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3화 (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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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회귀자 (2)

Episode 1: 회귀자 (2)

차원문 안쪽으로 뛰어든 이준기가 흙바닥 위로 엎어졌다.

자신의 뒤쪽, 그리고 전방 오른쪽으로 문이 하나씩 달린 허름한 건물.

전형적인 던전 입구의 대기 공간, 소위 ‘오두막’이다.

왼쪽 벽에는 철제 숏소드, 소형 방패, 가죽조끼 같은 기본 보급품이 비치된 선반이 있다.

선반 옆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자동판매기가 있다.

기본 식량 패키지와 힐링 포션을 판다.

던전에서 떨어지는 돈, 골드로 살 수 있다.

허구헌 날 보던 자판기, 돌아보지도 않던 자판기지만, 지금의 이준기는 자판기에서 힐링 포션 한두 개를 살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졸개들에게서 떨어지는 돈을 모아 살 수 있는 가격도 아니고. 이번 던전은 힐링 포션 없이 해야 한다. 최대한 맞지 않는 수밖에 없다.’

탱커로 최고 강자의 반열에 올랐던 이준기.

허구한 날 몬스터들에게 두들겨 맞는 게 일이었던 이준기에게는 색다른 도전이다.

‘1층짜리 D급 던전이지만, 1레벨 초짜 구원자에게는 엄청난 도전이다.’

바닥은 흙바닥이지만, 한쪽 구석에는 짚으로 만든 거적때기가 여러 개 있다.

지붕과 벽이 있고, 바닥에 깔고 누울 거적때기까지 있는 이곳.

던전 공략에 나선 구원자들에게 주어지는 아지트다.

무작정 들어오느라 확인하지 못한 차원문 정보를 보기 위해 이준기는 상태창을 켰다.

- 차원문 고유번호 09487. 랭크 D. 1층 구성. ‘부두 술법사의 오두막’

- 차원문 소멸 조건: 부두 술법사의 사망.

- 차원문 소멸 보상: 레어 등급 아이템 1개 이상.

- 퇴각 페널티: 인벤토리 물건 랜덤 1개 소멸. 레벨 업 이후 경험치 소멸.

갓 각성한 현재 시점에서, 아직 길드에 의해 점유되지 않은 던전은 대한민국에 이것 하나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무작정 달려 들어왔다.

이준기가 각성하기 직전에 생긴 차원문.

따라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다면 그 존재조차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준기는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아, 기록해두는 버릇이 있었다.

공시족 생활을 3년씩이나 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 구원자 각성 이후에도 이어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습관이다.

‘부두 술법사의 오두막은 가장 흔한 종류의 D급 던전 중 하나다. D급 던전 치고는 위험도가 높지 않지만, 그건 던전 난이도에 맞는 레벨이 왔을 때나 그렇다는 얘기고.’

이준기는 침을 삼켰다.

‘지금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런 종류의 던전, 즉 은둔자를 찾아 처단하는 형태의 던전은 공간도 넓고 몬스터의 숫자도 많다는 것이다.

빠르게 차원문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달갑지 않은 조건이다.

하지만 레벨업이 급한 이준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우선, 책부터 골라야지. 띵작으로.’

스킬창으로 전환된 화면 안에서 일곱 가지 색깔의 책들이 빙빙 돌면서 선택을 기다렸다.

- 빛, 어둠, 불, 물, 바람, 흙, 마나.

구원자는 1레벨에 한 권씩 책을 고른다.

그 책들을 폭발 시켜 얻는 마력으로 구원자들은 각종 스킬을 구사한다.

그러니까 책을 고르는 것은 스킬 조합을 고르는 셈이고, 기존 RPG 공식대로 말하자면 클래스, 즉 직업을 고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숨에 직업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성장해 가면서 조금씩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빛의 책을 첫 번째 책으로 고르는 바람에 고생했던 기억을 이준기는 떠올렸다.

절대다수, 50%를 훌쩍 넘는 사람들이 첫 책으로 빛을 골랐다.

어둠, 죽음, 흑마법이 강해 보여도 결국 이기는 것은 빛, 생명, 백마법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게임이든, 그런 공식을 오랫동안 보아온 사람들은 빛의 책 선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스킬 트리, 중요합니다. 하지만 처음 몇 권 이상하게 골랐다고 해서 망하고 그러는 것 없어요. 다만, 처음 책으로 빛의 책은 제발 좀 피해 주세요.”

“왜 그렇죠?”

“빛의 책 한 권으로 뭐 할 게 없어요. 빛의 책 한 권이면, 축복 스킬 쓸 수 있는데, 이건 나중에 공격대에서나 쓰셔야죠.”

“그럼 뭘 고릅니까?”

“빛만 아니면 다 좋습니다. 방어적으로 하시려면 흙이나 물, 원거리 공격이 마음에 드시면 어둠이나 불 고르세요. 바람과 마나도 좋습니다. 빛만 빼놓고 다 좋아요.”

