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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미궁 (2)
Episode 6: 미궁 (2)
“던전 클리어 경험치만 먹어서는 오늘 나온 보람이 없으니, 막타를 치세요. 몹이 나오면 거의 죽여 놓을 테니, 쓰러져서 죽어가는 녀석들 막타를 날리시라고요.”
“알겠습니다, 부회장님.”
첫 번째 상대가 투기장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냥 봐도 허약해 보이는 고블린 주술사.
작은 동물의 해골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구원자들에게는 지휘봉 크기에 불과한 마법 막대를 마치 지팡이처럼 땅에 짚고 있었다.
투기장에 안내 방송이 울렸다.
“첫 번째, 상대. 고블린 주술사, 말레도크!”
‘예상대로다. 이제 각자의 운에 맡기는 수밖에.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도협이 쌍 단검을 빼 들고 말레도크를 향해 달려 나갔다.
투기장 전체가 흰빛으로 가득 찼다.
압도적인 빛으로 시야가 완전히 마비되자, 이도협은 달리는 것을 멈췄다.
그를 보고 있던 파티원들도 눈을 가렸다.
빛이 사그라들자, 이준기는 어둡고 좁은 공간에 서 있었다.
혼자 서있기에도 비좁은, 마치 관을 세워놓은 것 같은 공간.
앞으로 문이 열렸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 조명으로 밝혀진 좁은 외길이 앞으로 나 있었다.
걸어갈 수밖에 없다.
상태창이 열리면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 던전 정보가 수정됩니다.
- 차원문 고유번호 08991. 랭크 D. ‘고블린 주술사 말레도크의 미궁’.
- 차원문 소멸 조건: 파티원 1명 이상의 미궁 탈출.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아이템 1개 이상.
- 퇴각 페널티: 없음.
말레도크의 미궁.
과거의 이준기는 10레벨 중반에 거쳐 갔던 곳이다.
이 유형의 던전에서 죽는 구원자가 의외로 많다.
퇴각 페널티도 없는데 말이다.
미궁을 헤매다 보니 어떻게 퇴각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죽어가는 것이다.
몬스터에게 죽는 경우보다 공포에 미쳐 죽는 경우가 더 많다.
파티원들은 지금 홀로 각자의 미궁을 헤매고 있다.
던전 정보가 수정되는 것을 보고 유망주 두 명은 이미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준비도 안 되었는데 D급 던전이라니.
길을 따라가니 첫 번째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좁은 길의 끝에, 격투기 경기장 만한 공간이 연결되어 있고, 오크 척후병이 단검을 든 채 기다리고 있다.
미궁에서 만나는 첫 번째 상대는 구원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레벨뿐 아니라, 장비 수준, 정신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에 죽여온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 상대가 정해진다.
8, 9레벨에 불과한 두 명의 유망주에게 나타난 첫 상대는 코볼트 내지 그 이하일 것이다.
쥐나 토끼 같은 비선공 몹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이도협은 지금 최소 오크 돌격병을 상대하고 있을 것이다.
이준기의 첫 상대가 고블린, 코볼트가 아닌 오크 척후병씩이나 되는 것은, 아마 그의 정신 상태 때문일 것이다.
80레벨에 오르고 조슈아 테일러에 맞서 싸웠던 그 모든 걸 이준기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오크 척후병이 한국말로 물었다.
“넌 뭘 원하는 거냐? 돈? 명예? 설마, 세상을 구하겠다는 망상에 빠져 있는 건 아니겠지?”
이준기가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복수다. 간단하잖아.”
“알겠다.”
그렇게 말하고, 오크 척후병은 단검을 치켜들고 이준기에게 달려들었다.
이준기가 휘두른 패시파이어에 맞고 ‘둔화’에 걸린 오크 척후병의 움직임이 굼떠졌다.
이준기는 단검에 비해 훨씬 긴 양손검 패시파이어의 리치를 이용해서, 오크 척후병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다.
패시파이어가 몇 차례 더 적중하자, 오크 척후병이 쓰러졌다.
이준기는 쓰러진 오크 척후병에게 다가섰다.
시체를 뒤져보니, 놈이 들고 있던 단검이 전리품으로 나왔다.
- 오크 척후병의 단검.
- 단검. 일반 등급.
- 2~10의 대미지. 공격속도 1.5초.
- 사용 효과: 오크를 상대로 투척할 경우, 치명적인 독에 중독시킵니다.
*****
박태군 역시 미궁에서 헤매고 있었다.
