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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1: 사육제 (4)
Episode 11: 사육제 (4)
네 번째 천막은 ‘술고래 도전’.
천막 문을 걷고 들어가니 후덥지근한 공기에 술 냄새가 가득하다.
입구를 지키던 드워프가 자리로 안내를 한다.
“도전자시군요.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준기는 살짝 불쾌한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다.
총 여덟 종류의 천막 유형 중 세 가지가 무조건 싸움에 휘말리는 유형이다.
그중 두 가지는 혼자 들어와서 감당할 수준이 못 된다.
그래서 결국 남은 여섯 가지 유형을 전부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
순서를 고민했다.
그냥 무시하면 되는 ‘환영의 방’을 처음으로 하고, 필요한 아이템을 사가지고 온 ‘고블린 상인’을 두 번째로, 가진 골드와 힐링 포션으로 대처가 가능한 ‘가위바위보’를 세 번째로 들어갔다.
나머지 세 개는 체력, 즉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이 있는 유형들이다.
마지막에 들어가는 텐트는 반드시 마지막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섯 개를 클리어하고도 다시 한 번 그 텐트를 또 거쳐야 한다.
그 텐트에 두 번 들어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최대한 불친절하게 써 놓은 표지 팻말도 그 유형의 텐트만은 이렇게 쓰여 있다.
- 반드시 여섯 번째로 방문하시오.
물론, 다른 팻말과 마찬가지로 룬 문자로 쓰여 있다.
룬 문자를 아는 사람에게만 친절한 셈이다.
드워프 주인장이 커다란 머그에 술을 가득 채워 가지고 왔다.
겉으로 봐서는 무슨 술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모습.
‘술고래 도전’에서는 총 석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도중에 화장실에 가도 되고, 물을 마셔도 되니 신체적 한계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
문제는 술의 종류인데, 무척, 정말 무척 많은 종류의 술이 대기하고 있다.
드워프 주인장이 가져온 술을 그냥 마셔도 되고, 거절해도 되지만, 거절은 최대 세 번까지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거부권을 초반에 다 써버리면, 나중에 드워프가 한 눈에 봐도 독주가 분명한 것들을 연이어 가져와도 거절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도 다른 모든 천막과 마찬가지로 피로 해결할 수 있다.
드워프 주인장과 술집 기도들을 전부 때려잡으면 된다.
혼자서 해본 적이 딱 한 번 있기는 하지만 쉽지는 않다.
그래서 힐링 포션을 여러 개 사가지고 온 것이다.
첫 번째 술부터 독을 섞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이준기는 술잔을 들이켰다.
생맥주 통에 육상선수가 신던 양말 열다섯 켤레 정도를 넣은, 그런 맛이 났다.
“아주 잘 드시는군요. 두 번째 술, 대령합니다요.”
드워프 주인장이 웃자, 오렌지색 콧수염이 입꼬리를 따라 올라갔다.
아주 착해빠진 웃음 같아 보이지만, 이 천막에서 나오는 술의 70%가 독주다.
웃음 따위에 속으면 안 된다.
술을 마시고 시간이 좀 지났지만 몸에 이상이 오지는 않았다.
이준기는 두 번째 술도 그냥 들이켰다.
녹색 거품이 나는 이상한 맥주였지만, 단지 맛이 없을 뿐,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 세 번째 술입니다요. 우리 집 전통, 우리 집 자랑이죠.”
이건 뭐, 딱 봐도 맥주잔에 독을 스트레이트로 부은 것이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물질이었다.
붉은색 액체가 정체불명의 메커니즘으로 기포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건 패스하겠습니다. 다른 걸 주세요.”
이준기가 그렇게 말하자, 드워프 주인장의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 떠올랐다.
‘무서워서 오줌 지리겠군. 예전에도 이런 표정을 지었었지.’
그래도 명백히 독임에 분명한 액체를 들이켤 수는 없다.
드워프는 노기를 가득 띤 눈으로 이준기를 쳐다보며 바꿔온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이건 어떻습니까? 열두 가지 뱀을 섞었습죠. 하하핫.”
이준기는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오늘 준비해 온 열 개의 중급 힐링 포션이 아직 그대로 있다.
그러나 과연 이걸 견뎌낼 수 있을까?
‘술집 도전은 싸움으로 끝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사실 최대한 뒤쪽에 넣은 건데.’
이준기는 아주 조금만 맛을 보기로 했다.
다채로운 색깔로 부글거리던 그 액체가 닿자마자, 입술이 마치 데기라도 한 것처럼 쓰려왔다.
이준기는 입에 댔던 맥주잔을 곧바로 테이블 바닥에 내려놓았다.
술이 쏟아질 뻔했다. 아니, 조금 쏟아졌다.
