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9화 (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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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4: 충무공 길드 (1)

Episode 4: 충무공 길드 (1)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 조슈아 테일러의 결계로 들어가기 전에, 언제 마지막으로 밥을 먹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조슈아 테일러와의 결전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의 본거지인 미국에서 벌어졌다.

물론, 조슈아 테일러가 만든 결계 안에서 벌어졌으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상에서 벌인 전쟁이 아니다.

우주 공간을 닮은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테니스장 만한 땅 조각 십여 개가 떠다니는 공간에서 싸웠다.

그러나 그 결계를 펴기 전, 조슈아 테일러의 거대 길드 ‘오버시어’와 이준기-헬렌 카자크 연합은 샌프란시스코 앞바다에 떠 있는 섬, 알카트래즈에서 만났다.

그 정도 길이를 날아서 건너지 못하는 녀석들은 죄다 바다에 추락하거나, 겁먹은 채로 다른 구원자들이 날아가는 걸 구경만 하고 있었다.

2킬로미터를 날아간다니,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면 구원자들조차 믿지 않을 것이다.

실상은 간단하다.

60레벨을 넘어가면, 대개의 구원자들은 날아가는 요령을 익히게 된다.

수퍼맨처럼 웃기는 포즈로 날아가는 게 아니고, 그냥 공중에 떠서 이동한다.

영화로 치면 닥터 스트레인지 느낌이랄까.

현재 2021년 8월 말 시점, 구원자들 중 최고 레벨은 헬렌 카자크.

겨우 37레벨이다.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은 아무도 모르고 있다.

‘나만 기억하는 미래다. 그걸 최대한 이용하지 않으면, 타고난 천재 싸움꾼이자 구원자들의 이기심을 등에 업은 조슈아 테일러를 이길 방법은 없겠지.’

오삼불고기 정식은 맛있었다.

쌀로 만든 밥을 언제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하얀 백미로 만든 밥이 입안에 착착 감겼다.

“어휴, 며칠 굶기라도 한 거야? 밥을 엄청 잘 먹네.”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공깃밥을 세 공기째 주문하는 이준기에게 말했다.

“이모님 하신 밥이 너무 맛있어서 그래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밥을 먹고 종로 골목길을 걸었다.

종로 타워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종각역 4번 출구, 보신각 바로 앞에도 차원문이 나타났었지. 9월 하순쯤이던가.’

예전에는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모든 기록을 모아놨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없다.

미래에 대한 모든 기억은 이준기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그걸 지켜야 한다.

종로타워에 도착해서 회전문을 통과하니 안내표지가 보였다.

공시족 시절에는 안경을 쓸까 말까 고민하던 이준기였지만, 구원자로 각성하는 순간 시력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지금도 10미터는 떨어져 있는 안내판이 잘만 보인다.

‘20층부터 23층까지가 전부 충무공 길드 사무실이군.’

엘리베이터에 올라 20층을 누르려고 하는데 눌리지가 않았다.

‘원래 이런 건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닫히려던 문이 열리면서 젊은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녀가 카드키를 대고 20층을 눌렀다.

그리고 이준기에게 물었다.

“몇 층 가시나요?”

“저도 20층에 갑니다.”

“혹시, 충무공 길드 분이셨나요?”

“가입, 허락해 주신다면 그렇게 되겠죠?”

그녀가 웃었다.

*****

“저는 최정윤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구원자는 아니고요, 그냥 사무직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여자가 명함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저는 이준기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커피 드세요. 2천만 원짜리 커피 머신이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엄청 비싸 보이는 커피잔.

그리고 종각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자랑하는 사무실.

구원자들의 금권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나중에 서울연합이 되고 나서는 최상층 스카이라운지조차 사버렸었지.’

길드 멤버들끼리 그곳을 ‘구내식당’이라고 부르면서 좋아하던 생각이 난다.

과연 돈 지랄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비하면, 돈 지랄 정도는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커피, 안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커피 엄청 좋아합니다.”

이준기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런데 우유는 없나요? 이대로는 좀 쓰네요. 라테 학파라서요.”

“아! 그러시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최정윤은 쟁반을 옆구리에 낀 채, 서둘러 회의실 문을 닫고 나갔다.

회의실에서 냉장고까지는 먼 모양이었다.

최정윤이 돌아오기 전에, 인상이 험악한 남자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도협입니다. 27레벨이고, 전문 분야는 불, 바람, 마나입니다.”

그가 이준기의 앞자리 의자를 빼 앉으면서 이야기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준기라고 합니다.”

“길드에 가입하시고 싶다? 그렇게 들었는데요. 맞습니까?”

“네.”

“각성은 언제쯤 하셨나요? 아니, 레벨은요?”

“각성은 좀 됐고요. 6레벨입니다.”

이준기는 얼버무렸다.

