 잡자구. 그럼 다른 사람 안 죽여도 돼.”
“에? 정말요? 그래서 제가 뭘 얻을 수 있나요?”
“레벨업도 하고, 아마 보물 상자도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나갈 수 있지.”
“아, 이 선배. 그건 좀 약한데요. 사람 하나 죽일 때마다 보물 상자 이상으로 템이 쏟아지거든요. 이 선배, 그거 아시잖아요?”
“살인하면, 기분 별로지 않아?”
“정말요? 이 선배는 저랑 같은 과 아녔어요? 아까 알림 메시지도 나왔잖아요! 저 말고도 사람 죽여서 미션을 깬 사람이 하나 더 있다고 해서! 얼마나 흥분됐었는데요. 그게 바로, 이준기 선배!”
단검을 든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과장스러운 어조로 외치는 주석.
무표정으로 그 퍼포먼스를 쳐다보던 이준기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제안을 거부하는 거지? 네가 고른 그 미션을 굳이 하겠다는 거잖아. 맞지?”
“딩동댕! 네, 맞아요, 선배!”
“날 죽일 자신은 있고?”
“우하하! 이 선배, 자신감이 넘치네요! 레벨이 저보다 좀, 많이 낮은 것 같은데. 혹시 모르셨나?”
“그래, 그럼.”
“무기, 꺼내세요. 저 그렇게 막돼먹은 놈 아닙니다.”
“그래. 좋아. 잠깐만 기다려.”
“무기가 많으신가 봐요? 오오, 기대되는데요. 선배를 죽이면 또 인벤토리 난리 나겠네.”
이준기는 인벤토리···가 아니라 상태창을 열었다.
던전 정보, 그리고 빠르게 미션 3-2를 클릭.
“안녕!”
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이준기가 주석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주석은 머리에 손을 대고 입을 크게 벌려 웃기 시작했다.
“우후, 우하하하! 이준기 선배가 내빼버렸네! 이거, 어떡하지?”
*****
오후 세 시. 9월 말이지만 이상하게 덥다.
‘던전 안 기후는 던전 바깥과 같게 세팅된다. 이게 내가 아는 상식인데.’
결박석에 몸이 묶인 채로 30분이 넘었다.
마법적인 힘에 의해 고정된 것이므로 힘들지는 않다.
이런 자세를 근육으로 버티려면 한참 전에 쓰러졌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다.
두 발이 떠 있지 않은가. 진정한 마법이다.
던전에 들어와서 세 번째 라운드.
1라운드에 한 명, 2라운드에 두 명이 죽어서 이제 다섯 명이 남았다.
이준기와 문아린은 나무 위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섬 위에 남은 것은 김형채를 포함해서 모두 세 명.
둘 중 누가 나타나더라도 김형채는 선빵을 맞고 전투에 돌입해야 한다.
은신 망토가 나왔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뒤집어쓴 결과다.
좀 더 생각을 하고 움직였어야 하는 건데, 욕심이 과했다.
해외에서 뜨는 사업 아이템이라고 해서, 별로 잘 알아보지도 않고 친구에게 투자했다가 십억 원이 넘는 빚을 진 것이 몇 년 전이다.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아른거려 구원자가 되었다.
길드 몇 군데를 전전하며 던전에서 돈을 벌어 빚을 갚다가, ‘코리아’ 길드의 마스터, 고성하를 만났다.
상당한 돈과 함께 들어온 스카우트 제의.
기분 좋게 수락하고, 고성하의 길드로 옮겼다.
‘그게, 이 수렁의 시작이군.’
결박석 지속 시간이 1시간이라고 했던가 2시간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평생 지속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전에 공격을 당하겠지.
그게 이번 던전의 미션이다.
‘여기서 죽는 건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김형채가 죽으면 고성하는 새로운 수하를 물색해야 하겠지.
김형채처럼 고레벨 구원자를 다시 구하는 건 쉽지 않으리라.
하긴 뭐, 세상만사가 원래 그런 거다.
‘고성하. 모든 게 다 네 맘대로 되는 건 아니란다. 이제 좀 알겠냐?’
네 명의 살인자가 이 던전에 있다.
1, 2라운드 미션을 클리어한 소현배, 주석, 이준기.
그리고 고성하의 개로 여기저기에서 다른 구원자들을 죽여온 김형채.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과 싸우던 문아린까지가 현재의 생존자들 전부다.
“휴우.”