술이 쏟아진 자리의 나무 테이블이 치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이준기는 인벤토리에서 중급 힐링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이것도 치울깝쇼?”
그렇게 말하는 드워프 주인장의 얼굴은 한층 더 노여움에 불타올랐다.
“네, 네. 부탁합니다.”
술을 바꾸러 들어간 드워프는 부엌에서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나왔다.
그사이에 힐링 포션의 효과로 입술의 화상은 아물었다.
아직도 조금 찌릿찌릿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핫핫핫. 이건 정말 단숨에 냉큼 한달음에 훌쩍 쉬지도 않고 주욱 들이키시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150 한평생을 연구해서 완성해낸 역작이죠. 이름하여, ‘그레이의 50가지 독’입니다. 제 이름이 그레이비어드라서. 카카캇.”
이준기는 드워프 주인장의 얼굴을 보았다.
네놈이 죽는 걸 내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봐 주마 하는 표정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한 그런 얼굴.
분노, 증오, 사악, 그리고 기대감이 섞인 아주 고약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술 이름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
조슈아의 세계 정복 야욕에 함께 대항하던 인도 북부 출신 구원자, 키라트 싱이 이 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함께 식당에 갔다가 남미 원주민 레시피로 만든 묘한 음료를 마시며 한 얘기였다.
“우, 이거 예전에 ‘사육제’에서 마시던 그거 같네. 무슨 배스킨 라빈스도 아니고, ‘50가지 독’인가 뭔가 하는 이름이었는데, 보기에도 고약하고 냄새도 악랄했지만, 실제로 마셔보면 아주 훌륭한 맛이었지. 바로 옆에 힐러가 있어서 마실 생각을 한 거지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난 사육제 던전 할 때마다 술집 도전은 결국 쌈박질로 끝내곤 했는데.”
“넌 언제나 풀 파티를 이끌고 가는 탱커니까 그게 가능했겠지. 나는 그런 데서도 가끔 목숨을 걸어야 했다고.”
“그래서, 그 ‘술고래 도전’에 마실 만한 술이 있다고?”
“그래. 50가지 독인가 뭔가 하는 이름이고, 술집 주인이 직접 고안한 술이라나. 자기가 150 평생을 살면서 연구한 결과라고 했던 거 같아. 내가 그 ‘술고래 도전’을 아마 열 번은 넘게 해봤을 텐데, 딱 그거 하나만 맛있는 술이었어. 나머지는 독이 없더라도 맛이 더럽게 없었는데.”
“맛도 있고 독도 있고 하는 건 아니고?”
“그렇다니까. 잘 안 믿기는 얘기이긴 하지? 그런데 정말 맛도 있고, 뒤끝도 없고, 목숨도 위험하지 않았다고.”
이준기는 잔을 들어 ‘그레이의 50가지 독’을 입에 가져갔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당장 코끼리라도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동료 키라트 싱을 믿었다.
눈을 감고, 이준기는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야말로, 주인장이 말한 대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우아, 이것 정말 맛있군요!”
“그렇죠, 손님? 음핫핫! 역시 제가 만드는 술은 우주 최고예요!”
*****
다섯 번째 천막은 피할 수 없는 단 한 번의 전투였다.
원래는 5대5의 전투다.
그러나 한꺼번에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한 명씩 나와서 승부를 벌이는 방식이다.
쓰러진 쪽은 선수를 교체하고, 이긴 쪽은 승자가 계속해서 싸우는 대전 액션 게임의 방식.
예전에도 ‘사육제’ 던전에서는 꼭 이 천막을 고르고는 했다.
선수 교체 단 한 번도 없이 5대0으로 매번 이겼다.
게다가 도전자 레벨에 맞추어 상대가 조정된다.
어떻게 보면, 회귀 이후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전투보다도 안전한 방식의 전투다.
언제나 더 높은 레벨과 싸워온 이준기였으니까.
첫 번째 상대는 코볼트였다.
엘리트 코볼트라고는 해도, 이준기는 이미 레벨 1일 때 잡았던 놈이다.
시작하자마자 거리를 좁히고 패시파이어로 단 두 번만 휘둘러 쓰러뜨렸다.
두 번째 상대는 고블린 폭파병.
이기려는 생각은 전혀 없고, 자폭 대미지를 노리는 동귀어진 몬스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패시파이어로 쉽게 잡았다.
세 번째 상대는 오크 보병.
역시 만만한 상대다.
주무기인 숏소드의 리치가 짧아, 방패로 몸을 가리면서 최대한 접근하려고 하는데, 패시파이어에 맞고 둔화에 걸리니 접근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뻗었다.
세 번째 상대까지 쓰러뜨렸지만 대미지는 조금도 입지 않았다.
네 번째 상대는 오크 경비병.
