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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미궁 (3)
Episode 6: 미궁 (3)
“나 참. 오크가 말을 한다? 별 거지 같은 꿈을 다 꾸는군.”
“꿈이 아니라는 것. 너도 잘 알텐데.”
“하긴, 차원문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세상에 오크가 말 좀 한다고 이상할 것도 없지.”
“그래. 금세 수긍하는군.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하는데?”
“나는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 네가 솔직하기만 하다면.”
“이런 식의 던전은 처음이다. 들어본 적도 없어. 게다가 겨우 D급 던전에 오크 돌격병이라니. 게임 디자이너가 뭔가 잘못한 거 아냐?”
“안 웃긴다. 질문에 대답이나 해라.”
“그냥 널 죽이면?”
“방금 안 된다는 거, 확인했잖아? 설마 내가 죽는 게 네 소원이냐? 네 인생 소원이 겨우 오크 돌격병 죽이는 거야?”
“그렇다고 하면 네가 죽는 거냐?”
“소원은 딱 하나만 들어준다. 후회하지 말고 신중하게 선택해라.”
“하! 별 시답잖은 개소리를 들어보는군. 그것도 오크한테서.”
이도협은 쌍 단검을 거두어 허리춤에 찼다.
스트레스 해소도 하고 잘난 척도 좀 할 겸, E급 던전 버스 기사를 자원한 것인데, 난생처음 보는 아주 요상한 던전이다.
파티원들은 다 어디 가고 꿈속에서나 나올 이상한 미로를 헤매다가, 말하는 오크 돌격병과 철학을 논하게 될 줄이야.
‘내가 원하는 거라. 대형 길드 부길마씩이나 하는 내가 뭘 더 바라야 하나? 길마?’
“난, 별로 바라는 게 없는데?”
“그런 허접한 거짓말은 처음 듣는군.”
“대한민국 전체 랭킹 7위의 구원자다. 난, 돈도 있고 명예도 있어.”
“그래? 돈과 명예에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는 게 있다는 얘길 하는 거냐?”
“그렇다. 나 정도면 준수하지.”
“나는 거짓말쟁이를 상당히 싫어한다. 후회할 짓 하지 마라.”
“난 돈이나 명예 따위, 필요 없다. 네놈들 몬스터들을 깡그리 멸종시켜서, 인류가 다시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게 내 소원이다.”
“하하하! 너는 너 같은 놈이 희귀하다고 생각할 테지.”
“오크 놈이 뭐라 생각하든 내가 알 바 아니다.”
“알았다. 이제 네가 원하는 싸움이다. 덤벼라!”
이도협은 쌍 단검을 양손에 쥐고 오크 돌격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크 돌격병도 도끼를 치켜올리고 그를 향해 도약했다.
중후한 저음으로 인간의 말을 하던 오크가, 이제는 꾸웩거리는 전형적인 오크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
레벨 40이 된 박태군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좁다란 길을 따라가면 다시 투기장이 나왔고, 상대가 서 있었다.
구원자 정보 사이트에서 본 적도 없는 엄청난 괴수들.
거대한 양손 도끼를 들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 오는 오크 돌격병들은 물론, 키가 3미터는 돼 보이는 놀(gnoll)도 문제없이 때려잡았다.
화염구와 어둠의 화살을 마구 난사해서 순식간에 도전자를 쓰러뜨렸다.
드래곤이든 이프리트든 뭐든지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박태군 24년 인생에,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김하영은 두 번째, 세 번째 투기장에서도 귀여운 토끼만 만났다.
먼저 공격하지도 않고, 공격을 받으면 오히려 도망가기 바쁜 토끼들을 죽이는 건 기분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토끼를 잡지 않으면 다음번 투기장으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았다.
토끼를 잡고 루팅을 할 때마다 엄청난 골드가 쏟아져 들어왔다.
골드는 아이템과 달리 인벤토리를 차지하지도 않아 얼마든지 쓸어 담을 수 있다.
토끼 몇 마리를 잡고 벌써 수백 골드를 모았다.
골드를 원하는 구원자와 길드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에게 진짜 돈, 한국 돈 원화를 받고 골드를 팔면 된다.
이제 먹고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거나,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
이도협은 말도 안 되는 고생을 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D급 던전에는 나오면 안 되는 오크 돌격병을 만나더니, 두 번째 적으로 오크 주술사, 세 번째 적으로 놀 척후병을 만났다.
힐러도 없고, 힐링 포션도 충분하지 않다.
이러다 D급 던전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 척후병을 쓰러뜨리고 한 개 남은 중급 힐링 포션을 들이켰다.
