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4화 (1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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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미궁 (1)

Episode 6: 미궁 (1)

“힐 감사합니다, 힐러님.”

이준기가 그렇게 말하자, 정이채가 기다렸다는 듯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대꾸했다.

“뭘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기쁘고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주 잘못된 힐의 전형이었다.

몬스터도 거의 다 잡아 위험도 없는 상황에서, 찰과상 수준의 대미지에 힐이 들어오니 황당했다.

‘그렇지만 정말 간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이었지. 이런 쪼렙 힐, 정말 오랜만이네.’

이준기의 머릿속에 마지막 전투 장면이 다시 재생되었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검은 책의 소나기 사이로, 힐러 길수연의 폭힐이 장대비처럼 쏟아진다.

힐을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레벨 식스, 아니 텐이시라고요?”

안상혁이 물었다.

“이제 폭약 터지고 던전 클리어되면, 레벨 11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 정말, 준기는··· 준기라고 불러도 되지?”

윤동직이 말하다가 멈추고 물었다.

“그럼요. 말 편하게 하십쇼, 탱커님.”

“동직이 형이라고 불러. 하하. 준기는 정말 천잰가 봐.”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당황스럽고요. 귀엽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형님. 잘 부탁드릴게요, 안상혁 딜러님, 정이채 힐러님.”

“하하.”

다들 겸연쩍게 웃었다.

파티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이준기도 마음이 놓였다.

진심으로 마음이 편해져서 웃는 웃음이 얼마 만인지.

“아까 그거, 그 양손검 구경 좀 시켜주겠어? 너무 멋있어서 말야.”

“아, 네. 물론이죠.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이준기는 패시파이어를 인벤토리에서 꺼내 손에 들었다.

“오오, 이런 무기가 있네요. 이게 겨우 에픽이라고요? 전설급 아니고?”

근접 딜러 안상혁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효과는 무시무시하지만, 대미지가 저렙 구간에서나 쓸 수준이라서 그렇죠.”

“대미지가, 평댐 20 정도 된다고 하셨던가요?”

“네.”

정말 그랬다.

패시파이어가 한손검이었다면, 대미지가 초라해도 탱킹용 검으로 손색이 없다.

그 조슈아 테일러라도, 이걸 맞고 ‘둔화’에 걸린다면.

그런데 그럴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 이준기는 잘 알고 있었다.

템빨로 승부가 난다면, 그건 더더욱 조슈아 테일러 측의 압승이다.

“이걸 어떻게 얻으셨다고요?”

“에픽 상자에서 나왔어요. 업적 보상인데, 내용은 좀 그렇긴 합니다만.”

“뭔데, 준기야. 궁금하잖아, 말해 봐.”

“던전 솔로잉이라는 업적입니다.”

“헉. 그런 게 있어요?”

“던전을 혼자 깨라고?”

그때, 광산에 설치된 폭약이 터지면서 폭발음이 들렸다.

파티원들의 상태창이 일제히 열리면서 안내문이 쏟아졌다.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 1시간 내에 차원문이 소멸합니다.

- 보물 상자가 생성되었습니다.

- 최소 레어급 아이템 1개가 보장됩니다.

이준기는 11레벨, 안상혁은 15레벨, 그리고 정이채는 12레벨이 되었다.

“동직 형님, 죄송합니다. 저만 아니었으면 19레벨 다시는 건데.”

“아냐. 괜찮아. 경험치 바 거의 찼어. 다음번에 던전 가면 곧바로 19레벨 달겠네.”

길드에서 윤동직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거짓말이다.

이번에 레벨업을 하지 못하고 다음 던전을 기다려야 하므로, 경쟁 중인 다른 탱커들에 비해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일단 말만이라도 그렇게 해주는 윤동직이 이준기는 고마웠다.

“상자, 열어봐야죠.”

“그래, 그래.”

지도에 표시된 대로, 광산 입구에 커다란 보물 상자가 있었다.

