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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커가 민첩을 끝까지 찍음-1화 (1/248)

Prologue: 최후의 전쟁

Prologue: 최후의 전쟁

세상이 박살 났다.

전 세계에 차원문이 열리고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찰력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각국 정부는 군대를 동원했다.

로켓포와 탱크의 화력 앞에 몬스터들은 쓰러졌다.

하지만 그들이 튀어나온 차원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차원문이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채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어떤 정부는 심각하게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차원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탱크는커녕 병사 한 사람도 진입할 수 없었던 차원문으로, 그 사람들은 잘만 들어갔다.

차원문으로 들어갔던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밖으로 나왔고, 어떤 이들은 아예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차원문을 봉쇄하고 나왔다.

“차원문 04827 소멸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차원문을 걸어 나온 23세의 영국인, 헬렌 카자크가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차원문이 작아지면서 소멸해갔다.

2019년 6월 19일, 최초의 차원문 봉쇄가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날 이후, 전 세계에서 차원문들이 하나둘 소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원문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봉쇄되는 차원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차원문이 열렸다.

그렇게 세상은 차원문과의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

영국 정부가 헬렌 카자크를 MI6 특수요원으로 발탁한 것을 시작으로, 각국 정부는 구원자들의 특채에 나섰다.

구원자들은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구원자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지위와 명예, 무엇보다 보수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

2020년 4월 4일, 미국의 구원자 존 백스터는 5명의 구원자 동료들과 함께 펜타곤을 나와 그들만의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길드의 시작이었다.

존 백스터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세운 길드, ‘남부의 힘’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서 미국 내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집단 중 하나가 되었다.

차원문 처리를 구원자들에게 맡겨야 하는, 그래서 구원자들의 호의를 구걸해야 하는 각국 정부는 길드에 간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잇속에 밝은 굴지의 대기업들이 구원자들의 후원에 나섰다.

전대미문의 위기에서 세계를 구원하는 이들의 이미지보다 소비자들의 환심을 살 만한 것이 달리 있을까?

구원자들은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들었고, 세력 확장에 힘을 쏟는 길드들은 결국 서로를 장애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지적인 알력 다툼으로 시작된 길드 간의 무력 충돌은 점차 맹렬해져 갔다.

작은 길드들은 서로 합치거나 더 큰 길드에 병합되었고, 거대 길드들은 서로에게 명시적으로 적대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동부연합 대 서부연합의 전면전이 발생했고, 중국에서는 홍콩-상하이 연합이 북부연합에 선전포고를 했다.

몇 달에 걸친 길드 세계대전으로 구원자의 99%가 사망했다.

이때, 조슈아 테일러가 등장했다.

“구원자들이야말로 인류의 최종 진화형이다. 우리끼리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 구원자들끼리 세계 연합 정부를 만들어 인류를 지배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차원문의 위협에서 인류와 지구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살아남은 구원자들의 대다수가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상.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구원자들 중 많은 수가, 이미 군대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들이 세계 지배를 꿈꾸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모든 구원자들이 조슈아 테일러의 생각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조슈아 테일러는 반대파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각개격파 당하며 죽어가던 구원자들은 하나로 뭉쳐 조슈아 테일러에 대항했다.

*****

헬렌 카자크의 가녀린 몸이, 공중에서 자유 낙하해서 땅바닥으로 무자비하게 내리 꽃혔다.

그녀의 왼손에서 오렌지색으로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불꽃 마녀라는 별명이 아깝구나, 헬렌! 내 편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조슈아 테일러가 득의양양해서 소리쳤다.

수십 권의 검은 책들이 그를 둘러싸고 돌고 있었다.

심연과 같이 검은 공간에 떠 있는 몇 개의 섬.

그중 하나의 땅 조각 위에서, 이준기는 자신에게 집중되는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전기 충격, 화염구, 매직 미사일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왼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빛의 방패로 그는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네놈이 마지막이다, 이준기. 항복해라. 내가 부와 명예를 약속하마.”

검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선 채로 날아온 조슈아 테일러가 사뿐하게 착지하며 말했다.

“전 세계가 우리의 것이다. 너에게는 특별히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네놈의 재능이 아까워서 그런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조슈아 테일러가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준기를 공격하던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공격을 멈췄다.

“가족과 친구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내가 어떻게 너의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겠냐?”

그렇게 외치는 이준기의 오른손에 강렬하게 흰색으로 빛나는 망치가 나타났다.

5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서 있는 조슈아 테일러를 향해, 그는 있는 힘껏 망치를 내던졌다.

조슈아 테일러의 주위를 빙빙 돌던 검은 책 몇 권이 날아오는 망치를 향해 돌진했다.

하얀빛으로 빛나던 망치는 허공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말이 안 통하는 놈이로구나.”

금발벽안의 미청년, 조슈아 테일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아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네놈은 죽어서 나를 섬기게 될 것이다.”

조슈아 테일러가 양팔을 치켜들자, 그의 주위를 빙빙 돌던 수십 권의 검은 책들이 일제히 이준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왼손에 이어, 이준기의 오른손에도 빛의 방패가 켜졌다.

양손의 방패가 날아드는 검은 책들을 튕겨냈다.

검은 책이 빛의 방패에 닿아 산화할 때마다, 양손의 방패도 빛을 잃어갔다.

오른손, 그리고 왼손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이준기는 상태창을 보았다.

더 이상 남아 있는 빛의 책은 없었다.

“하하하하하!”

조슈아의 웃음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갈랐다.

검은 책 하나가 날아와 이준기의 가슴에 박혔다.

“크윽!”

보호막이 사라진 그를 향해, 공중을 떠돌던 검은 책들이 하나둘씩 연이어 날아들어 그의 가슴을 향해 돌진했다.

입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이준기가 바닥에 쓰러졌다.

초점이 흐려지는 그의 시야에, 조슈아가 그를 향해 다가오며 사악한 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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