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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33화 (3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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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2: 성흔 (1)

Episode 12: 성흔 (1)

끔찍한 이야기를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임프의 얼굴을 보니 조슈아 테일러가 생각난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완전히 프리스타일로 하실 수도 있고,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고요.”

프리스타일로 하면 뭔가 더 좋은 보상이 나올 것 같이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저 임프의 말장난일 뿐.

‘제물의 방’에는 저마다 다른, 사전에 세팅된 ‘해답’이 있다.

그걸 맞추지 못하면 그저 손해를 보는 교환에 그칠 수도 있지만,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더 끔찍한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

프리스타일로 하라는 얘기는 마치 스무고개를 답부터 맞추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도와주세요.”

“아, 그렇군요. 뭘 도와 드려야 하죠?”

이런 괘씸한.

이준기는 첫 번째 질문을 했다.

“원하시는 게, 누군가의 고통을 수반하나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제물이라는 게 원래 고통을 수반하는 거잖아요. 영어로 새크리파이스. 모르는 척하긴.”

“누구의 고통을 수반하죠?”

“하핫. 그건 간단히 대답해 드릴 수 있어요. 바로 당신.”

그렇게 말하면서 임프는 상쾌하게 웃으며 이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고통은 회복 가능한 겁니까?”

“그건 굉장히 회색지대가 많은 질문이네요. 돈 한두 푼 잃는 걸 평생 후회하며 원통해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회복 가능한지는 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거죠. 다 아시잖아요?”

“지금 제 고통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잖아요. 제 질문은 이겁니다. 제가, 그 고통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임프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이준기는 속으로 싱긋 웃었다.

스윗 스팟, 절묘한 지점을 정확히 타격한 질문이다.

잠시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임프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은, 그 어떤 고통에서도 회복하지 않느냐. 나는, 네놈이 회복하지 못할 단 하나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을 뿐이다.”

“조슈아 테일러.”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이준기가 답을 말하자, 임프가 책상을 발로 걷어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나를 구속하는 규칙 따위, 다 끊어버리겠다!”

임프는 마치 램프에서 튀어나온 지니처럼, 풍선에 공기가 차오르는 것처럼 크기가 커졌다.

크기가 커지는 동시에 임프는 양손을 모아 그 안에서 전기 구체를 만들었다.

그걸 던지려고 하는 찰나, 이준기가 인벤토리에서 패시파이어를 꺼내쥐고 탁자 아래에서부터 임프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끄아아악!”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임프의 크기가 다시 줄어들었다.

결국,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임프가 천막 바닥에 쓰러져서 불타올랐다.

“네놈을 저주하리라!”

“맘대로 해라. 나를 저주하는 존재는 차고 넘치니까.”

상태창이 떠오르면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1시간 내에 차원문이 소멸합니다.

-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보물 상자는 천막 입구 쪽에 생성되었다.

그걸 향해 걷다가, 이준기는 고개를 돌려 불타서 소멸하는 중인 임프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스스로 규칙을 깰 정도로 내가 싫었냐?”

“장기 말 따위로 살기 싫었을 뿐이다!”

*****

던전 ‘세종고’에 입장할 당시 이준기의 레벨은 17.

사육제 과제를 해결하고 18, 19레벨을 차례로 달성한 이준기는 던전 클리어 보너스로 20레벨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에픽 아이템을 쓸어 담았다.

- 카데쉬

- 단검. 에픽 등급.

- 5~7 대미지. 공격속도 1.25초.

- 발동 효과: 유효 타격 시 일정 확률로 적의 스킬 시전을 끊습니다.

아직도 제대로 된 템을 구비하지 못한 장갑, 바지 같은 부위가 나오지 않은 것이 아쉽다···라고 말하면 몰매 맞을 수준으로 제대로 된 템이 나왔다.

장혁수에게서 ‘오캄’을 빼앗기는 했지만, 함께 사용할 왼손 무기가 없어서 여전히 패시파이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딱 맞는 왼손 무기를 얻게 된 것이다.

발동 효과도 어이없는 수준이다.

‘단지, 이 무기는 과거에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발동 효과가 얼마나 터져줄지, 그걸 잘 모르겠다.’

이제 양손검 패시파이어 또는 오캄-카데쉬의 2도류 중 상황에 맞는 무기를 사용하면 된다.

둔화나 버프 해제가 중요한 경우에는 패시파이어, 스킬 시전이 요란한 적을 상대할 때는 2도류를 쓰면 된다.

오캄은 일부 스킬을 완전히 무효화하고, 카데쉬는 일정 확률로 적의 스킬 시전을 차단한다.