회귀 후 첫 번째 던전, ‘오크 부두 술법사의 오두막’에서 잡았던 바로 그 녀석이다.
몸집도 크고 팔도 긴 데다 양손 도끼를 사용하는 적이라서 리치가 길다.
예전에 잡았을 때처럼 활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불리한 점.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레벨이 대략 일곱 배 정도 높다.
한 대 맞을 각오로 거리를 좁혀 패시파이어로 타격한 후, 매직 미사일과 마나 폭발로 제압했다.
결국 왼쪽 어깨에 한 방 맞았다.
중급 힐링 포션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결승전에서 물약을 마시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힐링 포션을 마시고 나서, 다섯 번째 상대를 불렀다.
다섯 번째 상대는 역시나, 오크 주술사.
‘살아 있는 폭탄’으로 쓸 오크 보병이 없다고 해서 절대로 약하지 않다.
오크 주술사는 앞선 싸움에서 쓰러진 오크 보병과 오크 경비병의 시체에서 차례로 해골을 소환했다.
오크 주술사를 상대한 경험이 차고 넘치는 이준기는 침착하게 해골부터 하나씩 상대했다.
오크 주술사는 시체에서 해골을 불러일으킨 뒤 약 5초 동안 채널링을 유지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주술사와 해골, 둘을 상대해야 하지만, 처음 5초 동안은 사실상 해골만 상대하면 된다.
주술사가 해골을 일으켜 세우는 사이에, 이준기는 해골을 두들겨 팼다.
제대로 끝까지 일어서 보지도 못하고 오크 보병의 해골은 쓰러졌다.
두 번째 해골, 오크 경비병은 일어서기까지는 했다.
하지만 일어서서 겨우 한 번 칼을 휘두르고는 쓰러졌다.
두 번이나 해골을 일으키는 바람에 마나가 부족해진 주술사는 시체에서 마나를 흡수하려고 손을 뻗었다.
주술사가 가장 취약한 시점.
이준기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들어가서 패시파이어 강타에 이어 마나 폭발을 날렸다.
그리고 마나 폭발 한 번 더.
- 오크 주술사에게 ‘마나 폭발’로 40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 오크 주술사가 죽었습니다.
이준기는 보상품을 챙기고 다음 천막을 향해 나갔다.
*****
이준기는 맨 마지막 텐트 앞에 섰다.
- 제물의 방.
- 반드시 여섯 번째로 방문하시오.
“보험 약관에 보면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 있는 주의 사항이 있잖아. 읽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것과 마찬가지지. 룬 문자로 주의 사항을 써 놓고 주의 사항을 알렸다고 하는 꼴이니.”
예전에 동료들과 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맨 마지막까지도, 룬 문자를 완전히 마스터한 것은 이준기와 헬렌 카자크 둘뿐이었다.
최초의 구원자 타이틀을 달고 있던 헬렌 카자크는 그렇다고 치고, 이준기의 노력에 동료들은 혀를 내둘렀다.
미겔 산체스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도대체 준기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야? 헬렌보다 2년이나 늦게 각성해서, 룬 문자도 다 외우고, 레벨도 헬렌보다 높고.”
“2년 2개월이야, 미겔. 나보다 2년 2개월 늦게 각성했다고.”
“헬렌, 미겔.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말라고. 나는 노력해야 하는 스타일이라서 노력을 계속해야 돼. 멈추는 순간, 아마 거기서 끝일 거야.”
“나도 그런 스타일이었으면 좋겠다. 넌 그냥 천재야.”
“알았다, 알았어. 오늘 점심 내가 쏠게. 됐어?”
“음핫핫, 또 성공. 준기는 단순해서 좋아.”
경고 표지판 말고도, ‘사육제’ 주최 측이 배려한 것이 있다면 바로 문이다.
‘제물의 방’ 문은 다른 천막처럼 천으로 된 문이 아니고, 나무문이다.
천막 위에 덧대어진 나무판.
뭔가 맞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래서 의미는 더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는가.
여긴, 위험하다는 그런 의미가.
나무판을 치우고, 다시 천막 입구의 드레이프를 치우고 이준기는 안으로 들어갔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임프가 허름한 낡은 탁자 위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이준기를 향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세요!”
이준기는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딱 맞춰서 오시는 거 보면, 룬 문자는 읽으시나 봐요? 신기하네.”
“그렇게 됐습니다.”
“아직까지 룬 문자를 해독하는 인간은 못 봤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시작할까요?”
“네.”
“여기는 제물의 방이랍니다. 제물을 바치고, 대가를 얻는 그런 곳입니다. 뭐든지 제물로 바칠 수 있어요. 황금이나 아이템은 물론이고, 동료나 신체의 일부분도 제물로 바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