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29화 (2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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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1: 사육제 (1)

Episode 11: 사육제 (1)

“이 새끼가!”

장혁수가 다리에 맞은 화살을 뽑으며 힐링 포션을 들이켰다.

예상대로, 타이트한 레이드 와중에도 이기적으로 힐링 포션을 아낀 모양이다.

장혁수가 달리기 시작했다.

매직 미사일을 먹이기 딱 좋은 거리.

그러나 오크 족장을 상대하느라 이준기에게 남은 스킬 책은 없다.

이준기는 강화 국궁에 침착하게 다음 화살을 메겼다.

휘유우!

퍽!

화살을 다리에 맞은 장혁수가 달리던 방향으로 굴렀다.

곧바로 종아리에서 화살을 뽑아내고 다시 일어서 달리는 장혁수.

힐링 포션의 치유 효과가 아직 남아 있는지, 두 번째 화살 상처도 아물고 있다.

‘화살 한 발을 더 쏘려 하다간, 내가 위험해진다.’

이준기는 뒤로 물러서며 강화 국궁 대신 패시파이어를 꺼내 들었다.

장혁수가 왼손에 있던 오캄을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크게 휘두르기라도 할 듯, 이준기는 양손으로 잡은 패시파이어를 오른쪽으로 들고 마치 야구 선수처럼 섰다.

헛스윙 이후에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장혁수는 자기 키보다도 높이 점프를 했다.

파팟.

장혁수의 몸이 공중으로 뜨는 동시에,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땅에 찍었다.

땅에 내리찍은 검을 중심으로 반시계방향으로 90도 도는 이준기.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내려오는, 그러나 아직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장혁수에게,

이준기의 패시파이어가 찌르는 공격을 해왔다.

- 패시파이어로 11의 대미지를 입혔습니다.

- 상대방이 ‘둔화’에 걸렸습니다.

“크아아아!”

패시파이어에 맞고 쓰러졌던 장혁수가 일어났다.

그리고 ‘화염 보호막’을 시전했다.

- 화염 보호막. 불의 책 3권 소요. 피해를 흡수하고, 흡수된 피해의 50%를 상대에게 튕겨냅니다. 총 30의 피해를 흡수할 때까지 지속됩니다.

‘헬렌 카자크의 화염 보호막을 지겹도록 보아온 나다.’

이준기는 장혁수가 화염 보호막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마자 그에게서 달아났다.

패시파이어의 ‘둔화’ 효과로 주문을 외는 속도도 느려진 장혁수.

장혁수와의 거리를 확보하고, 이준기는 강화 국궁을 꺼냈다.

팡!

화염 보호막이 장혁수의 몸 전체를 붉은색으로 감쌌다.

장혁수는 오캄을 든 오른손을 치켜세우고 이준기에게 돌진했다.

아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장혁수는 몸을 가볍게 띄워 앞으로 점프를 했다.

이준기는 침착하게 활시위를 놓았다.

퍼퍽!

“으으··· 이건?”

장혁수의 몸을 붉게 감싸고 있던 화염 보호막이 얼어붙으면서 얼음 조각처럼 깨져 내렸다.

“얼음 화살이다. 네놈을 위해 한 개를 남겨놨지.”

장혁수는 짜증이 가득 섞인 포효를 내뱉으며 이준기를 향해 오캄을 휘둘렀다.

옆으로 구르면서 오캄의 칼날을 피하는 이준기.

국궁을 내던져 버리고,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다시 손에 쥐었다.

장혁수가 이준기를 향해 다시 오캄을 든 오른손을 내리찍었지만,

이준기는 패시파이어의 검날을 들어 그걸 막았다.

“탱커로 80레벨까지 올라갔던 나다. 방패를 안 들어도 네놈의 공격 따위야.”

패시파이어의 검날에 막힌 오캄을 밀어붙이는 장혁수.

이준기는 땅에 허리를 기댄 채로 장혁수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장혁수가 복부에 발차기를 맞고 뒤로 날아갔다.

이준기는 일어서지도 않은 채 상체를 앞으로 굽히며 패시파이어를 장혁수에게 날렸다.

“꾸웨엑.”

장혁수가 마치 오크가 낼 것 같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양쪽이 모두 바닥에서 일어섰다.

마치 광란에 빠진 오크와도 같이 장혁수는 오캄을 휘두르며 이준기에게 달려들었다.

무거운 물건에 손을 부딪치기라도 한 것처럼, 장혁수는 손이 저렸다.

둔화에 걸린 장혁수의 움직임.

이준기에게는 느린 재생 화면과도 같다.

다른 구원자들과 비교해도 동체 시력이 뛰어난 이준기.

탱커 역할에 큰 도움이 되었던 동체 시력은, 딜러로 전향한 지금도 큰 도움이 된다.

