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사라 아가씨는 몸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인간을 흡수해야 하는 그 성질까지 이어받았습니다.”
“…….”
“루퍼트 님도 이미 알고는 계셨겠지요?”
“나도……. 처음에는 몰랐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지.”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마스 님처럼 지속해서 인간을 조달받아야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차마 루퍼트 님에게 말할 수는 없었겠죠. 아무리 당신이 우리 쪽에 협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사라 아가씨는 루퍼트 님 몰래 저를 찾아와 저희를 돕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인간을 조달받았죠. 그것은 하마스 신님의 충복으로서 행동하는 것의 일환이기도 했을 겁니다. 어찌 된 일인지 어젯밤은 제물이 될 인간들이 들어왔음에도 사라 아가씨가 교단에 머물지 않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 버리셨지만요.”
“지금까지 잘도 내 딸을 이용했군. 나에게는 단 한 번의 언질도 없이.”
“말했으면 허락해 주시지 않았겠죠. 저희 역시도 사라 아가씨가 필요했습니다. 좀비들을 하수인으로 부리고 있었지만,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그런 끔찍한 일에 내 딸을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하마스 신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 아가씨가 돌아가시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셔야 했겠지요.”
그 말에 루퍼트는 말없이 헤스컴을 노려보았다.
“지금 자네의 이야기를 듣더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어.”
“뭐죠?”
“자네의 말대로라면 사라는 지금까지 하마스 교단에 지속적으로 협조를 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사라가 우리 몰래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방을 비우는 것은 불가능해. 사라의 상태가 괜찮은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확인하고 있으니까.”
“그건 그렇군요.”
그 부분은 헤스컴 역시도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에게는 나름의 방비책을 세웠다고 했는데, 저도 정확히 들은 것은 없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헤스컴은 손을 들어 루퍼트를 가리켰다.
“저는 그 방비책이라는 것이 바로 루퍼트 씨 당신이 숨기고 있는 무언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숨기는 것이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하지?”
“저는 이전부터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라 아가씨가 처음 하마스 신님의 축복을 받았을 때 아가씨의 몸은 크게 호전되었지만 계속해서 휠체어를 이용하셔야 했죠. 그렇지만 나중에 저를 찾아오셨을 때 사라 아가씨는 멀쩡하게 걷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걷는 수준이 아니라 하마스 신님에게서 받은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더군요. 짧은 시간에 그렇게 극적인 변화가 있으려면 제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매개체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게 대체 무엇인지는 저도 궁금하더군요.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짚이는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네에게 말해 주어야 할 의무는 없을 듯하군.”
“그렇군요. 일전에 헌금을 줄이겠다고 엄포를 놓으셨던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이제는 하마스 신님을 통하지 않고도 몸을 치유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으셨겠죠.”
헤스컴은 분노가 스며있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하마스 신님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주제에 말입니다.”
“자네들 말대로일지도 모르지.”
루퍼트는 뜻밖에 순순히 인정했다.
“저 지하에 있는 하마스 신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아니 저 괴물이 진짜 하마스 신인지조차도 알 수 없지만, 그의 힘 때문에 사라를 잃지 않을 수 있었지.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야.”
루퍼트는 주먹을 꽉 쥐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라는 너무나 달라졌어. 어떨 때 보면 내가 알던 딸이 아니라 아주 다른 존재로 보이기도 하지. 나는 그저 내 딸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했을 뿐인데.”
“그것은 루퍼트 님이 믿음을 잃으셨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의 기도로, 단 한 번의 헌신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겠죠. 지금은 모든 것이 올발라지기까지의 중간 과정일 뿐입니다. 여기서 멈추게 되면 제대로 된 결실을 얻을 수가 없죠.”
헤스컴은 루퍼트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루퍼트 님이 주신 배는 어젯밤에 다 불타 버렸습니다. 루퍼트 님은 이제 새로운 배를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그 끔찍한 짓거리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란 말인가?”
“외부에서 제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제물을 이 도시에서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루퍼트 님은 그런 것을 원하시는 겁니까?”
“날 협박하는 건가?”
“협박이요? 이 정도는 협박이라고 볼 수 없죠. 진짜 협박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헤스컴은 루퍼트의 어깨를 꽉 쥐었다.
“루퍼트 님은 벨루드 씨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헤스컴의 말을 들은 루퍼트의 눈이 켜졌다.
“설마 네놈…….”
루퍼트가 분노를 터뜨리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헤스컴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교단 건물 한쪽의 기둥 쪽에 머물렀다.
벨루드가 교단으로 찾아와서 루퍼트가 가져온 헌금을 빼앗아 나가 버렸을 때 헤스컴은 같은 기둥의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확인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지만.