윤동직이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탱커이기도 하고, 유일하게 레벨업을 못한 윤동직에게 상자를 열어보는 작은 기쁨은 양보하는 것이 맞다고 모두 생각했다.

윤동직이 상자 뚜껑을 들어 올리자, 찬란한 하늘색 빛이 스며 나왔다.

“우와!”

파티원들은 상자에서 스며 나오는 아름다운 광채에 탄성을 질렀다.

이준기는 침묵을 지켰다.

‘아깝게 됐군. 연두색이나 황금색 빛이었다면 더 좋은 템이 나왔을 텐데.”

- 전리품을 획득했습니다.

- 80골드.

- 물의 보주.

- 목걸이. 레어 등급.

- 착용 효과: 치유 스킬의 효과가 10% 증가합니다.

- 사용 효과: 1분 내에 시전하는 치유 스킬에 소모되는 책이 곧바로 재생됩니다. 하루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으며, 매일 0시에 충전됩니다. 사용 시 1%의 확률로 아이템이 영구히 파괴될 수 있습니다.

“우와, 축하드립니다. 힐러님!”

모두들 정이채를 바라보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우왕! 고맙습니다. 레어템은 처음이에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이준기는 생각했다.

‘나도 15레벨이나 되어서 처음으로 레어템을 가져봤으니.’

골드는 똑같이 나누고, 던전 입구를 찾아 다시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이 차원문을 닫고 나온 시각은 오후 7시 20분경.

던전 정리에 이틀쯤 걸릴 거라고 판단한 기자들은 철수한 뒤였다.

하지만 직업이 직업인 만큼, 최정윤은 주차해둔 카니발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 안에 앉아, 저녁으로 사 온 샌드위치를 씹고 있었다.

갑자기 희푸른 차원문 밖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등 뒤에서 차원문의 크기가 급격하게 작아졌다.

최정윤은 차문을 열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윤동직 님, 이준기 님! 벌써 나오신 거예요? 안상혁 님, 정이채 님도!”

육군본부 비상대응팀 소속 중령이 그 모습을 보고 멀리에서부터 뛰어왔다.

비상대응팀은 차원문 사태 발생 이후, 육군본부에 신설된 차원문 대응 조직이다.

숨을 헐떡이며 그가 물었다.

“벌써 정리를 끝내신 겁니까?”

“네. 보고합니다. 차원문 09119 소멸합니다.”

상태창의 차원문 번호를 보고 읽으면서, 윤동직이 대답했다.

“구체적인 사항은 보고서로 작성해서, 일주일 내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중령이 멀어지자, 이준기는 최정윤에게 말했다.

“최 대리님, 저녁 함께 드실래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이준기를 보았다.

“네? 아, 어쩌죠. 저는 이미 샌드위치를··· 아니, 그게 아니라. 네! 같이 드시죠. 보고서도 써야 하니.”

“저녁은 제가 사드릴 테니, 저 차 좀 태워주세요.”

“엥? 차가 없어?”

윤동직이 놀라서 물었다.

“네, 부회장님이 억지로 떠넘긴 마세라티, 1억 5천에 팔았거든요.”

“누가 그런 돈이 있대?”

“길드에 되팔았습니다. 1억 5천만 원어치 골드를 받고 팔았어요.”

“뭣에다 쓰려고? 힐링 포션 사려고?”

“그럼요. 또 조만간 다른 아이템도 좀 사고.”

“아, 아이템. C급 던전부터는 던전 자판기에 아이템도 있다고 했지? 준기는 공부 열심히 하나 봐. 모르는 게 없네.”

“아, 정말. 깜빡할 뻔했네. 최 대리님.”

안상혁이 물었다.

“네?”

“이상철 딜러. 언제쯤 나왔나요?”

“네? 이상철 딜러님요? 어, 정말. 이상철 딜러님은 어디에?”

“네?”

파티원들이 일제히 최정윤을 돌아보았다.

“이상철이, 안 나왔다고요?”

윤동직이 최정윤의 양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네? 네. 저는 못 봤어요. 제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오셨을지도 모르긴 하니까, 육군 소속 분들에게 물어볼게요.”

