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7화 (1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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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미궁 (4)

Episode 6: 미궁 (4)

“뭐, 뭐야!”

이도협은 왼손으로 단검을 꽉 쥐면서 상반신을 일으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누, 누구냐!”

쥐 한 마리가, 투기장 가장자리의 빛과 어둠이 만나는 선을 따라 가로질러 달려갔다.

‘이런 비현실적인 공간에, 쥐라니. 날 놀리는 건가.’

다시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웠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하지도 않았는데 투기장 바닥의 하얀 조명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래. 도대체. 이 상태로 다음 방으로 움직이라고? 너무 하잖아.”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투기장 바닥의 조명이 완전히 꺼진다.

그리고 바닥이 늪으로 변한다.

세 번째 투기장에서 길게 쉬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다.

여기에서도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했다는 건지, 경고 사인이 시작되었다.

“흐읍!”

이도협은 심호흡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천천히 걸어가면 되겠지. 그런데 이 상태로 다음 상대와 싸울 수 있을까? 이제 뭐가 나올지 가늠이 되지도 않는다. 말로만 듣던 오우거라도 나오면 어떻게 하지?’

이도협은 왼쪽 다리를 끌면서 네 번째 경기장 바닥 바깥으로 몸을 움직였다.

하얀색 조명으로 밝혀진, 좁고 긴 길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한쪽 다리를 끌면서.

‘제발. 기적이라도 필요하다. 살려줘.’

그때, 거짓말같이 상태창이 켜지면서 메시지가 쏟아졌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1시간 내에 차원문이 소멸합니다.

-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뭐, 뭐라고? 던전을 깼다고? 누가?’

이도협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이 어느새 풀밭으로 바뀌었다.

*****

아홉 번째 상대까지도 엘리트 오크 경비병이었다.

강한 편에 속하기는 해도, 지금까지 상대해 본 적들이었다.

그런데 열 번째 상대는 오크 주술사가 나왔다.

그것도 오크 보병 둘을 데리고.

오크 주술사는 자기 부하를 폭탄이나 총알받이로 쓰는 아주 고약한 놈이다.

사악한 주술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오크 보병을 먼저 없애버려야 한다.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들고 왼쪽의 보병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아차!’

갑자기 생각이 났다.

말레도크의 미궁은 힘으로 때려잡는 던전이 아니다.

이준기는 달리던 발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러는 사이, 오크 주술사가 주문을 마쳤다.

양옆에 서 있던 오크 보병 둘이 동시에 광란 상태에 빠졌다.

대미지를 전혀 입지 않은 상태에서, 주술의 힘으로 광폭해진 것이다.

이준기는 침착하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 오크 척후병의 단검.

- 단검. 일반 등급.

- 2~10의 대미지. 공격속도 1.5초.

- 사용 효과: 오크를 상대로 투척할 경우, 치명적인 독에 중독시킵니다.

이준기는 단검을 꺼내 오크 주술사에게 던졌다.

- 오크 주술사가 ‘오크 척후병의 단검’에 적중하여 7의 대미지를 입었습니다.

- 오크 주술사가 ‘치명적인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 오크 주술사의 목숨이 10초 남았습니다.

‘이제 10초 동안, 도망만 다니면 된다.’

10초밖에 남지 않은 목숨에도, 오크 주술사는 살기를 내뿜으며 주술을 계속 시전했다.

광폭해진 오크 보병 두 마리가 이준기를 향해 달려왔다.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휘둘렀다.

패시파이어에 맞은 놈이 광란 상태에서 벗어나며 공격 속도가 느려졌다.

오크 주술사가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레르크 히돈 샤하페츠.”

‘이런!’

이준기는 뒤로 몸을 날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보급품 장갑을 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오크 주술사의 주문을 알아 듣고 반사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패시파이어를 맞고 광란 상태에서 벗어났던 오크 보병이 잠깐 멈칫하더니 통째로 폭발해 버렸다.

주술에 의해 강산성으로 변한 놈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가죽 갑옷 여기저기에 피가 튀어 구멍이 났지만, 다행히 피부에 직접 닿은 곳은 없었다.

‘사악한 놈!’

이준기는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서 패시파이어를 앞으로 휘둘렀다.

광란 상태로 달려오던 오크 보병이 패시파이어를 맞고 쓰러졌다.

이준기는 주술사와 보병으로부터 더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3초.

2초.

1초.

“끄으으윽!”

주술사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남은 건 체력이 반밖에 남지 않은 오크 보병 한 마리.