20%나 움직임이 둔해진 장혁수가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오캄에 맞을 이준기가 아니다.

“장혁수!”

“이 새꺄!”

“탱커 성나린에 대한 과실치사.”

“씨팔, 뭐라고?”

“혐의가 입증되지 않은 남궁훤에 대한 살인.”

“이 새끼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그리고 앞으로 네놈이 벌일 수많은 연쇄 살인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뭐라고, 씨발!”

“사형에 처한다.”

몸 여러 군데에서 피를 흘리며 닥치는 대로 팔을 휘두르는 장혁수.

패시파이어가 달려드는 그의 몸통을 꿰뚫었다.

“이준기, 네놈 따위에게 내가···”

이준기가 장혁수의 몸에서 패시파이어를 거둬들이자, 장혁수의 몸이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씨발··· 백제그룹 후계자인 내가··· 너 따위 양민 새끼한테···”

사방이 조용해졌다.

오후 햇살이 스며드는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

장혁수를 찾아 헤매던 윤동직과 소현배는 입구 오두막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피를 뒤집어쓴 채 바로 옆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이준기도.

“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저를 쫓아왔습니다.”

“장혁수가? 이 새끼,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정말로 널 쫓아왔군.”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에 대한 벌은 감수하겠습니다.”

구원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라면, 정부는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협회에 백지위임을 한 상황.

구원자에 대해 공권력 집행이라도 하려다가는, 경찰 여러 명이 다칠 거라는 사실,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런 사건이 표면으로 떠오른 것은 처음이지만, 세계적으로는 이미 여러 차례 일어난 일.

무리하게 공권력을 집행하려다가 수많은 경찰, 공무원이 다치고 죽었다.

구원자끼리의 살인이라면, 굳이 정부에서 나서서 정의를 구현하려고 할 이유가 없다.

일반인이 다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구원자들끼리의 문제는 구원자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

협회 차원에서 사건을 정리하기 위한 재판, 아니 회의가 열렸다.

윤동직은 물론 소현배도 이준기의 행동이 정당방위였다는 걸 증언해 주었다.

이상덕 협회장도 사건을 확대시킬 이유가 없었다.

협회장 파벌에서 한 명, 남궁훤이 죽었지만, 반협회장 파벌에서는 장혁수, 권영호 등 두 명이 죽었다.

특히 랭킹 2위의 실력자인 권영호가 죽어서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인 이상덕.

문제를 크게 키울 이유가 없었다.

백제그룹 장오현 회장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복수해 달라고, 길드 문경새재에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재계 서열 10위권인 백제그룹도, 구원자를 상대로 사적인 복수를 실행하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언론은 신났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넘쳐났다.

- 한국 사상 최악의 던전, ‘해운대’ 드디어 소멸. 최고 레벨로 구성된 공격대 15명 중 4명 사망.

- 백제그룹 장오현 회장, 아들 사망에 의연한 모습. “정의를 위해 싸운 아들이 자랑스러워.”

- 구원자 장혁수의 죽음에 관한 소문, 사실인가? 몬스터가 아니라 구원자가 죽였다!

- 한국 길드협회 내분 표면화. 남궁훤, 장혁수의 죽음은 구원자들간 갈등 때문이라는 소문.

팬덤 사이에는 메탈엔젤 성나린의 죽음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 메탈엔젤 성나린 사망. 팬들, 큰 충격에 빠져.

- 메탈엔젤 성나린 추모 촛불 문화제. 광화문에 5천여 명 운집.

- 해외 팬들도 추모 집회. 뉴욕, 런던, 도쿄 등 10여 도시에서 추모 행사 열려.

이준기 개인으로서는, 최초의 구원자 처단이라는 의미가 컸다.

- ‘구원자 첫 킬’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모든 능력치가 5 증가합니다.

언젠가는 달성하게 될, 사악한 업적. 그러나 지난 번에 비해 훨씬 일찍, 훨씬 낮은 레벨에 달성했다.

구원자를 살해하고 얻는 업적은 이것이 끝이 아니다.

조슈아 테일러가 넘사벽의 레벨을 달성하게 된 데에는, 구원자 학살이 큰 기여를 했다는 점.

나중에는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

그걸 이준기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조슈아에게는 다른 비결도 있지만.’

장혁수 살해로 얻은 경험치는 얼마 남지 않은 경험치 바를 밀어 올렸다.

‘해운대’에서 이준기는 17레벨까지 올라갔다.

그는 상태창을 켰다.

- 레벨 17.

- 전문화: 바람 5, 마나 12.

- 힘 25. 민첩 60. 체력 45. 정신력 20. 물리 저항 15. 마력 저항 15(+10).

마력 저항 보너스 수치가 +15에서 +10으로 낮아졌다.

탱커 한상태에게 대여해 주었던 ‘마력 저항의 펜던트’가 소멸해버렸기 때문.

