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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 해운대 (2)
Episode 8: 해운대 (2)
“크워엉!”
피 속을 흐르는 독 대미지에 흠칫하던 오크가 다리를 붙잡고 쓰러졌다.
오크의 허벅지를 찍은 도끼를 뒤로 빼면서, 김새로미가 엄지를 세웠다.
“그 무기, 너무 좋은데요. 모양만 멋진 게 아니고 성능도 완전히 사기네요.”
문아린도 옆으로 붙으면서 대꾸했다.
“그러게 말예요. 광란을 풀어버리다니.”
“아니, 준기 씨는 그런 무기를 어디에서 구한 거예요?”
이번에는 힐러 하정태.
“감사합니다.”
이준기가 짧게 대답했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그 정도가 최선이다.
쏟아지는 질문들에 제대로 대답을 하기 시작하면 의혹만 커질 뿐이다.
다행히, 오크들이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한상태가 쉬지도 않고 몹 무리를 몰아 왔기 때문이다.
한 무리가 정리된다 싶으면 한상태는 인벤토리에서 중급 힐링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인벤토리에서 무기와 갑옷을 꺼낸 자리에 힐링 포션을 가득 채웠나 보다.
어차피 힐링 포션은 소모품.
나중에 던전을 나갈 때는 무기와 갑옷을 다시 수납할 공간이 생길 것이다.
“한상태 회장, 엄청 부잔가 보네요. 4백만 원짜리 포션을 뭐 물 마시듯 하네요.”
“저렇게 솔선수범하니까 현재 대한민국 탑랭커 자리까지 올라간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 누구든 저런 탱커와 함께하고 싶어 할 겁니다.”
몰이 사냥을 하면 힐러진이 싫어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한상태 수준의 개념 탱커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괜찮으세요, 힐러님?”
1소대 딜러 남궁훤이 힐러 길수연에게 물었다.
“탱커님 피가 안 주네요. 여유롭습니다.”
*****
해가 지기 시작할 즈음, 공격대는 입구 오두막으로 길게 철수를 시작했다.
“2층에 올라가면 무조건 노숙이다. 첫날은 지붕이라도 있는 오두막에서 자야지. 숙녀님들도 계시는데.”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짜 심각한 얘깁니다. 2층짜리 던전 경험 있는 분들, 많지 않잖아요? 단층 던전만 뛰시던 분들은 노숙 경험이 없는 게 당연하고요.”
밤이 되었다.
열다섯 명이 오두막에서 자려니 여간 좁은 게 아니었다.
일부 남자 공격대원들이 따로 자겠다면서 밖으로 나왔다.
“충무공 길드 두 분, 밖에서 주무시려고요?”
“여러분들 덕분에 레벨업도 했는데, 잠자리는 양보해야죠.”
늦게 입장하는 바람에 반나절도 못 뛴 오늘.
레벨업을 한 것은 단 두 명.
윤동직은 19레벨, 이준기는 14레벨이 되었다.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내일부터는 노숙인데.”
권영호가 인사치레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같은 길드원인데, 마스터로서 챙기는 흉내는 내야 한다는 그런 느낌.
‘충무공’ 길드는 부길마인 이도협이 사실상 실세라고 들었다.
권영호는 얼굴마담이라는 이야기.
한길협이 매달 발표하는 구원자 랭킹 상단을 유지하는 게 권영호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길드 마스터라는 직함을 달고 있기는 해도, 윤동직, 이준기에 대해 아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한가할 때, 쓸데없이 문제를 만드는 것이 장혁수 같은 캐릭터가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조용했다.
던전 식량 팩을 먹으면서 맛이 더럽게 없다는 간단 평을 남겼을 뿐이다.
일찌감치 오두막 벽 근처에 자리 잡은 장혁수는 벽을 보고 누워 잠을 청했다.
휴대폰도, 흥분제도 없는 이곳에서 감각을 자극하는 일은 사냥뿐이다.
던전 등급이 높아서 마음껏 날뛰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
*****
“뭐야? 오두막이라고 아침 점호를 안 할 줄 알았나?”
“점호 끝나기 전에 돌아왔잖습니까.”
“끝나기 전에 돌아온 게 아니라, 네가 없어서 점호가 늦어진 거다.”
“아, 도대체 회장님은 왜 자꾸 저한테는 그러십니까.”
“지금은 길드 회장이 아니고, 공격대장이다. 다른 길드 사람들도 많은데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
아침부터 장혁수가 없어져서 잠깐 소란이 있었다.