뒤에서 갑자기 들리는 숨소리에, 서늘한 기운이 김형채의 등뼈를 타고 내려갔다.
몸이 공중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으니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볼 수도 없다.
일단 남자 목소리인데, 저게 누구더라?
“오호. 와! 이게 그거구나. 오전에 내가 당했던 거. 결박석··· 이던가 이름이?”
주석. 그래. 주석 목소리다.
김형채는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외쳤다.
“주석! 주석 구원자님? 저 좀 내려줘요.”
“어? 말을 하시네? 아차, 그랬지. 저도 이거 당해봤는데, 몸은 얼어붙어도 말은 되더라고요. 김형채 선배님이시죠?”
“네, 네. 맞아요. 김형챕니다. 저 좀 도와줘요.”
“뭐, 어떻게 해드릴까? 계란 껍질 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살짝 때려드려요?”
“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손바닥으로 살짝 치면 되지 않을까요?”
“나, 참. 아까 매달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정말 우습네요. 꼴이. 이게 웬 망신이야.”
“주석 구원자님!”
“아이, 김 선배님. 말 놓으세요. 제가 열 살은 어릴걸요?”
“응, 정말 그래도 돼?”
“그럼요, 선배님.”
“그래, 그럼. 주석, 아니, 석아. 나 좀 내려줘.”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몇 개 이어지더니, 주석이 김형채의 앞쪽으로 나타났다.
‘아침에 지각하고 나서 배시시 웃던 모습이 생각나네. 기생 오라비 같이 생긴 놈 같으니라구.’
배알이 틀렸지만, 지금은 주석의 호의를 구걸하는 수밖에 없다.
김형채는 최대한 불쌍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석아!”
“아, 네. 김형채 선배님. 안녕하세요.”
“인사는 나중에 하고, 나 좀. 제발.”
“선배님은 뭐 좋은 무기라도 좀 갖구 계세요?”
“어? 무기? 그래, 나 구해주면 내 무기 중에 하나, 너 줄게.”
“하나라니 무슨 말씀이에요. 그런 섭한 말씀을. 구원자 죽여보니까, 뭐 강도나 다름 없더라구요. 전부 다 제께 되던데요? 설마 김형채 선배, 그거 몰랐어요?”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김형채 선배 인상 더럽잖아요. 살인 좀 해보셨을 마스크라서요. 하하.”
“석아, 주석!”
“네, 선배님.”
“네가 선택한 미션이 나머지의 절반을 죽이는 거잖아?”
“음··· 네, 그렇죠.”
“내가 도와줄게. 우리 둘이 나머지 셋을 죽이면 되는 거, 아냐?”
“오오. 선배님 산수가 좀 되시네요. 난 다섯의 절반이래서, 2.5명 죽이려고 했는데.”
김형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머리 위의 태양 때문이 아닌, 주석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악의가 불러온 땀방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두 명 죽이고 나서, 나머지 한 명은, 그러니까, 반으로 갈라드리려고 했죠.”
“주, 주석! 주석 구원자님!”
“너무 겁먹지는 마세요, 김 선배님. 한심한 얘기지만, 아직 두 명을 못 채웠답니다. 그러니까 선배님을 반으로 갈라드리고 싶어도, 그럴 사정이 못 되네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주석은 김형채를 향해 꾸벅 머리를 숙였다.
김형채는 이제 확실히 알았다.
주석은 자신을 살려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분노와 절망이 김형채의 목소리에 섞여 나왔다.
“이, 이런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
“어? 갑자기 웬 욕을 하세요?”
“죽이려면 한번 죽여봐, 새꺄!”
“아하하! 성질도 급하시네. 제가 김 선배님 찾느라 20골드짜리 ‘게스 후’를 두 개나 썼어요. 이게 뭔진 아세요?”
“알 게 뭐야!”
“한참을 기다리는데, 선배님이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찾아 나섰잖아요. 저 ‘게스 후’라는 아이템이 한 사람 딱 찍어서 지도에 표시해주는 아이템이에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죠?”
“하! 운빨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구만.”
“하긴,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죠. 아무튼, 저는 지금까지 한 명, 아니, 이제 두 명이구나. 암튼 소현배랑 이준기가 누굴 죽였는지 제가 모르잖아요? 그래서 ‘게스 후’ 저거 두 개 있는 걸 다 썼다고요. 멍청한 김 선배님 때문에.”
“미친 새끼. 계집애처럼 생겨가지구 수다로 렙업했냐?”