사실대로 말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는 상황이다.

“아! 6레벨! 상큼하시네요.”

“하, 하하.”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최정윤이 들어왔다.

“저, 우유! 필요하시다고 해서.”

최정윤이 쟁반으로 받치고 있던 1리터짜리 우유 팩이 공중을 날아 테이블 위로 착지했다.

이도협의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는 게 보였다.

‘어디서 장난질이냐. 목숨도 며칠 안 남은 녀석이, 허세하고는.’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뭔가 엄청나게 신기한 걸 본다는 듯이, 이준기는 눈을 크게 뜨고 날아오는 우유 팩을 바라보았다.

“우와, 부회장님 역시, 멋지세요.”

최정윤이 며칠 연습이라도 한 것 같이 능숙하게 대사를 쳤다.

“오! 이게 뭡니까?”

이준기는 놀란 척 하면서 물었다.

“텔레키네시스라는 스킬이죠. 염동력. 레벨업 하시면 익히실 수도 있을 겁니다. 아주 많이 레벨업 하셔야겠지만.”

마나 책을 다섯 권이나 잡아먹는 기술을 사무실에서 우유 옮기는 데 쓰는 걸 보면, 이도협은 오늘 중에 던전에 들어갈 일은 없는 모양이다.

“어째, 차는 뽑으셨어요?”

“네? 차요?”

“네. 차. 오토모빌.”

“자동차 살 거냐고 물으시는 건가요?”

“차가 없으시다는?”

“차는 없는데요.”

“어이, 미스 최. 내 방 서랍에 말야, 차 키 여러 개 있잖아? 그것들 좀 들고 와줘 봐.”

이도협이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는 최정윤에게 외쳤다.

“차 한 대 드릴게요. 계약금 조로다가.”

“네?”

이준기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물었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 어이가 없어서였다.

“레벨 식스 되셨다니, 이번 주말에 E급 던전 하나 정리하려고 하는데, 따라가시죠. 그냥 설렁설렁 다녀오시면 됩니다. 우리 길드 유망주 레벨업 겸, 장비 맞출 겸, 다녀오는 거거든요. 그냥 따라가셔서, 뒤에서 화염구 같은 거 가끔씩 쏴주시면 됩니다. 아차, 전문화가 어떻게 되신다고 하셨죠?”

“바람, 마나입니다.”

“어, 특이한 조합···이 아니고, 저랑 비슷하네요. 한참 멀었지만. 스킬 트리 조언 좀 해드릴까?”

“하, 하하. 나중에, 시간 나시면··· 바쁘실 테니까요. 하하.”

“레벨 식스 정도면, 우리 길드에서는 대환영입니다! 앞날이 까마득하기는 한데, 우리 길드는 뉴비들에게도 기회를 주자! 이런 게 모토거든요. 선배들도 많고 하니까 잘 배우세요.”

“길드 멤버로 받아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감사합니다.”

그때, 최정윤이 자동차 열쇠 다발, 아니 자동차 열쇠로 만든 공 뭉치 같이 생긴 것을 가지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녀가 그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이도협이 열쇠 더미를 손으로 휘적거리다가 하나를 집었다.

“음? 이거? 마세라티? 이거 괜찮아요? 자동차는 역시 키로 시동을 걸어야.”

“마세라티요?”

“자동차 메이커 이름입니다. 설마 모르신다는?”

“몰랐습니다.”

“이거, 꽤 괜찮아요. 이거 계약금 대신에 가지세요. 사실 엄청 비싼 건데. 공무원 연봉 한 10년쯤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면 살 수 있으려나?”

“가, 감사합니다.”

일단 준다고 하니, 이준기는 이도협이 던지는 자동차 열쇠를 두 손으로 받았다.

“계약서는 전자 문서로 보내드릴 테니까, 사인해서 다시 보내시면 됩니다. 볼펜 사인이 아니고 전자 사인이요. 읽어보실 일이 없으실 테니, 여기 미스 최가 구체적인 건 설명해 줄 겁니다.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입단, 축하합니다.”

이도협이 일어나면서 내민 손을, 이준기도 역시 일어나면서 맞잡았다.

이도협은 악수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가르쳐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맞잡은 손을 마구 흔들었다.

그가 나가자, 최정윤이 자리에 앉아 전자 패드를 꺼냈다.

“이준기 구원자님. 이도협 부회장님이 얘기하신 게 이 계약서고요. 내용은 제가 하나씩 설명해 드릴게요.”

계약금은 2억 원. 거기에서 마세라티값을 빼고 나머지 2천만 원 정도를 입금해 줄 예정이라고 최정윤이 설명했다.

마세라티값을 제하면 원래 한 푼도 남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빚을 져야 정상이지만, 수중에 돈이 없으면 박탈감을 느낄 테니 푼돈이라도 쥐여주는 거라고 했다.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 그게 뭔데? 장난하나?’

