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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2: 성흔 (2)
Episode 12: 성흔 (2)
이준기는 휴대폰으로 검색한 이탈리아 식당을 가려고 했는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자기가 아주 잘 아는 맛집이 있다면서, 윤동직이 이준기를 끌고 갔다.
윤동직의 포르쉐를 타고 광평교를 건넜다.
아직 통행 금지가 풀리지 않아 텅 빈 광평교.
신나게 가속페달을 밟으며 질주하던 윤동직이 말했다.
“어? 생각해 보니까, 여기 차원문 있던 데 아닌가? 군인들만 잔뜩 있고 차원문이 안 보이네?”
이준기는 잠자코 있었다.
가락시장 한 귀퉁에 차를 세운 윤동직은 이준기를 데리고 시장 안을 활보했다.
이 시장 지리를 대단히 잘 아는 사람의 걸음걸이.
그리고 목적지인 연탄 갈빗집에 도착했다.
윤동직은 갈빗집 사장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사장님, 여기 두 명 자리 있어요?”
“아, 윤 사장. 오랜만이네. 요즘은 왜 이렇게 뜸했어?”
“이사를 하고 나니까, 여기 오기가 쉽지 않네요.”
“암튼 윤 사장이 잘 돼서 참 다행이야.”
“에이, 그런 말씀 마세요.”
겨우 두세 명이 앉을 자리가 여섯 개 남짓 있는 작은 식당.
한쪽 벽에는 어울리지 않는 최신식 벽걸이 TV가 걸려 있다.
사장이 이것저것 음식을 한 쟁반 가지고 나타났다.
“자, 여기 돼지껍질은 서비스야. 윤 사장이 TV를 선물해 줘서, 가게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어.”
사장이 테이블을 떠나자, 이준기가 물었다.
“사장님과 잘 아시나 봐요?”
“응. 예전에 이 근처에서 일을 했거든.”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라, 이준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고깃집이라서 그런지, 윤동직은 소주를 곁들였다.
고기 불판을 치우고 사장이 된장찌개를 연탄불 위에 올리는데, 텔레비전에서 8시 저녁 뉴스가 시작되었다.
“오늘 첫 뉴스입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열려 있던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소재 차원문, 속칭 ‘세종고’가 오늘 저녁 여섯 시경 소멸했습니다. 현장 연결하겠습니다. 김대기 기자, 나와주세요.”
“네, 김대깁니다.”
“오늘 소멸된 차원문, 그동안 많은 사상자를 낸 던전 아니었나요?”
“네. 말씀하신 대로, 수서동 광평교 남단에서 지난 두 달 동안 지속되던 차원문, 속칭 ‘세종고’는 그간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두 달 동안 무려 스무 명의 구원자가 희생되었는데요, 단 한 명도 탈출하지 못하고 전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오늘 차원문을 정리하신 분이, 한 사람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거, 정말인가요?”
“네. 정일구 앵커님 말씀대로입니다. 오늘 차원문을 닫고 나온 구원자는···”
윤동직이 텔레비전 화면과 이준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반대하시는 분, 없죠? 당연히 없겠지만.”
자리에서 일어선 이도협 회장 대행이, 회의 탁자 주위에 둘러앉은 길드 회원들에게 물었다.
9월 20일 월요일 아침 10시, 특별 회의.
종로 타워 23층 대회의실에 충무공 길드 소속 구원자 26명이 전부 모였다.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으로 이도협을 쳐다보았다.
- 27레벨.
- 전문화: 불 10, 바람 11, 마나 6.
- 힘 40. 민첩 45. 체력 45. 정신력 20. 물리 저항 20. (+5) 마력 저항 20.
- 성흔: 없음.
- 획득 스킬: 텔레키네시스, 블러, 도깨비불.
- 인벤토리: 흑요석 칼날, 크레센트, 살인 예술가의 장갑, 어둠 사냥꾼의 흉갑, 토끼 발 장화, 중급 힐링 포션 10개, 고급 식량 팩 8개.
아이템도 상당히 훌륭하고, 희귀 스킬도 세 개나 습득했다.
이 정도면 전국 랭킹 6위에 부끄럽지 않은 세팅이다.
예상대로 성흔은 없다.
‘성흔이 있었다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인물이지.’
이도협 대신 권영호가 죽었으니 길드협회 내분은 원래 양상과는 다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이야.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이도협으로부터 멀리 반대편에 앉아 있던, 흰 도포를 입은 할아버지가 헛기침에 이어 입을 뗐다.
