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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0: 오크 전쟁기지 (1)
Episode 10: 오크 전쟁기지 (1)
남은 시간에 전쟁기지 바로 근처까지 진행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느린 박자로 나아갔다.
물약 장사라도 되는 것처럼 힐링 포션을 인벤토리에 꽉 채워둔 한상태가 일부를 나눠주기는 했지만, 1층 자판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최대한 아껴야 했다.
천천히 진행을 한 덕분에, 느리기는 해도 물자를 절약하며 전진할 수 있었다.
밤이 되었다.
맛없는 식사를 마친 공격대원들은 모닥불 주위에서 자리를 잡고 누웠다.
식사 후에 두셋씩 모여 잡담을 하던 어제와는 딴판인 광경.
이준기는 오늘도 불침번을 서겠다고 자원했지만, 박충기가 거부했다.
“그런 건 사절이야. 적어도 내 공격대에서 저레벨을 착취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이준기는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
쉽게 잠이 드는 체질인 이준기였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길수연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성나린과 그 정도로 친해진 걸까.
아니, 겉으로는 쿨한 척해도, 길수연은 속이 여린 사람이라서 그렇다.
누가 죽었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손에 꼽을 정도이기는 했지만, 이준기는 길수연이 우는 것을 지켜본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계속해서 꾸역꾸역, 속으로만 구겨 넣는 울음소리.
그렇게 울던 그녀를 지켜보던 기억이, 지금 어두운 밤하늘 아래 어딘가에 겹쳐 들린다.
*****
아침이 되자, 장혁수가 또 없어졌다.
박충기가 장혁수를 찾다가 소현배를 마주쳤다.
“장혁수 못 봤어? 이 자식이 이제 내 말을 아예 무시하네.”
“또 어딘가에 가서 늑대라도 잡고 있겠죠. 여긴 늑대가 아니라 아마딜로라도 나오려나?”
“자기 아버지 백 믿고 내 말을 우습게 아네. 어떻게 하지?”
“길마님이 자꾸 그놈 편을 들어서 그런 거잖아요. 남궁훤한테 뺏은 ‘오캄’도 그냥 그놈에게 주고.”
“아직도 그 소리냐?”
“그거, 누구한테라도 좋은 무기입니다. 저한테도 아주 좋은 무기고요. 남궁훤을 잡은 것도 저고요. 장혁수는 미끼 노릇을 했을 뿐이죠. 상식적으로도 그렇잖아요? 17렙이 25렙을 잡았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길마님?”
“당연히 네가 잡았겠지. 그런데 혁수가 미끼 역할을 했다면서. 혁수 놈도 공이 있기는 한 거지.”
“아무튼, 저는 아직도 많이 서운하다는 거, 기억해 주세요.”
“길드 돌아가서, 정산해 주마. 내가 공과는 확실히 챙기잖냐.”
“정말요? 장혁수 그놈의 ‘과’는 별로 챙기시지 않는 것 같아서.”
“나도 화나려고 그런다. 그만하자.”
과연, 공격대원들이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장혁수가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검붉은 색으로 굳어진 핏자국 위에 신선한 새 핏자국이 선명했다.
“너 이 자식, 내 경고가 우스워?”
“아이, 대장님 또 왜 그러세요. 공격대에 도움이 되려고 경험치 쌓으러 나간 건데. 잠도 안 오고요.”
“지금 네 행동에 대해서 나만 불만이 있는 게 아냐. 조심하라고!”
“오늘 보스 잡으면 던전에서 나가잖아요. 아버지한테 후원 크게 좀 하라고 잘 말할게요.”
후원금 이야기로 박충기를 제압했다고 생각한 장혁수는 모닥불 옆으로 가서 앉았다.
이미 불씨만 남아 꺼져가는 모닥불이었지만, 왠지 그 주위에 앉아야 할 것 같았다.
옆자리에 소현배가 앉으며 말을 꺼냈다.
“무기는 잘 들어? 쪼렙에 쓰려니까 후달리진 않고?”
“아, 씨발. 소 선배님.”
“뭐, 씨발?”
“이거 제 거로 결정 난 거잖아요. 돈도 낼 거고요.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새꺄. 난 동의한 적 없거든.”
“아니, 씨발, 내가 팔 짤려나가면서 탱킹 안 했음, 남궁훤 그놈 잡을 수 있었을 거 같아요?”
“그놈을 네가 잡았냐? 내가 잡았지. 너야말로 이해가 안 돼? 구원자 하루 이틀 한 거야? 어제 각성했어?”
“내가 그 새끼 숨통을 끊었잖아요. 막타 날렸다고요. 뭘 모르시네. 게임을 안 해보셨나?”