계약서 내용은 이준기가 기억하는 과거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차원문 봉쇄 수수료를 나누는 방법, 던전에서 얻은 전리품 분배 방법, 길드 멤버들 사이에서 아이템을 사고파는 방법 등에 관해서 시시콜콜하지만 상식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있었다.

과거에 이준기는 충무공 길드에 소속된 적이 없었으므로, 이런 조항은 본 적이 없었다.

“급행료라는 게 있네요?”

*****

총원 27명이나 되는 나름 대형 길드.

충무공 길드에는 웨이팅 리스트라는 게 있었다.

던전이 길드 몫으로 떨어지면, 누가 들어갈 차례인지, 그걸 정해두는 목록이었다.

그런데 양자가 합의할 경우, 순서를 바꾸거나 아예 자기 순서를 남에게 팔 수가 있다.

여기에서 오가는 금액을 계약서에서는 급행료라서 부르고 있다.

이도협이 이준기에게 E급 던전의 한 자리를 제안하기는 했지만, 주말까지는 아직 멀었고, 그에게는 돈보다 시간이 부족했다.

“저, 최정윤 대리님. 웨이팅 리스트랑 던전 목록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제 우리 길드 정식 멤버신데요.”

군소 길드가 새로 생기고 사라지는 속도가 빨라서 정확한 산정은 힘들지만, 소위 ‘한길협 내분 사태’ 이전에 한국에는 20여 개의 길드가 있었던 것으로 이준기는 기억한다.

‘국회 던전 1호’가 빠른 속도로 소멸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차원문은 모두 36개.

이준기가 주요 길드들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연합’에서 서브 탱커로 자리 잡은 이후였으므로, 그전의 사정은 잘 모른다.

길드 재편 초기, 서울연합과 노블리스는 각각 6개의 던전을 가지고 있었다.

‘몇 달 지난 후 시점이기는 하지만.’

“낼모레, 그러니까 수요일에 D급 던전 공략이 있는데 강찬성 이분이 아마 바꿔주실 거예요.”

“토요일에 제가 가기로 되어 있는 E급 던전과 바꾸신다는 거죠?”

“네, 아마도. 12레벨이시기는 한데, 위험한 거 별로 안 좋아하셔서. 연세도 있으시고.”

“포지션도 맞나요?”

“이준기 님과 마찬가지로 딜러세요.”

“제가 직접 연락 드리는 것보다는 최 대리님이 어레인지해 주시는 게 낫겠죠?”

“그럼요.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건데요.”

“좀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최정윤이 어딘가에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네. 그럼요. 그렇죠. 당연합니다. 네. 네. 감사해요.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들어가세요.”

“된 건가요?”

“네. 흔쾌하게 허락해 주시네요. 바꾸는 것도 아니고, 둘 다 그냥 이준기 님 가시라고.”

“급행료는요?”

“그냥 안 받으시겠다고 하시네요.”

“우와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겨우 6레벨이신데.”

“같이 가시는 분들이 쟁쟁하니 괜찮습니다. 저도 던전 경험이 좀 있으니까요.”

“네. 다른 분들은 괜찮다고 하실 거예요. 탱커 분이 18레벨이나 되셔서, 넷만 가도 된다는 분위기였거든요.”

“탱커 분 성함.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이 시점에 18레벨이라면 찾던 사람, 그러니까 김창수일 수도 있다.

그가 서울연합에 들어오기 전에 어느 길드였는지 모르는 게 문제다.

“탱커님 성함은 윤동직입니다. 빛, 흙 전문화시고요. 보통 말하는 신성 탱커 스킬 트리죠.”

역시, 김창수는 이 길드 출신은 아닌가 보다.

“길드에서 장터 같은 거 운영하나요?”

“그럼요. 뭐 필요한 게 있으세요?”

“네. 필요한 것도 있고, 팔고 싶은 것도 있고.”

“네? 뭘 파시게요?”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요.”

최정윤이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거, 부회장님이 아시면···”

“차를 준다고는 했지만, 계약금에서 깠으니 강매 아닌가요? 저는 저렇게 비싼 차 필요 없어요. 당장 잘 곳도 없는데 무슨.”

“길드 소유의 오피스텔이 있으니까 거기서 주무세요. 한두 달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마세라티. 좋은 찬가요? 길드 사람들 중에 누가 살 사람 있으려나요?”

“허걸. 좋은 차죠. 다들 외제 차는 한두 대씩 가지고 계시지만 가격만 맞으면 누구라도 사고 싶어 할 걸요.”

“그럼 매물로 좀 올려주세요.”

“얼마나 받으시려고요?”

“한 1억 5천이면 빨리 나가려나요?”

“저라도 당장 사고 싶네요. 돈만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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