숲속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장혁수의 옷자락에 신선한 피가 묻어 있었다.
혼자 다니는 오크 몇 놈을 혼내줬다고 말하는 장혁수.
허세를 부려봤지만, 기분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숲속에 몬스터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선제공격을 하지도 않는 들짐승 몇 마리를 잡았을 뿐이다.
짐승이나 오크나 피는 똑같이 빨간색이니, 허세는 부릴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공격대에 기여를 좀 해야죠. 쪼렙이니까.”
장혁수가 옆을 지나며 그렇게 도발했지만, 이준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틀째에는 첫날보다 사냥속도가 더 빨라졌다.
반나절이라도 손발을 맞춰본 덕이다.
오전 열 시쯤, 멀리,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작게 보였다.
숲속 한가운데,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돌계단이 높게 솟아 있다.
무척 부자연스러운 광경이다.
그 아래쪽으로,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광경.
오크 30마리 정도가 나름대로 진형을 갖추어 움직이고 있다.
15마리짜리 두 부대다.
지금까지 풀링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한 한상태지만, 이번에는 신중하게 적진을 관찰한 후에, 안전하게 한 무리를 당겨왔다.
계단을 지키는 다른 무리가 얽혀들지 않도록, 한상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신중하게 뒷걸음질을 쳤다.
두 무리가 충분한 거리를 두고 분리되었다고 판단하고, 권영호는 어제와 같이 ‘검은 탄막’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열다섯 마리라니, 투자 대비 최고의 효율이 나오겠군.’
시전에만 10초가 걸리는 복잡한 스킬.
권영호는 복잡하게 손을 놀리면서 자신의 눈높이에 검은색 도형을 그려가고 있었다.
그때다.
남궁훤의 독화살이 계단 쪽으로 멀어지는 다른 무리의 오크를 향해 발사된 것이.
‘다른 사람들도, 봤을까?’
실수인지 고의인지, 그 행동에 대해 이준기가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남궁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멸.
어둠-바람 계열로 전문화한 딜러, 속칭 파운더의 희귀 스킬.
남궁훤을 향해 뛰어오던 오크 무리가 다른 공격대원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애드!”
“비상사태입니다!”
10초간의 시전을 끝마친 권영호는 눈을 뜨고 자기 앞에 그려진 검은 원을 손바닥으로 내리찍었다.
15마리가 아니라 30마리를 향해서, 검은 탄막이 그야말로 난무를 펼쳤다.
“길수연 님, 힐을!”
그렇게 외치고, 한상태는 전설급 방패 ‘아스트라아제’를 들었다.
방패에서 오렌지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공격대원 14명과 섞여 난전을 벌이던 오크들이 자기도 모르게 오렌지색 빛을 향해 부나방처럼 뛰어들었다.
길수연은 침착하게 ‘빛무리’를 시전했다.
이어서, ‘채널링 힐’ 시전.
길수연에서부터 한상태까지, 빛의 도로가 깔렸다.
그 위를 내달리는 휘황찬란하게 하얀 빛 조각들.
빛 조각들은 한상태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길수연에게 부메랑처럼 날아돌아왔다.
그렇게 반달 모양의 빛 고리가 메인탱커와 메인힐러 사이에서 펼쳐졌다.
실로 장관이었다.
구경할 여유가 없는 게 아쉬울 뿐.
이준기는 자신에게 ‘가속’을 걸고 한상태 주변을 에워싼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치명타! 39!
- 오크 도끼병이 ‘둔화’에 걸렸습니다.
- 22!
- 오크 도끼병이 ‘둔화’에 걸렸습니다.
전국 최고의 화염 누커, 박충기 역시 손놀림이 바빴다.
눈앞에 보이는 오크들을 향해 하나씩 스파크를 날려 화염 낙인을 찍었다.
충분한 숫자가 모였다고 생각하면 플레임 스트라이크를 시전했다.
화염 낙인이 찍힌 적들의 발밑에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불기둥이 치명타로 적중할 때마다, 적의 몸에서 화염 낙인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화염 낙인은 불의 책 두권으로 바뀌어 박충기에게 날아들었다.
효과적으로 책 자원을 리사이클링하는 박충기, 역시 실력자다.
2탱 메탈엔젤 성나린, 그리고 3탱 윤동직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탱킹을 분담했다.
한상태에게 몰려드는 오크들의 일부를 도발해서 떼어 놓았다.
그렇게 서브 탱커에게 도발 당한 오크들을 향해 김새로미, 문아린, 그리고 이준기와 같은 딜러들이 달려들었다.