상처가 아물어 가는 걸 보면서도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전투를 해야 하는 건가?
C급 던전에서도 한두 번밖에 만나지 못한 놀을 D급 던전에서 만나다니.
점심은 밖에 나가서 먹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박태군, 김하영, 아니 구원자가 아니라 일반인 행정직원인 최정윤에게도 쪽 팔려서 얼굴을 못 들게 생겼다.
아니, 그게 아니지.
죽으면 창피할 일도 없으니.
*****
‘이 던전, 다른 사람들은 고생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특히, 이도협.’
말레도크.
고블린 주술사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뭔가 심상찮은 존재가 틀림없다.
이 미궁에서 구원자들이 만나는 상대는 자신에게 맞추어진 상대들.
그래서 저레벨 구원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다.
‘그래도 죽는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이준기는 이 미궁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이 환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환영도 보통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구원자를 공격하고, 상처를 입히고, 죽일 수 있다.
죽으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미궁은 어쩌면 더 혹독한 던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섯 번째 상대로 오크 부두 술법사와 코볼트 졸개들을 처리하자, 투기장에 자판기가 나타났다.
이준기는 힐링 포션을 보충했다.
‘중간에 자판기가 나온다는 사실. 이런 것도 모를 테지. 지금쯤 어디까지 진행했을까, 다른 멤버들은?’
‘오크 학살자의 반지’와 ‘명예로운 적의 흉갑’의 효과로 인해 오크를 상대하기에 최적의 장비를 갖춘 이준기.
거기에 에픽 등급 양손검 패시파이어가 더해지니 사냥은 수월했다.
오크 상대 치명타율 57%.
오크 상대 물리 방어 5.
게다가 타격 시 50%의 확률로 적의 버프를 날려버리고 ‘둔화’를 거는 패시파이어.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이도협은 다음 주에 죽을 예정이다. 이도협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팔자보다 미리 죽는 것도 불쌍하지 않은가. 이 던전이 갑자기 D급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사기 던전, ‘미궁’으로 바뀐 것은 아마 나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준기는 다음 투기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파티원 중 한 명이라도 미궁을 탈출하면, 던전은 클리어된다.
‘그때까지만 버텨라.’
*****
열 번째 투기장에 도착하자, 오우거 마법사가 박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우거 마법사가 입을 벌리자, 한국말이 나왔다.
“여길 나가고 싶은가?”
“여기가 끝인가?”
“그래.”
“물론이다.”
“네가 가진 책을 전부 나에게 준다면, 나가게 해주겠다.”
“무슨 개소리냐. 책이라면, 내가 레벨업 해서 얻은 책들 말이냐?”
“그래. 불의 책, 어둠의 책, 마나의 책. 전부 다.”
“오냐. 불의 책, 어둠의 책, 마나의 책. 전부 다 맛보게 해주마.”
박태군은 의기양양하게 오우거 마법사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의 양손 사이에서 화염구가 나타나 크기가 커져갔다.
오우거 마법사는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
“화염구!”
박태군은 멋지게 외치면서 손짓으로 화염구를 날렸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염구를 바라보는 그저 바라보는 오우거 마법사.
화염구가 오우거 마법사에게 가까이 접근하자, 박태군은 양팔을 앞으로 뻗어 공기를 가르는 동작을 취했다.
날아가던 화염구가 반으로 나뉘어, 오우거 마법사를 지나쳐 뒤로 돌아갔다.
박태군이 오른손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을 취하자, 오우거 마법사가 서 있던 지점 주변의 땅이 솟아오르며 몬스터를 흙 창살 안에 가두었다.
둘로 나뉘며 몬스터를 지나쳐 날아갔던 화염구가, 다시 돌아와 오우거 마법사의 등 뒤를 강타했다.
그와 동시에 박태군이 양손을 모아 들어 올렸다.
그가 손을 내리자, 갑자기 하늘이 갈라지면서 거대한 용의 머리가 나타났다.
용이 입을 벌려 거대할 불길을 토해냈다.
“하하하! 오우거가 통째로 들어있는 감옥 모양의 도자기가 구워지겠군.”
몇 초 동안 화염을 뿜던 용의 머리가, 갈라진 하늘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공기 중에 검은 연기가 가득했다.
박태군은 기세등등하게 오우거의 시체를 루팅하러 걸어갔다.
검은 연기가 가시면서 오우거 마법사의 모습이 드러났다.
솟아올랐던 흙 창살도 없다.
처음 봤을 때처럼, 평소와 같은 크기의 투기장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오우거 마법사가 서 있다.
놈이 박태군을 노려보며 주문을 외웠다.
“므느신 음무르테.”