“어, 그러니까, 오늘 의제가 두 개잖아, 그렇지?”
“네, 네. 강찬성 어르신. 그렇지만 거의 하나라고 봐도 되지 않나요?”
“아니, 아니지. 두 개 맞잖아. 하나씩 처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네, 나는 말이지.”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그 말이 맞다는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빨간색 글씨로 ‘주목’이라고 쓰인 야구공이 어디에선가 나타나, 테이블 양쪽을 날아다녔다.
모두들 이도협을 쳐다보았다.
이도협이 ‘텔레키네시스’, 즉 염동력을 써서 잔재주를 부린 것이다.
“네, 네. 의제가 두 개라면 두 개고, 하나라면 하나죠. 딱 한 번만 더 말씀드릴 테니 잘 들으십쇼, 여러분.”
강찬성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말해 보게.”
“두 개라고 한다면, 우리 길드가 ‘탑픽’ 길드와 합치는 것이 하나, 그리고 우리 길드가 이상덕 협회장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는 게 하납니다. 그런데 그게 두 개가 아니고, 하나예요!”
“그게 왜 그런지 설명을 해야지?”
“탑픽 길드와 합치면 우리 길드는 전국 최대의 길드가 됩니다. 그런 돈이 어디서 나올 것 같아요? 이상덕 협회장이 그걸 지원해 주겠다는 거 아닙니까.”
“아, 그래?”
“그러니까 우리 길드 세를 불리는 데 협회를 이용하자는 거예요. 협회장 지지 선언이 대숩니까. 실리를 챙겨야죠. 언더스탠?”
누군가가 물었다.
“탑픽은요? 거긴 이상덕 협회장 지지 선언, 괜찮대요?”
다른 사람이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거긴 뭐, 원래 협회장 파벌이잖아.”
“자자, 여러분! 파벌이 뭐 중요합니까. 실리가 중요하잖아요! 지금 당장 탑픽이랑 합치면, 이상덕 협회장이 100억 지원해 준답니다. 당장 다음 주부터 24층 스카이라운지, 여러분들 구내식당으로 만들어드립니다!”
“오오!”
갑자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길드가 100억 원을 받든 말든, 나눠 먹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길드 회원들은 별 관심이 가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24층 스카이라운지를 당장 사들여 구내식당을 만든다면, 얘기가 다르다.
“좋습니다!”
“좋아요! 그거, 약속하시는 거죠?”
“이상덕 협회장 만세!”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이도협은 잠시 기다렸다.
조용해진 다음에야 그는 말을 이었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투표할 필요 없는 거죠? 다들 찬성하신 겁니다.”
“끄응.”
강찬성 할아버지가 탐탁지 않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굳이 혼자서 반대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준기로서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이상덕이 나쁜 놈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놈의 정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놈의 눈 밖에 나서 요주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그냥 조용히 있는 편이 놈을 감시하기에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울연합’과 같은 대형 길드가 탄생한다면 관할 차원문 수가 많아진다.
레벨업에 더 좋은 환경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준기는 손을 들었다.
“우리 길드와 탑픽, 이렇게 둘만 합치는 겁니까?”
“아, 좋은 질문이네요. 일단 우리 둘이 합치지만, 코리아 길드도 현재 내부 협의 중이에요.”
“코리아 길드요?”
“일단 탑픽 길드와 합친 다음, 코리아 길드를 흡수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전국 단일 최대 길드가 됩니다.”
이준기는 시계를 보았다.
스위스 어디에서 주워왔다는 낡아빠진 고물 뻐꾸기시계가 회의장 한쪽 벽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골동품점에 무려 5천만 원을 주고 저 고물을 가져왔다고 한다.
10시 반.
시간이 되었다.
길 건너편이 보이는 창문을 마주하고 앉은 회원 몇 명이 일어섰다.
그리고 창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저거!”
모두들 그쪽을 쳐다보았다.
길 건너편, 종각역 4번 출구, 그러니까 보신각 바로 앞에 희푸른 소용돌이가 나타나서 크기를 불려가고 있었다.
*****
“이거, 레알 실화냐?”
“뭐라고! 랭크 B?”
바로 길 건너편이라, 구원자들은 종로타워 23층 회의장에 앉아서도 상태창을 띄워 차원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차원문 고유번호 10394. 랭크 B. ‘FFA’.
- 차원문 소멸 조건: 오크 사원의 붕괴.
- 차원문 입장 조건: 최소 입장 인원 8명.
- 차원문 소멸 보상: 에픽 아이템 1개 이상.
