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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8: 해운대 (1)
Episode 8: 해운대 (1)
체력 40에 중급 힐링 포션을 쓰기에는 좀 아깝지만, 하급 힐링 포션으로는 체력이 15밖에 차지 않는다.
게다가 인벤토리를 생각하면 하급 힐링 포션 두 개보다는 중급 힐링 포션 하나가 낫다.
힐러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는 것이야말로 딜러의 기본이다.
자판기 앞에서 줄을 서 있는 동안, 윤동직이 이준기에게 물었다.
“준기야.”
“네.”
“준기는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 레벨은 낮아도 나한테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판기에서 뭘 사면 좋을까?”
“골드는 얼마나 가지고 계세요?”
“글쎄. 한 40골드 정도? 잠깐만.”
“네.”
“42골드 있네.”
“중급 힐링 포션은 있으시죠?”
“두 개.”
“탱커시니까, 힐링 포션 몰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윤동직이 나를 꽤 신뢰하고 있기는 하지만, 얼음 화살을 사라고 하면 의아해할 것이다. 한두 푼짜리도 아니고. 게다가 그 비싼 걸 사서 아무 데서나 쏴버리면 더 황당하고. 그냥 힐링 포션이나 사라고 하는 게.’
“준기도 힐링 포션 몰빵할 거야?”
“저는 마세라티 판 골드 다 가지고 왔습니다. 하하.”
“그걸 여기서 다 쓰려고?”
“최저 레벨 공격대원으로서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죠. 힐링 포션도 사고 이것저것 도움 될 만한 것들을 사려고, 이미 목록을 만들었어요.”
“1억5천을 다 쓰겠다는 거?”
“네.”
이준기는 자신의 쇼핑 목록을 말해주었다.
“얼음 화살? 소방용 부츠? 불 몬스터라도 나오는 건가? 여기 뭐가 나오는지 알아? 그게 인터넷 보면 나오는 거야?”
“아뇨. 형님.”
“그럼?”
“그냥 다 소비하는 거예요. 어차피 여기서 죽으면, 그다음은 없잖아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아요.”
이준기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
공격대장 박충기는 15명의 공격대를 세 개의 소대로 나누었다.
탱커, 힐러 한 명씩에 딜러 세 명이 한 소대다.
비상사태, 오로지 위기 상황에서만 소대별 행동이 허락된다고 박충기는 강조했다.
평상시에는 15명이 한 덩어리로 움직이면서 일사불란하게 던전을 정리하겠다고.
정말로 만에 하나, 돌발 상황으로 전체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만, 소대별 행동이 허락된다.
그럴 경우라도 절대 혼자 떨어지지 말고 자기 소대를 찾아가라, 이것이 골자였다.
1소대는 그야말로 이번 공격대의 핵심.
탱커 한상태, 힐러 길수연, 그리고 공격대장 박충기를 포함한 상위 레벨 딜러 세 명이 편제되었다.
2소대는 메탈엔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이돌급 여성 탱커, 성나린을 중심으로 힐러 최아람, 그리고 딜러 세 명이다.
3소대는 20레벨도 안 되는 탱커 윤동직, 하정태라는 힐러, 그리고 딜러 세 명.
이준기는 장혁수와 함께 3소대에 배치되었다.
나머지 딜러 한 명의 이름은 김새로미.
아직도 학교에 다닌다는 여대생이다.
레이드 때문에 가을학기 첫 주 수업부터 빠지게 생겼다고.
공격대장이 3소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진형에서도 쉽게 알 수 있었다.
1소대가 전위, 2소대가 후위를 맡고, 3소대는 마치 호위 대상이라도 되는 듯이 그 가운데에 서서 움직이는 것이 기본진형이었다.
“최대한 3소대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하겠지만,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은 명심하도록.”
“넵.”
“개활지 같은 지형에서, 사방에서 포위 공격이라도 받는다면, 앞뒤만 막는 걸로는 어림도 없지. 그럴 때는 알아서 생존하는 수밖에 없어.”
“네.”
“최대한 잘 살아남는다. 그것만으로도 전력이 유지되는 거니까. 1층을 다 쓸고 나면 한 레벨 정도는 오를 테니, 전체적으로 공격대 전력도 강화되는 거지.”
“알겠습니다.”
“듣고 있냐, 장혁수?”
“네, 잘 듣고 있습니다. 잘 알았다고요.”
박충기 공격대장이 같은 길드원인 장혁수에게 묻자, 장혁수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듯한 톤으로 대답했다.
“이런 씨발.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내 레벨 반밖에 안 되는 화상 새끼도 있는데.”
장혁수는 다 들리라는 식으로 말했다.
이준기는 무시했다.