암흑 속에서 좁고 기다란 길을 따라 첫 번째 공간에 이르렀다.
격투기 경기장 만한 크기의 공간이 환하게 밝혀 있고, 쥐 한 마리가 가운데 서 있었다.
쥐가, 한국어로 말했다.
“넌 뭘 원하는 거냐? 돈? 명예? 차원문으로부터 이 세상을 구했다는 칭송을 듣고 싶은 거냐?”
쥐가 말을 하자, 박태군은 자기 뺨을 쳐봤다.
분명히 아프다.
차원문도 현실인데, 말하는 쥐라고 현실이 아닐 이유도 없지 않은가.
“대, 대답해야 하는 거야?”
“당연하다. 대답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려주마.”
박태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에 걸어온 길고 좁은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질문에 대답을 해야 다음 단계가 진행될 것 같았다.
박태군은 고민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돈을 원한다고 하면 안 될 것이고, 명예는 괜찮은가? 그것도 좀 께름칙한데. 칭찬을 듣고 싶다는 것도 이상하잖아?’
“셋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 거야?”
“네가 원하는 걸 말해라. 셋 중에 고를 필요는 없어.”
“그, 그래? 그렇다면 나는 레벨업을 하고 싶어.”
“레벨업을 원한다고?”
“응.”
“레벨업은 해서 뭐 하게?”
“레벨업을 해야 더 훌륭한 구원자가 되지.”
“그래? 훌륭한 구원자가 네가 원하는 거냐?”
“그, 그런가?”
“훌륭한 구원자란 뭐냐? 레벨만 높으면 훌륭한 구원자인가?”
“그,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네가 원하는 건 레벨업이 아니라 훌륭한 구원자가 되는 것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는 것이냐?”
박태군은 잠깐 고민했다.
명예라면 아까 세 가지 보기 중에 하나잖아.
어쩐지 그 셋 중에 하나로 하면 안 좋을 것 같다.
“아냐. 명예를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돈?”
“아, 아니다. 아냐.”
“그래? 돈이 싫다고?”
“아니, 싫다는 건 아니지만. 도, 돈이 목표는 아니라고.”
“구원자가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나?”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땡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지 뭐. 학교에서나 군대에서나 둔하고 어리버리하다고 괴롭힘이나 받던 나였는데. 갑자기 귀족이 됐으니.’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나?”
“아, 아냐. 복수라니. 난 그런 독한 성격이 아냐.”
“그럼 무슨 생각이 들었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 솔직히 말하면, 로또 됐다고 생각했지. 이제 인생 폈다고.”
“그래서 인생이 폈나?”
“아니. 내가 쳐다볼 수도 없는 레벨의 구원자가 우리나라에만 수백 명이 있더라고. 그중에 내가 꼬라비인것 같아.”
“그래서 레벨업을 원하는 거로군?”
“그,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건 우월감이냐?”
“아냐. 우월하다고 느끼기만 해서 뭐해. 진짜로 우월해야지.”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건 힘이로구나.”
“그래. 그거야. 내가 원하는 건 힘이다.”
“그래, 알았다. 덤벼라.”
그 말을 끝으로, 쥐는 다시 찍찍거리는 잡몹으로 돌아갔다.
더 이상 한국어는커녕 그 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않았다.
박태군은 쥐를 바라보았다.
쥐는 그저 자기 자리에서 찍찍거리기만 할 뿐, 그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쥐를 잡아야 다음 단계가 열릴 것 같았다.
박태군은 ‘오크 분쇄자의 검’을 꺼냈다.
지난주에 높은 레벨 구원자들의 도움으로 획득한 검이다.
죽어가는 광란 오크에게 막타를 날려서 얻은 것.
그걸로 쥐를 내리쳤다.
‘쥐의 사체에도 전리품이 있을까?’
잠깐 피투성이 쥐를 쳐다보던 박태군.
몸을 굽혀 쥐의 사체를 뒤졌다.
황금빛의 반짝이는 주사위 같은 것이 있었다.
그걸 집자, 박태군의 몸이 휘황찬란한 빛에 휩싸였다.
- 레벨 9가 되었습니다!
- 레벨 10이 되었습니다!
- 레벨 11이 되었습니다!
- 레벨 12가 되었습니다!
- 레벨 13이 되었습니다!
- 레벨 14가 되었습니다!
*****
같은 시간, 김하영 역시 첫 번째 공간에 도달했다.
갈색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를 반겼다.
역시 유창한 한국어로, 토끼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난 첫 번째 관문 지기다. 네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너를 도울 수 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말해라.”
