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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5: 고공 침투 (2)
Episode 15: 고공 침투 (2)
“형채 씨?”
단 한 번만, 문아린은 김형채를 불렀다.
적막하다.
이따금 수풀을 쓸어대는 바닷바람 소리가 들릴 뿐.
새로 미션이 주어지고, 아이템 뽑기를 하던 중에 사라졌다.
뽑기 아이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김형채가 배신했다는 것이다. 지금 움직여도 괜찮은 걸까.’
변수가 있다면, 김형채가 사라지기 직전, 문아린이 그에게 자신이 뽑은 아이템의 링크를 넘겨줬다는 것.
‘결박석’.
섣불리 정보를 넘겨준,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었던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일지 모른다.
공격 즉시, 문아린은 ‘결박석’을 이용해 김형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 사실을 전달한 것이나 마찬가지.
‘김형채가 얻은 아이템은 뭘까?’
문아린은 생각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간 이동을 해버렸거나, 투명 인간이 되었거나, 둘 중 하나다.
공간 이동을 해버렸다면, 문아린으로서도 나쁠 것이 없다.
김형채가 배신을 했건 말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조심하면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면 된다.
만약 투명 인간이 되었다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따금 바람 소리가 나지만, 이렇게 조용한데. 김형채, 혹시 아까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거 아닐까? 내 아이템 정보를 받았으니 그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아니, 다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던전 안이라면.
그냥 집에 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료 퇴각’, 이런 아이템도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이런 던전이라면.
문아린은 김형채의 빈자리를 노려보았다.
바지에 흙이 묻는 걸 꺼렸는지, 풀을 뉘여 그 위에 앉은 흔적이 있다.
풀이 누운 각도로 봐서는 현재 그 위치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 걸음이나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까? 정말 숨도 죽이고 귀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문아린은 활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김형채가 남기고 간 빈자리를 응시하면서, 화살을 꺼내 활시위에 매겼다.
*****
이준기는 맵 중앙 부분의 북쪽 끝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다.
하민서가 ‘게스 후’를 빌려준다고 했을 때 그냥 받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호기를 부린 건 아닐까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아니, 그렇게 하길 잘했다.
‘남한테 빚져서 좋을 것 없다. 더구나 하민서는 내가 소현배와 싸울 때 끝까지 저울질만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난감한 상황인 것은 맞다.
2라운드 때 위치 추적을 했을 때, 문아린은 섬의 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약속 장소를 이탈해서 문아린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
영화나 드라마에 맨날 나오는 전개 아닌가.
서로 엇갈리는, 고구마 전개.
던전에 입장한 지 이미 세 시간이 넘게 지났다.
아직까지 도착하지 못했다면 뭔가 석연찮은 상황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최악의 경우, 주석이 살해한 대상이 문아린일 수도 있다.
소현배와 전투에 돌입한 이후, 이준기는 문아린의 위치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과연 여기에서 문아린을 기다리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무엇보다, 배틀로얄 미션보다 오크 사원을 먼저 끝내야 이 살육전을 멈출 수 있다.
그건 문아린뿐 아니라 살아남은 다른 모든 구원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심지어 사람을 죽인 주석에게도.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문아린의 위치는 여기쯤.’
이준기는 상태창을 열어 지도를 체크했다.
폭넓게 정찰을 하면서, 지그재그로 남동쪽을 향해 이동하는 경로를 그렸다.
마지막으로 문아린이 확인되었던 위치까지는 일단 가보는 것으로.
거기까지 가는 동안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오크 사원 미션을 진행하는 걸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멀리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남쪽에서부터 전력으로 사람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다.’
*****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문아린은 김형채가 남긴 빈 공간을 노려보았다.
마치 유리로 만든 물체가 움직이는 것 같이, 빈 공간에서 상이 어그러졌다.
활시위를 놓기에는 너무 가깝다.
문아린은 손에서 활을 던져버리고 뒤로 빠르게 후퇴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척추파쇄자를 꺼내 쥐었다.
스캉!
김형채가 빨랐다.
척추파쇄자가 문아린의 손에 채 쥐어지기 전에, 상이 어그러진 곳에서 김형채가 튀어나오면서 양손검을 휘둘렀다.
양팔 상완부를 한꺼번에 베인 문아린이 뒤로 쓰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김형채, 이 배신자!”
김형채는 대답 대신 검을 고쳐잡고 내리찍었다.
옆으로 구르면서 간신히 피한 문아린.
정신없이 힐링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두 사람 모두 전투의 열기에 사로잡혀 ‘결박석’의 존재에 대해 잊고 있었다.
갑자기 자기에게 화살을 겨누는 문아린을 보고 이판사판 달려든 김형채.
갑작스러운 기습에 팔을 베이고 고통에 사로잡힌 문아린.