장혁수, 이번에는 살아서 여길 나가지 못할 것이다.
역사를 바꿀 것이니까.
미리 시선을 끌 만한 사건을 만들면 안 된다.
“야, 장혁수.”
대신 열 받은 윤동직이 장혁수를 불렀다.
“네, 뭐요?”
“깝치지 마라. 여기가 클럽으로 보이냐? 네가 마약 빠는?”
“뭐가 어째요?”
“클럽에서 마약이나 빠는 연놈들은 너 따위를 추켜세우고 그럴지 모르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 너보다 훨씬 잘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깝치지 마라.”
“아이, 씨발, 정말. 이 아저씨는 또 뭐야. 차원문인지 뭔지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나하고 말도 못 섞었을 양민 주제에.”
“이 새끼가!”
윤동직이 주먹을 날렸다.
장혁수가 땅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서 일어선 장혁수는 침을 뱉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손에 쥐었다.
다마스커스.
20레벨 중반까지는 준수한 성능을 발휘하는 레어 등급 한손검.
“야, 윤동직! 전직 깡패라더니, 눈에 뵈는 게 없냐?”
“뭐가 어째? 이 애송이가. 마약 사범이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겠지.”
윤동직도 무장했다.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다마스커스.
같은 무기니까, 아무래도 방패까지 든 윤동직이 우세해 보인다.
레벨도 하나 더 높고.
“장혁수! 윤동직!”
보다 못한 박충기가 나섰다.
그러나 말로 진정시킬 수 있는 단계를 지났다.
박충기가 다시 호통을 쳤지만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장혁수가 몇 번 검을 휘두를 것처럼 위협했지만, 윤동직은 상대를 노려보며 움직임을 읽었다.
상대의 몸동작을 읽어내는 윤동직을 보고, 이준기는 감탄했다.
‘정말 칼 쓰던 사람일지도. 여기서 죽기에는 아까운 인재다.’
실실 쪼개면서 윤동직을 바라보던 장혁수가 검을 휘두르려고 어깨를 움츠렸다.
동시에, 윤동직이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고 장혁수의 사정거리로 파고들었다.
장혁수의 검과 윤동직의 방패가 맞부딪치려는 찰나.
파바바박!
방패로 몸을 감싼 여전사가, 땅을 반으로 가를 듯이 그들 사이로 슬라이딩해 들어왔다.
“와아!”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땅바닥에는 그녀의 슬라이딩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 선 양쪽으로, 윤동직과 장혁수가 땅바닥에 쓰러져 앉아 있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벙찐 표정으로.
여전사가 일어섰다.
온몸을 감싼 그녀의 판금 갑옷에서 윤이 났다.
‘메탈엔젤 성나린. 21세. 태양통신 창업주 회장 성동연의 외동딸. 같은 재벌 2세라도 급이 다르군.’
*****
주먹다짐은 그렇게 정리됐지만, 둘을 같은 소대에 둘 수는 없었다.
공격대장 박충기는 장혁수를 2소대로 이동시켰다.
17레벨 장혁수 대신, 21레벨 문아린이 3소대로 들어왔다.
선두에서 공격대장 박충기와 메인 탱커 한상태가 의논하는 게 다 들렸다.
“이렇게 되면, 2소대와 3소대 사이에 전투력 차이가 별게 아니게 되잖아요? 굳이 3소대를 호위하는 식으로 진형을 짤 필요가 없죠.”
“그래도 3소대가 제일 약한 건 그대로죠. 그대로 갑시다.”
“소대 단위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장혁수와 윤동직을 둘 다 데려가도 괜찮은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몬스터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데, 설마 계속 으르렁거리겠어요? 전우애라는 게 생길 겁니다.”
“박 회장님은 매사에 너무 긍정적이셔. 하하.”
이준기의 양쪽으로 김새로미와 문아린이 섰다.
최저 레벨을 보호하겠다는 선배들의 의지였다.
“저는 김새로미라고 합니다. 대학교 졸업반이고요, 각성한 지 8개월 됐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제 이름은 문아린입니다. 광주에서 카페 운영하고 있어요. 9개월 차 구원자고요. 잘 부탁드립니다.”
13레벨 이준기가 가세했다고 해서 이번 레이드의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어차피 죽을 사람들인데, 통성명을 하는 게 이준기는 괴로웠다.
그래서 가급적 말을 아끼기로 했다.
윤동직이 물었다.
“준기야, 왜 그래? 오늘 유난히 말이 없네.”
“긴장돼서 그렇죠, 뭐. 감사합니다, 형님.”
그렇게 짧게 대화가 끝났으면 좋겠지만, 양쪽의 딜러들이 대화에 끼었다.
“이준기 님, 걱정 마세요.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런 수준의 공격대는 하나 더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어요.”