*****

이상철의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시신 없는 구원자의 장례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가장 흔한 경우는 물론 던전 안에서 파티가 전멸한 경우다.

심한 부상을 입고 던전을 겨우 클리어한 경우에도, 시신을 미처 수습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던전을 클리어하고도 부상이 너무 심해 스스로 걸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그런 경우에도 클리어 후 1시간이 경과하면 차원문이 저절로 소멸되므로, 산 자는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차원문과 함께 소멸해 버린다.

누군가 산 사람이 시신을 수습해주지 않는 한.

그러나 지금은 경우가 너무 다르다.

파티원 네 명이 아무런 부상도 없이 나왔을 뿐 아니라,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던전이 클리어되었다.

위험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파티원 한 명이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

언론에서 탐낼 만한, 톱뉴스로서 흥행 가능성이 충분한, 그런 뉴스다.

‘지금은 그렇겠지. 이제 몇 달만 지나면 뉴스거리도 안되는 일상사가 되겠지만.’

결국 최정윤과 이준기뿐 아니라, 다른 파티원들도 저녁 자리에 함께 모였다.

통상적인 보고서라면, 이준기 한 명만 있어도 최정윤이 자료를 정리할 수 있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이상철 사망에 대한 설명, 아니 해명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상철 님이 팀워크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 파티에서 나가는 걸로 정리가 됐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상철이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것까지 봤는데, 결국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나가는 척하다가 그냥 던전 안에 남아 있었다는 얘기밖에 안 되네요.”

“처음부터 퇴각 페널티가 너무 크네 어쩌네 했잖아요. 대장님 기억하시죠?”

“아, 그렇군. 그래서 퇴각하지 않은 거구나. 겨우 ‘귀족의 롱소드’ 때문에?”

“수천만 원이나 하는 거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다시 합류하면 될걸. 어리석은 놈.”

그렇게 말하고 윤동직은 소주잔을 들어 한 번에 비워버렸다.

나가라고 했더니 죽어버렸다.

죄책감이든 아니든, 기분이 더러웠다.

“대장님, 아니 형님.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파티에서 나가라고 한 것,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결정이었어요.”

“그래요, 탱커님. 이상철 그분은 입에서 술 냄새도 심하게 났고, 또 가면서 시비까지 걸었잖아요. 그분이 잘못한 거죠.”

파티원들이 위로했지만, 윤동직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최 대리님, 갑자기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부탁 하나 하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윤동직 탱커님.”

“다음 주말에 있는 연합 공격대, 거기에 제가 나가게 좀 해주십시오.”

“네? 아, 그거요? 그렇지 않아도 부회장님 걱정 많이 하시던데. 아무도 지원자가 없다고.”

“그래요? 그럼 잘 됐네요. 제가 갈게요.”

“내일 그렇게 보고 올리고 결과 말씀드리겠습니다.”

*****

9월 4일 토요일 아침 8시 40분.

도봉산역에 도착한 이준기는 휴대폰 지도를 보면서 도봉산 입구를 올라갔다.

편의점에서 나와 아이스크림 한 보따리를 들고 뛰어가는 전경이 보였다.

전철역이 있는 ‘도봉로’에서 도봉산 쪽으로 빠지는, ‘도봉산길’이 완전히 통제되어 있는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도봉고등학교 바로 앞 큰길 한가운데에 희푸른 차원문이 넘실대고 있었다.

차원문이 생긴 이후로 휴교 중인 도봉고등학교.

학교 마당에 흰색 카니발이 주차되어 있다.

최정윤 대리가 이미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정윤 대리님.”

“이준기 구원자님! 벌써 오셨군요. 언제나 일찍 오시나 봐요.”

“지하철로 오니까요.”

“다들 곧 도착하실 거예요. 이도협 부회장님은 시간관념이 빠릿빠릿하셔서. 아, 저기 오시네요.”

회색 람보르기니를 필두로, 비싸 보이는 차 세 대가 차량 통제로 텅 빈 도봉산로를 질주해 들어왔다.