힐링 포션의 효과로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자, 문아린은 일단 척추파쇄자를 들고 휘둘렀다.
땅에 박혔던 양손검을 때마침 빼내어 문아린의 도끼날을 막는 김형채.
챙!
도끼와 검이 부딪쳐 내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귓가를 울리자, 김형채는 갑자기 생각났다.
‘결박석. 당하기 전에 피해야 한다.’
김형채는 양손검에 몸무게를 실어 문아린과 그녀의 도끼를 뒤로 쳐냈다.
문아린이 휘청거리면서 균형을 잡으려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김형채는 등을 돌리고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균형을 회복한 문아린이 뒤따라 달렸다.
“김형채! 거기 서!”
“실수였어, 아린 씨! 제발 살려줘!”
“실수 좋아하시네.”
레벨이 둘 높아서, 그래서 민첩성이 조금 나은 김형채가 약간 더 빨리 달렸다.
전력 질주를 해도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자, 문아린은 퍼뜩 두 가지를 생각해 냈다.
이준기, 그리고 결박석.
‘결박석의 사정거리는 무려 100미터.’
달리던 것을 멈추고, 문아린은 북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는 김형채를 바라보았다.
100미터 밖으로 달아나려면 5초는 넘게 걸릴 것이다.
여유 있게 인벤토리에서 결박석을 꺼낸 문아린은 그걸 마치 리모콘처럼 앞으로 내밀면서 버튼을 눌렀다.
김형채는 달리던 자세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문아린은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김형채의 두 발이 모두 공중에 떠 있었다.
엄청난 전력질주였는 모양이다.
던전이나 이 아이템을 만든 자들의 능력도 대단하고.
과학인지 마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살려주세요, 문아린 님.”
갑자기 실소가 나오려는 걸, 문아린은 참았다.
들판 어디에 또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
“시끄러워. 누가 와서 공격하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면 큰 소리는 내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문아린 님···”
“난 갈 거야. 난 김형채 씨와는 달라서, 동료 중에 누굴 죽이고 알림 메시지에 이름 올리고 싶지는 않거든.”
“여기 이렇게 있다가는, 전 죽고 말 거예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문아린 구원자님.”
“무슨 엄살이야? 내가 아이템 링크 보내줘서 다 알고 있잖아? 이거, 한 대만 툭 치면 깨진다는 거.”
“누가, 한 방에 죽이면 어떡하라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게 가능했으면 아까 형채 씨가 날 한 방에 죽였겠지. 그 투명 망토인가 뭔가를 뒤집어썼을 때 말야.”
“자비를···”
“자비? 한 번 시험해 볼까? 한 방에 죽이는 게 가능한지, 아닌지? 내 양손 도끼, 아직 많이 써보지를 못해서 말야.”
갑자기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린아!”
“준기 오빠!”
북쪽 풀숲을 헤치고 이준기가 나타났다.
그쪽 방향으로 달리다가 얼어버린 김형채에게도 이준기가 보였다.
“이준기 씨!”
*****
처음에는 이준기를 따라갈까 생각도 했던 하민서.
하지만, 이준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 보자 정나미가 떨어졌다.
하민서는 이준기가 걸어가는 것과 정반대 방향, 즉 남쪽을 향해 걸었다.
섬 어디에서도 보이는 거대한 나무, 그걸 향해 걸으면 된다.
‘마상욱은 어떻게 됐을까?’
아이템 뽑기에서 컵라면이 나왔다는 거짓말 때문에 마상욱과 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준기도 뽑기에서 컵라면이 나왔다고 했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아차, 주석!’
나무가 꽤 크게 보이는 지점까지 다가와서, 하민서는 멈춰 섰다.
아이템 ‘게스 후’를 사용해서 살인자인 주석을 피해 가야 한다.
지금까지 살인자는 세 사람.
소현배, 주석, 그리고 이준기다.
소현배는 이준기에게 죽었다.
이준기는 같은 편이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다.
남은 것은 주석.
따라서 주석이 경계 대상 1호다.
풀숲에 몸을 가리고 하민서는 아이템을 작동시켰다.
- 추적 대상을 정해주세요.
“주석.”
지도 화면을 펼치자, 주석의 현재 위치가 표시되었다.
“어? 이게 무슨 뜻이야?”
지도를 보고 당황한 하민서가 혼잣말을 했다.
주석의 위치가 바로 거기라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
“준기 오빠, 저 사람은 놔두고 가도 상관없어요?”
“풀어주자는 얘기야? 아님, 죽이자는 얘기?”
“모르겠어요, 저도.”
“아린이의 새로운 면을 보는 것 같아서 좋네.”
그들이 멀리 떨어져서 속닥거리는 걸 보고, 김형채가 외쳤다.