“그럼요. 김새로미 님 말씀이 맞아요. 드림팀이라는 게 전혀 과장이 아니에요.”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전방에서 한상태가 오크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힐러 길수연, 그리고 공격대장 박충기와 의논을 한 것이기는 하겠지만, 너무 저돌적이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 레벨 구원자 한상태.
2층 던전이라고는 해도, 뻔질나게 드나들던 C급 던전이니까 마음대로 들이대도 괜찮다는 자신감이다.
스릉.
인벤토리에서 나온 패시파이어가 푸른 빛을 발하며 이준기의 손에 쥐어졌다.
앞으로 내달리는 이준기.
윤동직이 붙잡은 오크 두 마리 중 하나를 향해, 이준기는 푸른 검날을 날렸다.
- 치명타! 37!
- 오크 돌격병이 ‘둔화’에 걸렸습니다.
“오오!”
파티원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역시, 준기는 그냥 저레벨이 아니라니까!”
윤동직이 외쳤다.
“템빨이지만, 대단합니다!”
3소대 힐러 하정태도 인정했다.
공격대 15명이 오크 일곱 마리 한 부대를 순식간에 녹였다.
메인탱커 한상태는 마지막 오크가 쓰러지기도 전에 다음 오크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패시파이어를 들고 그 뒤를 따라 달리면서 이준기는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괜찮겠지.’
*****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어요. 휴식 시간은 최소로 하겠습니다!”
한 개에 4백만 원이나 하는 중급 힐링 포션을 꿀꺽꿀꺽 들이키고 나서, 한상태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만 하고, 곧바로 뛰쳐나가는 한상태.
이번엔 오크 열 마리짜리 무리인데, 두려움은커녕 주저함도 없다.
“그건 나보고 하는 말 같네. 하하”
검은색 재킷을 입은 권영호가 손가락을 들어 공중에 원을 그리며 말했다.
완성된 원의 검은색이 진해지자, 권영호는 오른손의 손가락 다섯 개를 다 펴고, 손바닥으로 눈앞에 떠 있는 검은색 원을 쳐낸다.
쿠쿵!
강력한 충격음과 함께, 검은색 원이 열 개의 조각으로 쪼개진다.
쪼개진 조각 열 개가 유도 미사일처럼 오크 열 마리를 향해 날아간다.
날아가면서 검은 조각들은 화살 모양으로 변해 간다.
‘검은 탄막’.
최강의 집단 공격 마법 중 하나.
‘권영호. 저런 희귀 스킬을 가지고 있었군. 제법인걸.’
권영호와는 함께 던전에 들어온 적이 없다.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
권영호의 화려한 스킬을 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 이준기의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던 검은 화살.
공중에 뜬 채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던 조슈아 테일러.
“햐!”
공격대원들이 자기 할 일도 잊은 채 검은 화살의 난무를 구경하고 탄성을 질렀다.
“책 소모가 심해서, 적이 열 마리는 돼야 본전 뽑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지금.”
권영호가 해설했다.
“그래요? 그럼 한 스무 마리 모아볼까요?”
탱커 한상태가 땅을 박차면서 말했다.
“농담이시죠? 힐러진 힘들어요.”
길수연이 대꾸했다.
한상태도 반은 농담으로 한 말일 텐데, 길수연답다.
농담에 뭐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하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만에 하나, 0.01%의 확률로라도 그게 농담이 아니었다면?
드림팀이 던전 초입에서 전멸하는 것이다.
할 말만 하는 길수연.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을 차단할 타이밍이라 생각한 것이다.
검은 화살에 맞은 오크들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맥박이 뛸 때마다, 검은 화살의 독이 핏줄을 안에서부터 찌른다.
도끼를 휘두르다가도 삐끗하게 만드는 고통.
지속적인 대미지로 적의 공격을 도중에 끊어주는 효과까지 노릴 수 있는 좋은 스킬이다.
물론 장점만 있는 스킬이 어디 있겠는가.
피해를 입을 때마다, 오크는 종족 특성, ‘광란’을 발동시킬 확률이 존재한다.
매초마다 독 대미지가 들어가니, 아직 대미지를 많이 입지도 않은 오크들이 광란 상태로 돌입했다.
이준기의 패시파이어가 공중에 호를 그린다.
푸른 검날에 왼팔을 베인 오크 돌격병의 눈동자에서 붉은빛이 갑자기 꺼진다.
- 치명타! 29!
- 오크 돌격병에게서 ‘광란’ 효과가 사라졌습니다.
50%의 확률로 버프를 날려버리는 에픽 양손검, 패시파이어.
광란 효과로 공격 속도가 빨라졌던 오크가 다시 얌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