“이준기 탱커님은 처음 책으로 뭘 고르셨나요?”

“저도 빛을 골랐습니다. 제 실수를 다른 분들이 반복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길드에서 갓 각성한 구원자들을 대상으로 하던 강의를 떠올렸다.

첫 번째 책은 제발, 빛의 책만 아니면 좋으니 다른 것을 좀 고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갓 각성한 그들은 대개 첫 번째 책을 마음대로 고르고 난 뒤에 길드 사무실에 도착했다.

대개, 빛의 책으로 말이다.

‘물리 대미지를 충분히 입힐 자신이 있다면, 마나를 고르는 것이 좋지. 100% 추가 대미지가 들어가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이나 어둠이 좋다.’

이준기는 마나의 책을 골랐다.

화면 안에서 빙빙 돌던 일곱 개의 책 중에서, 투명한 표지의 책이 튀어나와 이준기의 몸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사라졌다.

다음은 기본 보급품을 챙겨야 한다.

던전 입구에 기본 물자가 비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빈손으로 들어온 것이지만, 오두막에 비치된 무기들은 조잡하기 그지없는 싸구려다.

아마 이번 던전에서만 쓰게 될 물건들.

하지만 그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이준기는 물론이고 최초로 차원문 봉쇄에 성공했던 헬렌 카자크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던전 안으로는 던전 바깥의 물건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

인벤토리에 물건들을 가지고 다닐 수 있지만, 던전 안에서 획득한 물건을 넣어 놨다가 다른 던전에서 꺼낼 수 있을 뿐이다.

던전 안에서 획득한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딱 하나 더 있는데, 그게 바로 ‘결계’다.

구원자들은 결계를 쳐서 이 세상과 분리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결계의 모양은 구원자들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구원자가 직접 고르는 모양은 아니다.

구원자들의 어떤 내적인 특성에 따라 정해진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준기와 동료들이 조슈아 테일러의 군단에 맞서 싸웠던 곳도 조슈아 테일러가 만든 결계 안이었다.

조슈아 테일러가 만드는 결계의 이름은 ‘황천의 공허’.

그의 동료들에게도 적들에게도 유명한, 매우 특이한 모습의 결계다.

우주와 같이 어두운 공간 안에 섬 모양으로 생긴 땅 조각들 십여 개가 공중에 떠 있는 모양이다.

‘조슈아 테일러. 지금이라면 각성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군.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전체 구원자 중 톱레벨이 되겠지만, 아직은 헬렌 카자크 등 초기 각성자들에게 밀려 2위권 그룹에 있을 것이다. 내가 각성할 당시 헬렌 카자크가 37레벨이었으니까, 조슈아 테일러도 30레벨대 초중반 정도겠지.’

이준기는 빛의 책에 거의 몰빵하다시피 한 탱커였다.

언제나 롱소드와 방패를 들고 싸웠다.

그렇게 싸운 결과, 결국에는 조슈아 테일러와 그의 군단에 철저하게 발렸다.

탱커는 철저히 팀 플레이어다.

혼자라면 레벨업 하기조차 대단히 버겁다.

‘어쩌다 탱커를 선택했을까. 경찰 지망생이라서?’

이준기는 숏보우를 골라 들고 화살통에 화살을 20개 정도 담았다.

‘화살을 많이 들고 가 봤자 무겁기만 할 뿐이다. 어차피 저레벨 몬스터 둘 정도를 잡으면 레벨 2가 된다. 그때까지 화살을 20개나 쓸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준기는 활과 화살 외에도 부싯돌과 숏소드, 그리고 작은 방패 하나를 챙겨 넣었다.

1레벨이라 인벤토리도 작았지만 가진 게 없어서 공간이 남아돌았다.

숏소드는 일단 칼이니까,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다.

숲길을 걸어갈 때 길을 막는 나뭇가지를 쳐내기에도 좋고, 가죽조끼에서 실밥이라도 풀리면 잘라내는 데도 쓸 수 있다.

활과 화살로 사냥한 몬스터가 죽어갈 때, 화살을 아끼면서 막타를 날리기에도 좋다.

작은 방패는 몬스터에게 노획한 식량을 익혀 먹을 때 냄비 대용으로 그만이었다.

기본 식량 패키지를 살 골드조차 없어 식량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들고 왔다.

*****

구원자로 각성하는 행운을 가진 사람들이 희귀하기는 해도, 대한민국 인구는 5천만이나 된다.

매일 한국에서만 대여섯 명,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이 각성한다.

기존의 각성자들에게 그들은 동료이기도 하지만 경쟁자이기도 하다.

이준기가 각성할 당시, 한국 땅에만 구원자가 500명가량 있었다.

길드 전쟁이 본격화된 다음에는 1레벨 구원자라도 가입할 길드를 골라잡을 수 있었다.

패싸움에 쪽수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니까.

하지만 길드 전쟁 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던전 공략에 필요한 인원 이상으로 길드 멤버를 모을 이유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갓 각성한 1레벨 구원자 뒤치다꺼리라니, 귀족이나 다름없는 구원자들한테는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다.