패시파이어로 가볍게 제압했다.

상태창이 켜졌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1시간 내에 차원문이 소멸합니다.

-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바로 이준기의 앞에,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다.

이준기는 차분하게 쓰러진 오크 세 마리의 시체에서 전리품을 챙겼다.

그리고 보물 상자로 다가갔다.

최소 레어라고 하니, 적어도 하늘색 빛이 새어 나올 것이다.

상자 덮개를 살짝 들었다.

연녹색 빛이 새어 나왔다.

에픽이다.

- 해안약탈자의 샌들.

- 신발. 에픽 등급.

- 물리 방어 1.

- 착용 효과: 이동 속도가 2% 증가합니다.

- 발동 효과: 피격 시 일정 확률로 이동 속도가 15% 증가합니다.

‘도망 잘 다니는 나에게 딱 맞는 템이군.’

*****

갈색 아르마니 정장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이도협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시시한 던전이라서 큰 뉴스거리는 못 되지만, 던전 뉴스는 늘 헤드라인 중 하나를 차지한다.

또, 매일 던전이 클리어되는 것도 아니므로, 지상파 3사를 비롯한 주요 방송국은 취재를 나왔다.

세 시간 내에 쓸어버리고, 나와서 점심을 먹겠다고 이도협이 큰소리를 쳤기 때문에, 기자들은 열두 시가 되기 조금 전부터 차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도협은 두 시가 한참 넘어서야 밖에 나왔다.

E급 던전을 가지고 시간을 끈 이도협에 대해 속으로 혀를 차던 최정윤이었지만, 기자회견을 통해 자초지종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아니, 이도협이 오히려 전보다 더 대단해 보였다.

“이런 변형 던전은 저도 말만 들었지, 처음이라서요.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래도, D급 던전이면 이도협 부회장님에게는 식은 죽 먹기 수준 아닙니까?”

“D급으로도 이 던전은 최상급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정도 던전을 D급이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C급 이상이죠.”

“C급이라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최고급 던전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게 많지는 않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다음 주에 연합 공격대의 레이드가 예정되어 있는 부산 해운대구 던전이 C급이죠. C급에 2층이니 현재까지 한국에 나타난 차원문 중에서는 최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박태군 구원자의 사망에 관해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던전의 급수가 올라가고, 파티원들이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각자 싸우다가 그렇게 됐다는 말씀이시죠? 이도협 부회장님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네, 그렇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투기장을 전전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열 번째 투기장을 처음으로 클리어해서, 던전이 해소된 겁니다. 파티원 중 한 명만 투기장을 끝까지 돌면, 던전이 클리어되는 조건이었으니까요.”

이도협은 조마조마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 겨우 입구 오두막에 도착했고, 자판기에서 힐링 포션을 무더기로 사서 마구 마셨다.

혹시나 해서 힐링 포션을 상처에 뿌려보기도 했다.

아무 효과도 없었지만.

그렇게 해서 상처를 전부 아물게 하고, 옷매무새도 고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던전 클리어 이후 주어지는 여유 시간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도협이 풀밭에서 일어났을 때, 김하영과 박태군도 옆에 있었다.

쓰러져 있던 김하영은 빈사 상태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박태군은 시체였다.

이도협은 먼저 자기 치료를 하고, 김하영에게 힐링 포션을 가져다 먹이기로 했다.

먼저 자기부터 구하는 것은 구조의 기본이다.

그런데 나중에 나타난 이준기가 김하영을 업고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이미 김하영에게 힐링 포션을 먹인 뒤였다.

그러니까, 이준기는 열 번째 투기장을 깨고도 힐링 포션이 남았다는 이야기.

여러 가지로 쪽 팔리는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이도협으로서는, 이준기의 입막음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상황으로 보아, 이준기가 던전을 클리어한 것이 분명했다.

이준기는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오두막에 들어왔다.

상처가 아물어가는 김하영을 눕히고는, 다음번 던전에서 쓰겠다면서 자판기에서 힐링 포션을 샀다.

보물 상자는 어떻게 됐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도협은 참았다.

그깟 보물 상자에서 무슨 아이템이 나왔는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준기 혼자 클리어한 던전에서 나온 아이템, 이준기가 갖는 것이 맞다.

게다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밖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을 기자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느냐였다.

다행히도, 이준기는 생각보다 훨씬 개념 있는 녀석이었다.

“부회장님, 오늘 던전은 부회장님이 깨신 걸로 기자회견을 해주세요.”

“응? 그래도 돼?”