“너 같은 병신 새끼 계속 보지 않으려면, 내가 길드를 나가야겠다.”
“그래, 나가라, 이 양민 새꺄.”
“이 새끼가!”
소현배가 일어서자, 장혁수도 일어섰다.
근처에 있던 한상태가 달려와서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공격대다. 싸움을 하려거든 일단 보스까지 깨고 나서 하든가 해.”
한상태의 단호한 어조에, 일단 둘은 갈라섰다.
하지만 둘은 진한 앙금이 남은 한마디씩을 교환했다.
“나중에 좀 보자, 새꺄.”
“던전 끝나고 보죠, 형씨.”
*****
오크 주술사라는 상당히 강력한 엘리트 몬스터가 포함된 무리가 이어졌다.
자기 부하를 마치 장기말 부리듯이 소모품으로 쓰는 주술사의 사악한 마법에 당황하는 공격대원들이 많았다.
다행히도, 탱커 한상태가 위험한 상황에 잘 대처했다.
오크 주술사의 주문을 아는 이준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외국어 시간도 아니고, 주술사 주문을 전부 가르쳐 드릴 수도 없고요. 제가 잘 듣고 있다가 위험한 상황에는 신호를 하겠습니다.”
오전에 전쟁기지 바깥쪽의 몬스터 무리들을 모두 정리했다.
해가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 건물 안쪽으로 진입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전쟁기지는 목조 건물과 동물의 가죽을 이용한 지붕이 많았다.
석조건물보다는 덜 시원하겠지만, 그늘이 많아 바깥보다는 훨씬 시원했다.
‘좋은 게 있다.’
이준기는 멀리서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사로잡힌 레프리콘’.
그러니까 장난꾸러기 요정이 오크 기지에 사로잡혀 있다는 이야기인데, 해방시켜 주면 진귀한 보물을 내놓는다.
그러니까 공짜 보물 상자다.
“대장님, 저쪽을 보십시오.”
“응?”
“저쪽, 저기 천막 아래쪽에 짐승 가둬놓는 우리 같은 게 있잖아요?”
“어, 그렇네.”
“저쪽으로 가시죠?”
“왜?”
“보물을 줍니다. 아마 에픽급 이상일 거예요.”
“그래? 그거 잘 됐군.”
박충기나 한상태도 ‘사로잡힌 레프리콘’은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주변의 몬스터를 정리하고, 박충기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이준기는 레프리콘이 갇힌 우리로 다가가서, 레프리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기리쓰··· 우와할타··· 야라오네··· 아아, 이제 됐군.”
마치 라디오 주파수라도 고르는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쏟아내던 레프리콘이 한국말을 했다.
“일단, 구해준 것 고맙고. 뭐, 사실 원하는 게 있으니까 구해준 거겠지만. 그래서, 준비됐나?”
“그래.”
“방향은?”
“북쪽.”
“위냐, 아래냐?”
“위다.”
“그래?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내가 보기에 너는···”
“뭐, 너한테는 상관없잖아.”
“그렇기는 하지. 재미있군. 자, 가져가라.”
우리의 문이 열리더니, 레프리콘이 두발을 모아 바깥으로 점프했다.
공중에 물보라라도 뿌린 것처럼 무지개가 나타나더니, 그 끝자락이 레프리콘이 선 땅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에 항아리가 나타났다.
‘진부한 전개군. 대체 왜 지구별 사람들 옛날이야기를 활용하는지 모르겠네.’
이준기는 뒤를 돌아, 몇 발자국 뒤에서 구경하던 다른 공격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뭐가 나왔는지는, 공격대장님이 확인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박충기가 앞으로 나와 항아리에 손을 넣었다.
반지가 나왔다.
박충기가 공격대원들에게 링크를 보냈다.
- 스피릿 링크.
- 반지. 에픽 등급.
- 착용 효과: 모든 치유 효과가 15% 상승합니다.
- 발동 효과: 가장 최근에 힐을 넣은 상대가 스킬을 사용하면, 빛의 책 1권이 재생됩니다. 그 스킬이 치명타로 명중하면 빛의 책 1권이 추가로 재생됩니다.
2소대 힐러 최아람도, 3소대 힐러 하정태도 침을 꿀꺽 삼켰다.
메인 힐러 길수연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공격대장 박충기가 말했다.
“힐러템이군요. 관례대로 경매에 부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상태가 제지했다.
“보스 공략 직전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분배하든, 던전 클리어할 때까지만이라도 메인 힐러님이 썼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본인들은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최아람도 하정태도 인상이 일그러졌다.
문아린이 말했다.