- 퇴각 페널티: 1레벨 강등.
“무시무시한 페널티군.”
“최소 입장 인원은 또 뭐야? 최대가 아니고?”
“오크 사원의 붕괴가 소멸 조건인데, 이름이 FFA?”
왁자지껄 돛대기 시장이 된 회의실.
한 사람의 예리한 코멘트가 모든 사람들을 갑자기 침묵시켰다.
“FFA, 이거 프리포올(free for all) 아닌가요? 그러니까, 모두가 서로 적이 되는.”
바로 그거다.
이준기는 알고 있다.
입장 후 서로가 적이 되는 던전 포맷, FFA.
전 세계에서 한국, 그것도 서울 종각에 처음 등장한 포맷.
아직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르는 새로운 유형.
사람들은 인터넷을 뒤져가며 FFA 가 뭘 뜻하는지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FFA. First Free Ascent. 프리 클라이밍, 즉 자력 등반 방식으로 처음 등반에 성공하는 걸 FFA라고 하네요. 이거 아닐까요? 그러니까 오크 사원이 산 위에 있는 거죠.”
“Free Fatty Acid. 자유 지방산. 이거 아녜요?”
“그게 말이 되냐?”
“Free Fire Area. 자유롭게 아무 화기나 사용이 허가되는 공간. 헉!”
“그건 Free For All이나 비슷하잖아. 무섭다고!”
“Field Force Automation. 이건 어때요? 그러니까, 판매를 자동으로 기록하는··· 쩝. 말도 안 되는구나.”
“프랑스 풋볼 연맹이네. 에라.”
길을 지나가다 차원문 등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종로경찰서 소속 전경 부대들이 빠르게 움직여 종각역을 에워쌌다.
종각역 사거리가 완전히 통제되고, 종각 뒤편 피맛골에 광범위하게 소개령이 내려졌다.
포위 범위가 넓고 복잡해서 결국 삼청동을 지키던 전경 부대 일부까지 합세했다.
종로타워에도 곧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비 직원과 함께 23층으로 올라온 경찰 경위가 차려자세로 경례를 하며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구원자님들! 침착하게 소개령에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도협이 코웃음을 쳤다.
“침착? 소개? 경위님, 우리가 뭔지는 알고 오신 것 같은데, 우리가 왜 소개를 합니까? 뭐, 설마, 인트로덕션, 그거 하라는 건 아니죠? 음핫핫.”
“아, 네. 구원자님들이시긴 하지만···”
“어디에서 오신 거예요? 종로경찰서? 김학래 총경이 보낸 거요?”
“네! 김학래 서장님이 보내셨습니다.”
“하! 어이가 없네. 잠깐 기다려 봐요. 전화할 테니.”
이도협은 곧바로 전화를 들었다.
“이런, 미친. 전화통에 불났나 보구만. 휴대폰을 안 받네.”
이도협은 다른 번호를 눌렀다.
“아, 한 과장? 하하하! 지금 우리 건물 바로 앞에 차원문이 생겨서 서장님 전화에 불 난 거 같네요. 지금 여기, 경위님이 우리 건물에 들어와서 우리들보고 나가라고 하시는데. 하하하, 그러게 말예요. 이게 무슨 개소립니까. 서장한테 빨리 전해요, 나한테 전화하라고.”
인상을 쓰며 전화를 끊은 이도협은, 경위의 명찰을 보며 대단히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
“이봐요, 이천학 경위? 서장이 곧 전화할 테니, 잘 들어요. 알았죠?”
이천학 경위가 차려자세로 얼어붙은 채 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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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준기 씨. 준기 씨 잘난 건 알겠는데, 지난 주말에 뉴스 나오고 뭘 또 하겠다는 거야? 욕심이 끝이 없네. FFA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
“최초 자유등반 아닐까요? 오크 사원 붕괴가 산 위에 있나 보죠.”
물론 거짓말이다.
FFA는 프리포올이고, 두말할 것도 없이 데스매치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나머지 동료를 싹 다 죽여야 하는 배틀로얄은 아니다.
원래 역사에서 벌어졌던 전멸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준기가 들어가야 한다.
최소 입장 인원 8명. 그 조건만 아니라면 혼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인 던전.
그러나 최소 입장 인원 조건이 걸린 만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8명이 전원 클릭을 하지 않으면 입장이 되지 않는다.
“준기 씨도 유머 감각이 있네. 뭐, 일단, 알았어. 이제 중견 랭커인 20레벨 준기 씨가 줄을 서 준다면, 뭐 나로서도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