“도중에 D급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제가 깼다고 하면 사람들 입방아에나 오르게 될 겁니다.”

“그래도, 준기 씨가 깬 거잖아.”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이 던전이 100% 개인플레이는 아닌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마지막 몹을 잡는 도중에, 녀석이 갑자기 퍽 쓰러졌거든요.”

“그래?”

“제 생각에는, 그 당시 각자 자신의 적을 공격하던 파티원들의 대미지 딜링이 합산되어 들어간 것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군.”

“그러니까, 저 혼자 쓰러뜨린 게 아니고 다들 힘을 합쳐서 쓰러뜨린 거죠. 그중 제일 기여가 큰 것은 당연히 부회장님일 거고요.”

“준기 씨 말을 듣고 나니, 상당히 설득력 있는 소리야.”

“그래도, 기자들에게는 그냥 부회장님이 단신으로 보스를 쓰러뜨린 걸로 하죠.”

“응, 그럴까?”

“각자 따로 공격하는데, 대미지가 합산이 되고, 뭐 이렇게 말하면 너무 복잡하잖아요.”

“···”

“원래 오늘 던전 파티는 부회장님 버스 파티이기도 하고요. 부회장님이 정리했다고 말씀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대미지 합산이라니, 27레벨이 될 때까지 수많은 던전을 다녔지만 듣도 보도 못한 소리다.

도중에 급이 바뀌고 모양이 바뀌는 변형 던전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개인별로 다른 적을 맞서 싸우는 스타일의 던전은 이전에도 겪어 봤다.

대미지 합산이라니, 이게 무슨 게임이라도 된단 말인가.

설사 대미지 합산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던전이 클리어되기 직전이라면 이도협은 다음 구역으로 움직이라는 경고 신호 때문에 아픈 몸을 억지로 끌고 걸어가던 중이었다.

최대한 천천히 걸어가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까지 하면서 말이다.

대미지 합산이라는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이도협이 기여한 부분은 있을 수가 없다.

‘이준기. 며칠 전에 6레벨로 길드에 들어와서 벌써 13레벨이다. 게다가 D급 던전을 별 부상도 없이 깨다니. 이런 놈이 적이 되면 큰일인데.’

협회장 자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권력 싸움에 변수가 생긴 것은 아닐까, 이도협은 불안했다.

*****

보물 상자에서 에픽 신발을 집어 인벤토리에 넣자, 이준기도 다른 파티원들과 마찬가지로 던전 입구의 풀밭으로 이동되었다.

죽어가는 김하영, 이미 죽은 박태군이 풀밭 위에 있었고, 이도협이 흘린 것이 분명한 피가 오두막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도협은 오늘 고생을 제대로 했나 보군. 아마 평생 본 적도 없는 몬스터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허세를 부렸다면 말이지.’

이준기는 인벤토리에 남은 힐링 포션을 꺼내 김하영에게 먹였다.

김하영은 헛소리를 하면서 공중에 팔을 내저었다.

팔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니 부러진 모양이었다.

정말 심각한 부상.

오크 주술사가 5초만 더 견뎠더라면 김하영도 죽었을 것이다.

박태군은 죽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피 색깔이 이미 검게 변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준기는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말레도크의 미궁’.

수많은 던전을 거친 이준기로서도 몇 번밖에 경험이 없다.

‘말레도크의 미궁은 던전 랭크가 의미가 없다. 어차피 그 사람에게 맞추어진 적들이 나타나는 거니까.’

상처가 아물면서 잠들어 버린 김하영을 업고 이준기는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이도협이 힐링 포션을 들이키고 있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허벅지와 어깨에 힐링 포션을 바른 모양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아르마니 정장에 핏빛과는 조금 다른 색깔의 힐링 포션 얼룩이 보였다.

“이, 이준기!”

“부회장님.”

“기, 김하영은?”

“잠들었습니다. 제가 힐링 포션을 먹였습니다.”

“힐링 포션이 있었어?”

“제가 좀 겁쟁이라서요. 힐링 포션은 많이 가지고 다닙니다.”

“그, 그게··· 그러니까, 그···”

이도협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질문을 토해내지 못했다.

이준기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두려워서 그랬으리라.

이도협, 한심한 놈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구원자가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세상에서 27레벨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그가 가진 오만과 허세는, 당연한 결과 아닐까.

생각했던 대로, 이준기는 이도협에게 던전 클리어의 공을 넘기기로 했다.

“부회장님, 오늘 던전은 부회장님이 깨신 걸로 기자회견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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