“네, 네. 알겠습니다. 이제 정식으로 소개 들어갑니다.”
“소개, 무슨 소개? 이 미친 새끼가! 어디 네 맘대로 되나 보자.”
“에··· 저는 주석이고요, 브릴리언트 길드 소속 26레벨이에요. 그러니까 김 선배님보다 제가 레벨이 높죠?”
“살인해서 레벨 단 게 뭐 자랑이라고 떠벌리는 거야, 이 개자식아!”
“특기는, 음··· 특기를 좀 보여드려야 되는데, 이건 뭐 거미줄에 걸린 날파리 마냥 가만히 계시니···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일단 좀 맞고 시작하시죠.”
“그래, 오냐. 덤벼라.”
“뭐 착각하시는 건 아니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이거 당해봤다니까요? 한 대만 톡! 맞아도 깨지는 거, 저도 알아요.”
“흥, 그래?”
“그러니까 존나 쎄게 때려드리겠습니다. 기절하시도록 해드리죠. 기대해 주세요. 하하하!”
*****
바깥에서 볼 때는 통나무집이지만, 들어오고 나면 대리석 건축물.
던전에서는 흔한 패턴이다.
연속 공간이 아닌 경우, 그러니까 포털이나 순간 이동 같은 것으로 연결된 공간은 바깥 모양과 안 모양이 서로 연결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람 키 높이의 열 배는 되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두 줄로 도열한 내부 구조.
오크 정찰병들이 서 있기도 하고, 순찰을 다니기도 하지만, 입구 쪽에는 아무도 없다.
이준기는 거대한 기둥 한쪽에서 문아린을 발견하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
“아린아!”
“준기 오빠!”
“휴. 암튼 잘 도착해서 다행이다. 혹시 다른 사람은 없었어?”
“네. 저뿐이에요. 이 근처만 돌아본 거지만.”
“그렇구나.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민서는 올라오지 못한 모양이다. 설마 안 올라온 건 아니겠지.’
“왜 늦게 올라온 거예요? 저랑 동시에 클릭하는 거 아니었어요?”
“나무 근처에, 주석이 기다리고 있었어.”
“네?”
“주석은 사람들을 사냥하는 미션을 선택했지. 나는 오크 사원으로 올라오는 미션을 골랐고. 그렇다면 사원 미션을 하려고 나무 근처로 오는 사람들을 매복하면 되잖아?”
“아!”
“그래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사라지자마자 내 눈앞에 나타나던걸.”
“기습도 아니고 그냥 나타났다고요?”
“내가 레벨이 많이 낮으니까, 만만해 보였나 봐.”
“그래서, 주석 그 녀석을 때려눕히고 올라온 거예요?”
“날 좋게 봐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너무 심한 과대평가잖아?”
“그럼요? 어떻게 빠져나왔어요?”
“뭘 어떻게 빠져나와. 그냥 오크 사원으로 입장하기를 클릭했지.”
“아!”
기둥 뒤쪽으로 사원 내부를 훑어보며, 이준기는 말을 이었다.
“시간이 많지는 않아. 주석이 하려는 미션은 남은 팀원들 다섯 명 중에 과반수, 그러니까 세 명을 죽이는 거야. 그러니까 주석은 우리 빼고 나머지를 다 죽여도 한 명이 모자라지.”
“쫓아온다는 거예요, 그럼? 여기로?”
“그래. 여기 올라온 다음에는, 내려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니까. 우선 섬을 돌아다니면서 남아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하겠지.”
“그러다가 자기가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유리해지는 것이고.”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주석, 우리 둘. 나머지 두 명은 하민서와 김형채야.”
“하민서를 만나신 거예요?”
“그래. 바로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지. 하민서에게 미리 여기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어.”
“그럼···”
“아마, 주석의 매복에 걸려든 것 같아.”
“김형채도 주석이 쉽게 죽이겠군요. 제가 묶어놨으니.”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 주석이 김형채를 얼마나 빨리 찾아내느냐가 문제겠지만.”
“그럼 주석이 곧 올라올 수도 있겠네요.”
“너도 올라왔을 때, 바로 저 위치였어?”
이준기는 조금 전 자신이 텔레포트 되었던 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맞아요.”
“그렇다면, 저 위치를 잘 관찰할 수 있으면서, 우리 쪽은 엄폐가 되는 장소를 찾아야겠다.”
장소를 물색하려고 일어나다가, 이준기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아린아.”
“네?”
“혹시, 컵라면 먹을래? 두 개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