무기를 두 세트나 가지고 다니려면 인벤토리가 압박을 받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지만, 그저 행복한 고민일 뿐이다.

20레벨이 되어 더 중요한 변화도 찾아왔다.

빨리 20레벨이 되어야 했던 이유.

성흔이 개방되었다.

성흔. 구원자들 중 극히 일부만이 부여받는 고유한 특질.

믿을 만한 통계에 따르면, 구원자 전체의 2%만이 성흔을 가지고 있다.

최초의 구원자 헬렌 카자크는 물론, 천재성과 잠재력의 화신 조슈아 테일러, 그리고 그에게 끝까지 대항했던 이준기, 모두 성흔 보유자들이다.

조슈아 테일러처럼 1레벨부터 성흔을 가지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고, 40레벨이나 60레벨에 도달하여 성흔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20레벨 시점에서 결정된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준기는 20레벨이 되자 성흔이 개방되었다.

상태창에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성흔이 개방되었습니다.

- 성흔을 선택해 주십시오.

- 느뤼엘의 흡수.

- 운명의 사다리.

- 이르헬의 눈.

이준기에게 세 개의 선택지가 나타났다.

지난번과 마찬가지.

지난번에는 ‘운명의 사다리’를 선택했으나, 이번에는 아니다.

느뤼엘의 흡수. 상태창 정보에 따르면, 아이템에서 마력을 흡수한다는 단순한 설명이다.

설명이 부실하기 그지없는데, 아이템에 깃든 마력을 흡수하여 특정 스킬이나 스탯을 얻게 된다.

스킬을 얻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스탯 포인트 몇 점을 얻게 된다.

마력이 흡수된 아이템은 물론 파괴된다.

흔한 성흔 중 하나이며, 성능은 좋지 않다고 평가된다.

아이템 희생에 따른 보상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성흔이 있는 구원자는 아이템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므로, 다른 구원자들과 마찰이 잦게 된다.

지난번에 이 성흔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아이템 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15레벨에 레어템을 처음 얻었을 정도이니,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운명의 사다리. 상태창 설명은 이렇다.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감소합니다.’

얼마나 감소하느냐가 문제인데, 이준기의 경험으로는 20%다.

상당히 좋은 성흔이며, 극소수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번에 이준기가 선택했던 특성이다.

이르헬의 눈. 상태창 설명에 따르면, 상대방의 현재 상태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확실히 좋아 보이는 능력이지만, 레벨업을 우선시하여 지난번에는 배제했다.

어느 정도까지 상대방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문제는 80레벨까지 이르렀던 이준기도 이 성흔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

이준기가 아는 한, 이 성흔을 가진 사람은 없다.

80레벨이 올라가도록 한 번도 이 성흔을 가진 동료를 만나지 못했다.

희귀한 성흔이라고 해서 무조건 더 좋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느뤼엘의 흡수’는 다른 구원자들과 갈등을 유발하기에 딱 좋은 능력이고, ‘운명의 사다리’는 더 많은 던전을 거침으로써 대체가 가능하다.

그래서 이르헬의 눈을 선택할 생각이다.

‘몬스터’라는 표현 대신 ‘상대방’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상태창 설명에서 ‘상대방’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을 때 사용하는 단어다.

따라서 구원자의 정보를 볼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만약 그렇다면, 조슈아 테일러와 그의 군단을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선택.

이준기는 경건한 마음으로 ‘이르헬의 눈’을 선택했다.

- 성흔을 개방하였습니다.

- 이르헬의 눈.

- 상대방의 상태창을 볼 수 있습니다.

- 사정거리 5미터.

상태창을 볼 수 있다니,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구원자를 상대로 발동되는지, 던전 바깥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육제’가 끝난 던전은 천막들도 사라지고 황폐한 공간만이 남았다.

이준기는 일단 던전 밖으로 나왔다.

*****

던전을 나오고 보니 오후 6시였다.

굉장히 빨리 돌았다고 생각했지만, 열두 시간이 넘게 걸린 것이다.

‘내가 길게 굶는 스타일이라서 다행이다.’

어제저녁을 먹은 이후로 지금까지 뭘 먹지 않았다.

하지만 굶은 시간으로 따지면 24시간도 되지 않는다.

‘이 정도쯤이야 뭐 일도 아니지. 공시족 생활할 때는 24시간 정도 굶을 때도 많았으니.’

차원문을 닫고 나오자, 차원문 담당 중령이 어슬렁대고 있었다.