한 번에 한 놈씩, 일점사.
그렇게 오크들의 숫자를 줄여갔다.
15인 공격대에 30마리의 오크가 덤벼든 상황.
도망가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모두가 최선을 다했다.
장혁수조차 이마에 땀을 맺어가며 다마스커스를 열심히 휘둘렀다.
*****
남궁훤은 은신 상태에서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전장을 빠져나왔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의 위치가 파악된 이후에는 최단 거리로 몬스터를 정리했다.
그래서 1층에는 아직 여기저기 정리되지 않은 지역들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몸을 숨기고 움직이는 이유는 공격대가 아니라 몬스터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쯤 분명히 전멸했을 것이다. 박충기 한 녀석만 없앨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괜히 휘말려서 죽은 놈들에게는 미안하군.’
문제는 언제쯤 밖으로 나가느냐다.
레벨이 강등되고, 장착템 하나가 부서지는 건 아깝지만, 이상덕 길드협회장이 보상해 줄 것이다.
나가기 전에 숲에서 늑대라도 한 마리 잡아서 피를 여기저기 묻혀야 한다.
흙도 좀 바르고, 눈물도 좀 흘리고.
‘전멸하는 공격대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울먹이면서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렇지. 상황을 좀 더 보고 올 걸 그랬다.’
남궁훤은 공격대가 전멸한 자리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다면,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지 않고, 죽은 공격대원이 떨군 아이템을 주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충기의 마법 막대, ‘파이어 스타터’를 가지고 올 수 있다면, 그래서 그걸 던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만 있다면, 박충기의 죽음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비싸게 팔아서 큰돈을 만질 수도 있다.
‘에픽급 아이템이니, 어딘가에 잠깐 묵혀놨다가 브로커를 통해 외국에 팔아먹는 게 좋겠다.’
남궁훤은 숲 덤불 사이에 몸을 숨긴 채로 공격대가 있던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후우.”
마지막 오크가 쓰러지자, 메탈엔젤 성나린이 흙바닥에 주저앉으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공격대 전원이 탈진 상태였다.
힐러들을 비롯해서 공격대 전원이 자원을 거의 완전히 소모했다.
책은 물론, 들고 있던 힐링 포션까지.
“어떻게, 된 거죠?”
“도저히 애드가 될 거리가 아니었는데요.”
“갑자기 저쪽 부대가 달려왔다고요.”
정말 그 장면은 이준기 혼자 본 것일까.
아니면, 그 누군가도 자신이 본 장면을 어떤 이유로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모함하는 말로 비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이준기는 망설였다.
최저 레벨인 자신이 말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나, 남궁훤!”
“어?”
“남궁훤! 남궁훤 씨!”
남궁훤이 자리에 없다는 걸 알아채자, 사람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저기, 사실은···”
“남궁훤이 애드를 시키고 도망갔습니다!”
이준기가 입을 떼려 하는데, 누군가가 먼저 말했다.
장혁수였다.
“어둠 스킬 독화살 날려서 저쪽 오크 떼가 달려드는 거 보고, 소멸하는 거. 제가 봤습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
“나도 봤어!”
“어쩐지 갑자기 안 보이더라니.”
한상태가 의견을 냈다.
“일단, 본인 의견을 들어보고, 어떻게 할지 의논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놈이 아직도 던전 내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본인 말을 들어는 봐야죠. 그 후에는 반쯤 죽이겠지만.”
“고의가 아니라 실수라고 해도, 도망을 갔다면 그걸로 끝난 겁니다. 100% 죄를 물어야 해요!”
길수연이 말했다.
“오늘 이대로 더 전진하는 것은 어렵지 않나요?”
성나린이 동의했다.
“전원 탈진에, 스킬 쓸 책도 남아 있지 않아요. 힐링 포션을 사기 위해서라도 입구 오두막에 다시 들러야 할 것 같은데요.”
“이대로 2층에 올라가면 답이 없어요. 일단 입구 오두막으로 후퇴해서, 정비도 하고 남궁훤 문제도 논의해야 합니다.”
“식량이 버텨줄까요? 4일 후, 화요일에는 끝난다고 생각하고 들어오신 거잖아요, 모두들?”
“좀 굶으면 되죠.”
“여기에도 늑대나 곰 있잖아요? 그 고기, 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남궁훤은 어떻게 합니까? 당장 찾아내야죠!”
“던전 바깥으로 나갔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기자들에게 우리들이 전멸했다고 말했겠군요.”
“만약 그랬다면, 던전 클리어 후에 죄를 물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