“이준기 님 의견은 안 들어봐요? 보물이 있다는 걸 알아본 건 이준기 님뿐이잖아요.”
의견의 봇물이 터졌다.
“그게 준기 씨 혼자 처리한 것도 아니고, 공격대가 얻은 거지.”
“그 사람한테 주겠다는 게 아니고, 의견 들어보자는 거잖아?”
“힐러들 사이에서 결정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나중에 보상 상자에서 나오는 건 또 어떻게 하려고요? 관례대로 해요.”
이준기가 말했다.
“전리품은 던전 클리어 보상 상자까지 열어본 후에 한꺼번에 처리하면 어떨까요? 보스 공략 때까지는 일단 공격대 전체의 이익을 위해 길수연 님이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길수연이 이준기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무표정이 어딘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느 쪽일까.
이준기는 생각했다.
시간 여행자의 고충이란 게 이런 거겠지.
*****
골목과 광장이 섞여 있는 전쟁기지 안을 돌아다니면서, 공격대는 구석구석 모든 적 부대를 정리했다.
코볼트 20여 마리를 부리는 오크 부두 술법사가 나오니, 공격대원들은 신난다는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한두 방에 나가떨어지는 코볼트 보병들을 상대로 스트레스 해소라도 하려는 듯했다.
드디어 족장의 천막.
이준기의 말대로 세 개의 부대가 링크되어 있고, 각각이 10명 규모였다.
각종 고급 마법을 구사하는 주술사 둘을 포함한 30마리의 정예 오크를 상대하는 것은 힐링 포션을 충분하게 구비한 상태에서도 거의 불가능한 일.
메인 탱커 한상태는 5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적 무리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확실하군. 세 부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까 준기 씨가 말한 대로, 그 아이템을 던지면 되는 거지?”
“네. ‘되살아난 화염의 핵’. 그걸 두 주술사 부대의 가운데로 던지세요.”
“정확하게 가운데로 던져야 해?”
“적당히 던지시면 됩니다.”
오후 네 시.
아직도 강렬한 태양 빛을 받으며, ‘되살아난 화염의 핵’이 붉게 타오르 듯 공중으로 날아갔다.
마치 느린 재생 화면을 보는 것 같이, 양편의 주술사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용암석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콰 네어 잔 다루!”
“니히 리쿠 쇼스테 난!”
그걸 줍겠다고 버선발로 뛰어온 두 주술사가 서로 삿대질을 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오크 족장이 헛기침을 했지만 둘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양쪽으로 늘어선 두 부대가 곧 치고받는 난전에 돌입했다.
한상태가 활을 꺼내 화살을 날렸다.
날아오는 화살을 족장이 손으로 잡았다.
족장의 양옆에 기립해 있던 엘리트 오크 경비병들이 달려왔다.
족장도 의자에서 일어나 거대한 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
미리 의논해 둔 대로 공격대원들은 전투에 나섰다.
한상태가 족장과 일기토를 뜨는 동안, 불과 두 시간 전에 20레벨을 단 윤동직이 나머지 경비병들을 탱킹했다.
메인 힐러 길수연은 한상태, 제2 힐러 최아람은 윤동직, 제3 힐러 하정태는 나머지 공격대원의 힐을 담당했다.
공격대장 박충기의 콜에 따라 공격대원들은 경비병을 한 놈씩 쓰러뜨렸다.
오크 족장은 매우 강했다.
한 방 한 방이 강력하게 들어왔다.
거대한 도끼를 540도씩 휘둘러서 한상태를 향해 휘둘렀다.
‘한 방이라도 잘못 맞으면, 그냥 죽겠군.’
대미지를 흡수하는 스킬을 차례로 발동했지만, 족장의 도끼에 한 방만 맞으면 보호막이 벗겨졌다.
다행히도, 완급조절이 완벽한 길수연의 힐이 한상태의 체력을 안정적으로 유지시켰다.
딜러들이 떼로 몰려 일점사를 해대는 통에, 엘리트 오크 경비병들이 순식간에 나자빠져갔다.
오랜만에 긴장 상태로 던전을 돌아서 그런지, 권영호는 피로를 느꼈다.
막판 보스전이 예상외로 싱겁게 흘러가자, 마치 졸음운전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권영호의 손끝을 떠난 ‘어둠의 화살’이 오크 족장을 향해 날아갔다.
- ‘어둠의 화살’로 오크 족장에게 17의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준비 동작이고 뭐고 없었다.
눈동자를 불타는 오렌지색으로 빛내면서, 오크 족장이 공중을 도약해 권영호에게 날아왔다.
콰직!
오크 족장의 도끼에 맞은 권영호가 십여 미터를 날아가 병영 천막 기둥에 처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