옆에는 이준기의 던전 입장을 어쩌다 보니 방임하게 된 최상혁 대위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준기가 차원문 앞에 스르르 나타나고, 곧이어 차원문의 크기가 눈에 띄는 속도로 줄어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최상혁 대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이준기 구원자님! 이게, 설마··· 던전을 클리어하신 거예요?”

“네, 대위님 덕분입니다.”

“그, 그동안, 다섯 명 구원자 파티 네 팀이 들어가서 전부 전멸한 곳인데··· 어떻게···”

멀뚱히 보고 있던 중령도 달려들었다.

“구, 구원자님! 이걸 혼자 닫으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최상혁 대위님이 도와주셔서.”

“하, 하루도 안 지나서 차원문을 닫고 나오시다니···”

“성함이··· 고영성 중령님이시군요. 최상혁 대위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위님 아니었으면 성공 못 했을 거예요.”

“아··· 네!”

구원자들이 차원문에 들어가서 나오지 못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세종고’ 던전처럼 스무 명씩이나 들어가서 한 명도 나오지 못하는 던전은 많지 않다.

이 던전에 풀 파티 공격대가 진입했다면, 이 근처는 며칠 동안 기자들의 난민촌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취재 경쟁이 그만큼 달아올랐을 테니.

그러나 단 한 명이 들어간 상황.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나온다 하더라도 오늘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밖에 대기 중인 기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김대기 기자라고 합니다. 성함이 이준기 구원자님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으십니까?”

“네.”

“지금까지 스무 명이 들어가서 아무도 나오지 못한 던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차원문이 소멸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것 맞습니까? 정말 혼자서 던전을 정리하고 나오신 겁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운이 좋았죠.”

이준기의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김대기 기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

이준기는 윤동직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저녁 안 드셨으면 제가 모시고 싶은데 괜찮으세요?”

“어, 준기야. 나는 좋지.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 준기는 차가 없잖아.”

“지금 강남구 수서동인데요, 어차피 숙소로 돌아가야 하니 제가 형님 집 근처로 갈게요.”

“숙소면, 광화문이던가?”

“네. 그러니까 여기 수서역에서 3호선 타고 그냥 죽 올라가면 되거든요, 중간에 옥수역에서 내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지도 보니까 그 근처인 것 같은데.”

“그래, 뭐 옥수역이 가깝긴 할 거야. 그런데 지하철 안 탄 지 좀 돼서 잘 모르겠다. 그런데 3호선을 타고 거기에서부터 오겠다고? 그냥 내가 데리러 갈게. 수서동 어디야?”

윤동직이 차로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이준기는 기다렸다.

20분쯤 지나가 윤동직이 포르쉐를 몰고 나타났다.

옥수역까지 지하철을 탔으면 한 시간 가까이 걸렸을 것이다.

차에서 내리는 윤동직에게 다가가서, 이준기는 ‘이르헬의 눈’을 활성화했다.

마치 자신의 것을 보는 것처럼, 윤동직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구원자를 상대로, 던전 밖에서도, 발동된다.

- 20레벨.

- 전문화: 빛 12, 흙 8.

- 힘 30. 민첩 30. 체력 45. 정신력 10. 물리 저항 20. 마력 저항 0.

- 성흔: 없음.

- 획득 스킬: 저지.

- 인벤토리: 다마스커스, 숲 지기의 장갑, 티타늄 방패, 오크 분쇄자의 검, 하급 힐링 포션 2개, 중급 힐링 포션 8개, 기본 식량 팩 4개.

생각대로다.

스탯은 상당히 표준적으로 분배했고, 획득 스킬은 하나, 성흔은 없다.

이준기가 보는 화면이라서 성흔이 없다는 설명이 나오는 것이고, 윤동직이 보는 화면에서는 성흔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일부 구원자들이 자신의 성흔을 자랑하는 바람에 성흔의 존재 자체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구원자들이, 어떤 성흔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체의 2%가 성흔 보유자라는 통계도, 한참 나중에 조슈아 테일러가 자신의 조사를 토대로 발표한 내용이다.

많은 구원자들이 자신의 성흔을 숨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남에게 떳떳하게 드러내기 어려운 성흔들이 존재한다.

아이템을 파괴하고 마력을 흡수하는 ‘느뤼엘의 흡수’도 그런 종류.

하지만 조슈아 테일러의‘카인의 징표’만 하랴.

다른 구원자에 대해서 공격력이 증가하며, 구원자를 죽이면 스탯이나 스킬을 획득하는 성흔이다.

세상의 모든 축복을 가지고 구원자로 각성했다는 조슈아 테일러에게 성흔의 선택지가 단 하나뿐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즉, 그는 처음부터 포식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성흔을 고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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