차원문 관리도 비교적 안정화되었고, 구원자들끼리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전인 지금이야말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새롭게 각성하는 1레벨 구원자들에게는 단연 최악의 시기였다.

길드에 자리도 부족할 뿐 아니라, 어떻게 길드에 가입하게 된다 하더라도 매우 불공정한 계약서를 써야 했다.

‘경찰 특채를 덥석 받아들였던 나도 한심하지만, 그땐 정말 그럴 만한 상황이었지. 이틀이 되도록 그 어떤 길드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예전에 허비해버렸던 이틀이라는 시간.

절대 흘려버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시간이지만, 들어갈 던전이 없다.

아직 점유되지 않은 차원문을 몰래 들어오는 방법 외에는 던전에 진입할 방법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이준기로서는 지금 이 던전을 최대한 이용해서 자신의 몸값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예전의 이준기는 경찰 공무원 자격으로 랭크 E 던전을 한 번 들어갔었고, 3레벨까지 레벨업 한 후에 관악구를 근거지로 하는 소형 길드, ‘관피아’에 스카우트되었다.

작은 길드에서 선배들 뒤치다꺼리나 하던 그때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빠르게 20레벨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길드 전쟁 때 총알받이가 되지 않으려면.’

물론 이런 말은 스스로 하는 다짐의 말이라고 해도 과장이 심한 것이다.

한반도에서 길드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이준기는 이미 탱커 계의 가장 촉망받는 신예로 명성이 높았다.

길드 전쟁 전후로 그에게 쏟아졌던 스카우트 제의들.

총알받이가 될 운명은 그때도 아니었다.

‘부두 술법사라면 오크 족이다. 코볼트 족의 영혼을 속박해 노예처럼 부리는 것이 그들의 부두 술법이지. 따라서 최종 공략 대상은 부두 술법사와 코볼트 부하들이다.’

던전 입구의 오두막을 나가자,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오크들이 ‘바레도’라고 부르는 나무들의 숲. 고블린들의 주요 서식지다. 늑대나 곰이 있을 수도 있고.’

지구의 나무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나무, 게다가 쭉쭉 높게 뻗은 나무들의 커다란 줄기와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는 보랏빛이 섞여 있었다.

이런 풍경을 카메라로 잘못 찍었을 때 나타나는 색수차 현상이 현실에 구현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생경한 경치만으로도, 초보 구원자들은 겁을 집어먹는다.

‘이 공간을 만든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지구와 다른 물리 법칙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조슈아 테일러가 창조한 결계가 더 생경하지.’

이준기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최대한 느리고 고르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 파티를 끌고 길 안내를 도맡아 했던 탱커, 이준기에게 몬스터 탐지는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었다.

‘오크, 코볼트, 고블린 같은 인간형 몬스터들은 시력과 청력이 좋지 않다. 후각도 민감하지 못하지. 그들이 무서워지는 것은 밤이 되었을 때다. 그들의 야간시력은 적외선 망원경조차 넘어선다. 낮에는 높은 기온으로 적외선 시야가 방해받지만, 밤에는 그런 게 전혀 없으니까.’

다행히도, 아직은 낮이다.

뜨거울 정도로 더운 한낮.

조금 시간이 지나자 멀리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운이 좋다. 혼자 다니는 고블린이다.’

이준기는 아주 느리게 들숨과 날숨을 한 번씩 쉬면서 고블린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이다.’

이준기는 고블린을 향해 겨누고 있던 화살을 손에서 놓았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경쾌하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휙!

날아간 화살이 고블린의 오른쪽 어깨에 박혔다.

“끼익!”

성난 고블린이 비명을 지르며 이준기가 숨어 있던 나무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준기는 침착하게 두 번째 화살을 날렸다.

휙!

두 번째 화살이 고블린의 왼쪽 허벅지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달려오던 고블린이 앞으로 엎어졌다.

‘이렇게 쉬울 줄이야. 스킬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정도군.’

고블린은 꿋꿋이 일어나서 다시 이준기를 향해 달렸지만, 세 번째 화살이 그의 오른쪽 정강이에 와서 박혔다.

“히이이익!”

고블린이 공포에 사로잡혀 도와달라는 의미로 비명을 질러댔다.

‘적어도 주변 50미터 내에 고블린이라고는 없다. 안됐지만 혼자 돌아다닌 대가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준기는 네 번째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고블린의 목덜미에 박혔다.

이준기는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 고블린에게 다가갔다.

죽어가는 고블린이 이준기를 쳐다보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위협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고블린에게는 손에 든 숏소드를 휘두를 힘조차도 없었다.

이준기는 손에 든 검으로 죽어가는 고블린의 고통을 끝냈다.

- ‘최단 시간 첫 킬 달성’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구원자로 각성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첫 킬을 달성했다.

앞으로 각성자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길드가 나타나면, 이 기록은 깨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중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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