하지만 ‘해운대’ 던전을 통해 이준기는 골드를 많이 벌었다.

소방용 부츠 판매 대금, ‘마력 저항의 펜던트’ 대여료, 그리고 경매 수익금을 배분받은 것까지, 약 500골드를 벌었다.

현재 싯가로 한화 약 5억 원.

하지만 그걸 한화로 바꿀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힐링 포션, 식량, 그리고 아이템을 사는 데 쏟아부을 것이니까.

이번 던전에서 가장 큰 전리품이라면 역시, 장혁수를 처치하고 얻은 숏소드, ‘오캄’.

원래 남궁훤의 물건이고, 장혁수가 아버지 백을 동원해서 길드에서 빼앗다시피 한 물건이다.

문경새재 길드로서는 반환을 요청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장혁수가 이준기를 죽이려고 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

그래서 문경새재 길드는 이준기가 ‘오캄’을 접수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준기는 이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장혁수의 나머지 유품을 문경새재 길드에 넘겼다.

에픽 등급 숏소드, ‘오캄’만을 챙긴 것이다.

- 오캄.

- 숏소드. 에픽 등급.

- 10~16 대미지. 공격속도 2.5초.

- 발동 효과: 자신에게 가해진 ‘설명이 복잡한’ 스킬을 무효화합니다.

이 물건의 주인이었던 남궁훤, 장혁수는 발동 효과에 대해 잘 몰랐겠지만, 이준기는 다르다.

예전에 한참 동안이나 쓰던 물건이다.

어떤 스킬이 무효화 되는지, 당장 목록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잘 안다.

‘대미지 딜러에게도 최상급 무기지만, 탱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다. 이걸 맡겨도 좋을 만한 동료가 있을까?’

이준기는 과거의 동료들을 한 명씩 떠올려 보았다.

헬렌 카자크, 미겔 산체스, 키라트 싱, 린핑 루, 그리고 길수연.

탱커는 이준기 자신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이준기가 탱커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이므로.

누군가 다른 탱커가 합류하거나, 아니면 탱커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몬스터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슈아 테일러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

던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9월 14일, 화요일에 던전을 클리어했고, 오후 늦은 시간임에도 간단한 기자회견을 했다.

정식 기자회견은 수요일 오전에 했다.

성나린, 권영호와 마찬가지로 장혁수와 남궁훤도 몬스터에게 죽은 것으로 발표했다.

공격대원 대부분은 오후에 KTX 편을 통해 서울로 올라왔다.

9월 16일, 목요일 아침에는 길드에서 장시간 회의를 했다.

게으르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구원자들이지만, 아침 9시 회의에 지각하는 사람도 없이 전원 참석했다.

길드 마스터가 죽었으니 위기의식을 가질 만했다.

이도협 부길마가 당분간 길마 대행 역할을 하겠지만, 서둘러 정식 선거를 통해 차기 길드 마스터를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윤동직 구원자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는, 다른 분들 의견에, 대세에 따르겠습니다.”

“제가 당분간 길마 대행하는 것에 대해서는요?”

“그건 당연히 부회장님이 하셔야죠. 지금 부회장님 빼고 누가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약간의 수군거림이 뒤따랐다.

이도협이 막판에 던전 입장을 거부하는 바람에 권영호가 들어갔다 죽은 것이니까.

권영호의 죽음에 대해 이도협에게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준기 구원자님 의견은요? 이제 초짜도 아니고, 17레벨 중견 구원자네요.”

“저도 대세에 따르겠습니다.”

“내가 길마 대행하는 거는 찬성해요?”

“네. 물론입니다. 길드 규정도 그렇지 않나요?”

이준기로서는, 이도협이 무슨 자리를 해 먹든, 심지어 충무공 길드의 운영이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할 바가 없었다.

협회장 파벌인 이도협이 길마가 되면 충무공 길드 전체가 협회장 파벌이 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정치 싸움의 결말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분으로 힘이 빠지고 나면, 일본놈들이 쳐들어오는 전개.

그걸 막는 게 더 중요하다.

목요일 오후에는 집에서, 그러니까 길드 숙소인 오피스텔에서 쉬었다.

장혁수에게 살해당할 수많은 일반인들의 생명을 살린 셈이지만, 장혁수를 죽인 것은 엄연한 살인.

이준기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쉬어야 했다.

수많은 구원자들을 상대로 학살극을 벌인 이준기.

그의 기억 기준으로는 불과 2주 전까지 그의 삶이다.

그러나 어쨌든 회귀 이후 처음으로 구원자를 죽였다.

인간쓰레기에, 연쇄살인마로 각성한 직후의 사이코패스이기는 하지만.

장혁수의 시나리오대로였다면, 던전 안에서 남궁훤, 이준기를 죽이고 밖으로 나와 매일 밤 살인 행각을 즐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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