“준기 씨, 저 좀 풀어줘요. 부산 던전에서 같은 공격대였잖아요. 기억 안 나요?”
이준기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쉿! 형채 씨 그렇게 소리 지르는 게 과연 좋은 생각일까요?”
“그러니까 나 좀 살려 달라고요!”
김형채가 크기를 낮춘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준기는 무시하고 다시 문아린을 돌아보았다.
“아린아.”
“네.”
“미션이 두 개잖아. 우리는 그중에서 두 번째 미션, 즉 내가 선택한 ‘고공 침투’를 하러 간다.”
“오크 사원을 붕괴시키는 거죠?”
“그래. 왜 제목이 저런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끼리 할 수 있어요?”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다만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 우선 할 일은.”
“네.”
“섬 가운데 있는 나무에 가서 오크 사원으로 올라가는 거야. 일단 거기로 가자.”
“저 사람은요?”
“복수를 하고 싶다든가, 그런 건 아니지?”
“아녜요. 제 목, 잘 붙어 있잖아요. 안 죽었음 됐죠.”
“그럼,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운명에 맡기자.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우리 미션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네?”
“나도 살인자야. 너도 이제 알잖아. 현배 씨, 내가 죽였어.”
문아린이 이준기를 바라보았다.
“그건 나중에 얘기해요.”
*****
“주, 주석···!”
눈앞에 나타난 주석을 보고 하민서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 뭐 제가 귀신도 아니고, 뭘 그렇게 놀라요? 하 선배님.”
“가, 가까이 오지 마.”
하민서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하아. 이것 참. 하 선배도 다마스커스예요? 그거 어디 공장에서 찍어내나? 겨우 그런 게 전리품이라고 생각하니까 하 선배 죽일 동기가 안 생기잖아요.”
“무, 무슨 소리야! 덤빌 거면 빨리 덤벼!”
“뭐 다른 건 없어요? 뽑기 아이템은 뭐 나왔어요?”
“살인자!”
“어디 보자. 저는 뽑기 아이템이 둘 다 추적 장치가 나와서요. ‘게스 후’라고 아실는지 모르겠네요. 사람 추적하는 건데. 좋기는 해도 이게 뭐 두 개씩이나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나무 밑에서 기다리니까 알아서들 오시네요. 여기가 뭐 만남의 광장이라도 되나?”
“여, 여기서 기다렸다고?”
“오크 사원이 저 나무 위에 있는 저거 아님 뭐겠어요? 그러니까 다들 여기로 오시겠지. 저도 미션은 해야 돼서요. 남은 인원 중에 절반을 죽여야 하니. 다섯 명 중에 절반이면, 2.5명이네요, 글쵸?”
“주, 준기 씨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그렇게 되면 2대1이야.”
“에? 이 선배도 이쪽으로 온다고요? 좋은 정보네요. 하하. 고마워요 하 선배님.”
“그, 그리고 아마 문아린도.”
“그럼 세 명이네요? 딱 좋네요. 두 명 죽여드리고, 한 분은 반으로 갈라드릴게요. 그러면 2.5명이네.”
“너··· 너 혼자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하민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살인자의 ‘기’ 같은 것이 주석에게서 새어 나와 하민서를 춥게 만드는 것 같았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주석이 사뿐하게 지면으로 내려왔다.
“풋.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하 선배님.”
“안 덤비면, 내가 간다!”
“그러시든가요. 누가 말렸나. 아, 그리고 한 가지. 저 이제 26레벨이에요. 두 번째 미션 깨고 렙업했거든요.”
“그래? 좋겠군.”
“그래서 제가 말이죠. 하 선배나, 이 선배나, 문 선배, 그 누구보다도 레벨이 높다고요.”
“서론이 길군, 주석. 뺀질거리는 얼굴, 역겹다.”
“나 참, 하 선배님 변덕이 너무 심하신 거 아녜요? 아까 저 처음 보시고, 원빈이라고 하신 거, 하 선배잖아요?”
“사, 살인자!”
하민서가 위협하듯이 다마스커스를 휘둘렀다.
주석은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좀 늦긴 했는데, 이제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할게요, 선배님.”
“무슨 개소리야?”
“그만 좀 우세요. 눈물로 세수하시겠네.”
“누가 울었다고 그래!”
“뭐, 하 선배는 아주 빠르게 저승으로 보내드릴게요. 안 아프게. 고맙죠?”
“내가 네놈에게 죽을 것 같아?”
“뭐, 알겠습니다. 하 선배님, 제 이름은 주석입니다.”
“시, 시끄러워.”
“길드는 브릴리언트. 길드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가입했고요.”
“더, 덤벼!”
“특기는 이겁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 하민서는 눈을 깜빡했다.
눈에 눈물이 너무 많이 고여서.
주석이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