박태군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 뼘 정도 공중으로 떠오른 그의 몸 주변으로 그가 레벨업을 하면서 쓸어 담았던 책들이 떠올랐다.
붉은색, 검은색, 그리고 투명한 표지의 책들이 마치 태풍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박태군이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뭐, 뭐지, 이건?”
오우거 마법사가 입을 벌려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해머 같은 오른손을 앞으로, 박태군을 향해 뻗었다.
박태군의 몸을 휘감고 돌던 책들이, 오우거 마법사의 손바닥으로 하나씩 빨려 들어갔다.
한참 동안 그렇게 몸을 떨면서 공중에 떠 있던 박태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우거 마법사가 다시 한국어로 말했다.
“어때, 꿈은 즐거웠나?”
“이, 이럴 리가 없어.”
바닥에 주저앉아 현실 부정을 하는 박태군을 향해 오우거 마법사가 걸어왔다.
솥뚜껑 같은 오우거의 손바닥이 박태군의 머리를 붙잡았다.
머리를 붙잡아 박태군을 선 자세로 늘어뜨린 오우거 마법사가, 원래의 오우거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느므르친 믈르스트크치.”
머리가 뜨거웠다.
모욕이라도 당한 듯, 박태군의 얼굴색이 뻘겋게 변해갔다.
퍽!
머리가 터진 박태군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김하영도 열 번째 투기장에 도착했다.
또 토끼다.
그런데 이번에는 갈색 토끼가 아니라 흰 토끼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흰 토끼는 말을 했다.
처음의 갈색 토끼와 마찬가지로 한국말을.
“즐거웠나? 이곳이 마지막 관문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김하영은 망설였다.
“만족하나? 그 정도 골드라면 꽤 풍족하게 살 수 있을 테지.”
“아, 아니야. 겨우 열 번째인데, 벌써 끝이라고? 지금까지 모은 골드라 봐야, 돈으로 바꾸면 20억 원도 되지 않아. 겨우 그걸로 만족하라고?”
“20억 원이 적은가?”
“20억 원이 안 된다니까.”
“내가 부족한 금액을 채워서, 20억 원을 만들어주면?”
“말장난해? 20억 원 정도로, 서울에 번듯한 집도 한 채 못 사. 그런데 만족하냐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네가 여기서 모은 골드 중에, 정당하게 네 몫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얼마인가?”
“뭐, 뭐? 겨우 그딴 생색으로 내려고 소원을 들어주니 마니 한 거야?”
“정당하게 네 몫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냐고 물었다.”
“칫. 정말 치사하잖아! 그딴 낚시 질문을 하다니. 다 토해내라는 거야?”
“정당한 네 몫은 하나도 없다는 건가?”
“웃기지 마! 다 내꺼야. 소원을 정확하게 말한 것도, 미궁을 돌면서 골드를 모은 것도 다 나란 말야. 그런데도 그게 정당한 내 몫이 아니라고?”
“난, 네 생각을 물었을 뿐이다.”
“그래. 그게 내 대답이야. 다 내꺼야. 전부 다 내 정당한 몫이라고. 집 한 채 사지도 못하는 돈을 가지고 생색이나 내려고 하다니.”
“알았다.”
흰 토끼 위로 검은 실크햇이 떨어졌다.
“뭐야, 이거?”
실크햇 밑에서부터 땅이 부풀어 올랐다.
연기인지, 드라이아이스인지로 시야가 가렸다.
펑!
한순간에 연기가 사라졌다.
실크햇을 쓴 오크 주술사가 나타났다.
오크 주술사가 오른손의 마법 막대를 들어 그녀를 향하게 하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
던전과 어울리지 않는 갈색 아르마니 정장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저레벨들 버스 기사로 하급 던전을 돌면서 멋이나 잔뜩 부리려던 이도협의 계획이 완전히 엇나갔다.
네 번째 적이었던 놀 전사의 시체를 앞에 두고, 이도협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도저히, 도저히 더 이상은 앞으로 갈 자신이 없다. 죽고 말 거야. 힐링 포션이라도 챙겨둘걸.’
마지막까지 아껴 두었던 하급 힐링 포션을 마셨지만, 허벅지의 상처조차 다 아물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허벅지의 상처가 심각했다.
절뚝거리면서 걸을 수야 있겠지만, 평소에 주특기로 삼던 기술, 즉 단검을 들고 적의 뒤로 파고드는 그런 움직임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이도협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바로 옆에 놀 전사의 시체가 있었지만 한 걸음 옆으로 떨어질 기력조차 없었다.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은 개에게서 나는 냄새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까? 뭐 이따위 던전이 다 있지?’
그때, 어둠 속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