잠깐 동안 벙쪄 있던 그녀는 말했다.
“이거, 알라딘의 요술램프 비슷한 건가? 소원을 말하라고?”
“네가 원하는 걸 말하는 거니까, 그렇게 볼 수 있지. 돈이라든가, 명예라든가 하는 거 말이다.”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
“그렇다.”
“하나만?”
“그렇다.”
“하나뿐이라면, 생각 좀 해봐야겠는걸. 그래도 돼?”
“난 영원히 기다릴 수 있다. 마음대로 해라.”
김하영은 생각했다.
한 달 전,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보이면서 구원자로 각성했다.
네이버 검색으로 자신이 구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그녀는 회사에 카톡으로 퇴사 통보를 했다.
- 안녕하세요? 저 김하영인데요, 더러운 회사에서 거지 같은 부장 새끼 비위 맞추는 일은 오늘로 그만두겠습니다. 잘 먹고 잘살아라, 개새끼들아.
당장 부와 명예가 손에 들어올 것 같았지만,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1레벨 구원자를 덥석 받아주는 길드는 없었다.
지원서를 보내면, 이런 카톡을 받고는 했다.
- 경찰이나 군대에 가서 레벨 좀 쌓고 오세요. 1레벨을 어느 길드가 받아줍니까?
경찰서에 갔더니, 의외로 환대를 받았다.
찾아간 바로 그 날, 서울경찰청장을 만나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엄청 궁한 모양이군. 길드에서는 쳐다보지도 않던 1레벨 구원자를 이렇게 환대하는 걸 보면.’
정부에서 관리하는 차원문은 기껏해야 5개 남짓.
차원문 발생 초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관리하는 척을 하는 것뿐이다.
사실 더 관리를 하려고 해도, 차원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구원자가 정부에는 없다.
5레벨만 되면 모두 사표를 내고 나가버렸다.
서울경찰청장도 김하영의 손을 꼭 붙잡고 당부했었다.
“경찰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쁨을 느껴봐요.”
오래는 개뿔.
육군 소속 5레벨 구원자가 지휘하는 파티에 껴서, E급 던전을 들어갔다가 퇴각했다.
E급 던전이라 퇴각 페널티도 없었다.
육군 소속 구원자가 핑계라도 대듯이 말했다.
“다들 처음에는 이렇게 레벨업 하는 거예요.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엄마가 해주는 밥만 먹고 다녀서 요리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자기가 휘두른 칼날이 코볼트의 목에 박히자 기겁을 하고 숏소드를 내팽개치기도 했다.
‘이런 거, 계속할 수 있을까?’
첫 책은 빛의 책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렇게 선택했다.
하지만 그건 잘한 선택이었다.
칼을 몇 번 휘두르고 나니, 도저히 백정 짓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러 하겠습니다. 스킬 트리 어떻게 찍으면 되나요?”
피가 싫어서 힐러가 되는 수많은 구원자들의 대열로, 김하영도 들어섰다.
“아직도 멀었나?”
기다리기 지루한지, 토끼가 턱을 손에 괴고 물었다.
“미리 질문 좀 해도 되나?”
“얼마든지.”
“지금 당장 세계 최고 레벨의 구원자가 되고 싶다. 이런 것도 되는 거야?”
“안 되는 건 없다.”
“우와, 정말?”
“그걸로 정한 거야?”
“아냐, 아냐. 잠깐만.”
김하영은 잠깐 생각했다.
거지 같은 게임회사를 다닌 것도, 지금 구원자를 하는 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먹고 살 걱정이 없다면, 목숨 걸고 던전에 들어올 이유도 없다.
D급으로 바뀐 던전에 왜 램프의 요정 같은 게 있는지는 모르지만, 소원을 들어준다는 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돈. 아주 많은 돈을 원한다. 평생 다시는 일을 안 해도 되게.”
*****
“이도협. 네가 원하는 건 뭐냐? 구원자는 왜 하는 거야?”
오크 돌격병이 물었다.
오크가 말을, 그것도 한국말을 하다니?
이도협은 입도 열지 않고 쌍 단검을 꺼내 돌격병을 향해 찔렀다.
그러나 같은 극 자석끼리 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칼날이 튕겨 나왔다.
“뭐야, 이거?”
“날 죽이는 건 조금 기다려라. 일단 질문에 대답하면, 원하는 싸움을 해주마. 이도협. 네가 원하는 건 뭐냐? 돈, 명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