람보르기니가 인도 옆으로 차를 대려고 움직이자, 연석에 앉아 간식을 먹던 전경들이 곁눈질을 하면서 슬금슬금 옆으로 비켰다.

차문이 열리고, 이도협이 내렸다.

‘E급 던전이라면서, 이도협은 경험치도 못 먹을 텐데 왜 여길 오는 거지?’

이도협은 이준기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 있나’ 하는 표정이 아니라, 누군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기억을 해낸 모양인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내가 준 차, 어디 있어? 벤틀리였던가?”

“마세라티였습니다. 잘 모셔놨습니다. 제가 운전이 서툴러서.”

“운전이 서투르면 운전을 많이 해봐야지. 이렇게 통제된 길에서 연습하면 좋잖아. 구원자에게 딱지 떼려고 하는 정신 나간 놈도 없고 말야.”

최정윤 대리가 던전 공략 파티를 간단히 소개했다.

- 이도협. 27레벨. 충무공 길드 부회장. 딜러.

- 김하영. 9레벨. 힐러.

- 박태군. 8레벨. 딜러.

- 이준기. 11레벨. 딜러.

브리핑을 듣던 이도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11레벨? 레벨 식스 아니었어? 내가 기억력이 나쁘지 않은데.”

최정윤이 대답했다.

“며칠 전 배화여고 차원문 파티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래? 레벨업 꽤 했네? 오늘 준기 씨가 최저 레벨인 줄 알았더니, 원래대로 태군이 버스 태우는 날이 됐군.”

최정윤이 브리핑을 계속했다.

이도협 부회장이 직접 나왔기 때문에 저레벨 세 명은 그냥 따라다니기만 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이어서 차원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도협이 끊었다.

“그냥 흔해빠진 E급 던전이잖아? 브리핑이 뭐 필요해. 들어갈게.”

“커피도 다 안 드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이깟 E급 던전. 세 시간 내로 끊고 나와서 점심 먹을 건데 뭘. 커피는 그때 또 마시지.”

이준기는 상태창을 열어 던전 정보를 확인했다.

- 차원문 고유번호 08991. 랭크 E. ‘고블린 투기장’.

- 차원문 소멸 조건: 투기장 챔피언의 패퇴.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아이템 1개 이상.

- 퇴각 페널티: 없음.

‘고블린 투기장이군. 이도협 뜻대로 안 될 수도 있겠는걸.”

차원문에 입장하자, 입구의 베이스캠프, 오두막이 나타났다.

“이건 뭐, 던전 서너 개는 경험이 있을 테니 다들 알겠지? 보급품 챙기라고.”

다들 제대로 된 아이템이 없는 단계.

파티원들은 보급품 갑옷과 무기를 챙겼다.

이준기도 가죽바지라든가, 아직 제대로 된 장비가 없는 부위를 보급품으로 챙겨 입었다.

충무공 길드의 여자 유망주, 김하영이 물었다.

“식량도 사야 하나요?”

“식량은 무슨. 점심은 밖에서 먹는다.”

“부회장님 멋지세요.”

“혹시 모르니까 힐링 포션은 한두 개씩 챙겨. 하영 씨가 힐 하러 들어온 것도 아니고.”

다들 바깥으로 나왔다.

고블린 몇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걸 이도협이 빠른 속도로 치웠다.

굳이 기술을 쓸 필요도 없는 상황이지만, 이도협은 화려한 스킬을 써서 고블린들을 도륙했다.

“부회장님, 멋지십니다!”

다들 아부성 발언을 해댔다.

가만히 있으려니 뻘쭘해서, 이준기도 박수를 쳤다.

투기장이 나타났다.

턱시도를 차려입고 나비넥타이까지 맨 고블린이 한국말로 그들을 맞이했다.

“도전자들이시군요! 가운데로 입장하십시오!”

이도협이 비웃었다.

“도전자는 무슨.”

반면, 이준기는 이제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E급 던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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