헤스컴은 루퍼트를 놓아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문제의 기둥 쪽으로 다가갔다.
휙!
헤스컴은 기둥의 뒤쪽으로 넘어갔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누군가가 그 기둥의 뒤쪽에 숨어 있었다.
시종장이 확인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루퍼트의 저택에서 졸고 있던 데스티나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침입자인가.”
헤스컴이 데스티나를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그는 자신의 목에 닿는 칼날을 느낄 수 있었다.
헤스컴은 자신의 뒤쪽에서 어떠한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었기에 꼼짝없이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꼼짝 마.”
서바이벌 나이프를 든 채로 헤스컴의 뒤를 제압한 주환은 헤스컴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당신은 칼데브의 영주대행이시로군요.”
“그래. 그리고 저쪽은 성전기사단의 단장인 데스티나지.”
데스티나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숨어 있는 기둥 쪽에서 걸어 나왔다.
“이곳은 성전기사단에게 포위되었다. 이제 그 악행을 멈추도록.”
데스티나는 더는 성전기사단의 단장이 아니었으며 밖을 포위하고 있는 성전기사단도 없었지만, 그녀는 헤스컴의 기를 제압하기 위해서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자네들.”
헤스컴도 예상을 하지 못한 일이지만 주환과 데스티나가 갑자기 나타나자 놀란 것은 루퍼트도 마찬가지였다.
“자네들은 분명 저택에 남아 있었을 텐데.”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자는 척하다 몰래 뒤를 밟았던 겁니다. 그랬더니 예상대로의 상황이 벌어졌더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한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단 말이로군.”
“네. 확실한 증거를 잡으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주환의 이야기를 듣던 루퍼트는 헤스컴에게 소리쳤다.
“헤스컴. 내 아들은 어디에 있나!”
“안전한 곳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안전한 곳은 무슨! 분명 저 지하에 가두어 두었겠지. 아무리 벨루드가 교단의 활동에 반대한다지만 이런 짓까지 벌이다니!”
루퍼트는 손을 들어서 손가락으로 헤스컴을 가리켰다.
“이제 다시는 네놈들과 함께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 결정을 하시다니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헤스컴의 말에 주환은 나이프를 헤스컴의 목으로 더욱더 가까이 대었다.
“빨리 벨루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이래 봐야 소용없습니다.”
“이곳 지하로 통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네. 하마스 신을 만나기 위해서 갔던 적이 있는 곳이니까.”
헤스컴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루퍼트는 앞장을 서며 안쪽의 예배당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데스티나 역시 헤스컴 쪽으로 다가와 롱소드를 뽑아 그를 가리켰다.
“따라가라.”
데스티나의 말에 헤스컴은 순순히 루퍼트의 뒤를 따랐다.
주환은 헤스컴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기에 계속해서 그의 뒤에 붙어서 나이프로 목을 겨누고 있었다.
루퍼트가 예배당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예배당 안쪽의 광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예배당의 정중앙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어 있는 여러 개의 의자들.
그리고 아침의 햇볕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여 휘황찬란한 색의 모자이크를 만들어내며 예배당의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이온이 예배당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던 바로 그 스테인드글라스였다.
루퍼트는 예배당의 중앙으로 황급히 걸어갔다.
“이곳이야. 이곳에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장치가 있었어.”
“빨리 통로를 열어.”
주환의 요구에 헤스컴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두 분께도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군요.”
“한가롭게 네 말을 들어줄 시간은 없다.”
데스티나의 냉정한 대답에 헤스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동료분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으신가 보죠?”
“동료?”
“네. 다크엘프 괴물 사냥꾼. 그녀는 지금 우리의 손에 있습니다.”
“뭐?”
헤스컴의 말에 주환과 데스티나는 깜짝 놀랐다.
“카미유는 경비대로 갔을 텐데.”
“저희는 경비대와 나름의 협조 관계에 있습니다. 카미유라는 분은 우리가 데려왔던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경비대로 혼자서 찾아왔더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그녀는 지금 벨루드 씨와 함께 우리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지금은 살아 있지만, 당신들이 우리 교단과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운다면 그들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너…….”
“자. 그럼 저를 풀어주시죠. 저를 풀어주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도록 하죠.”
헤스컴의 요구에 주환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데스티나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
“동료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까?”
“너의 수작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정말로 우리 동료가 너에게 잡혀 있다면 우리도 너를 인질로 삼아서 인질 교환을 하면 될 뿐이다. 어설픈 수작으로 빠져나갈 생각은 말도록.”
“그렇군요. 하지만 어설픈 수작은 당신들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바깥을 성전기사단이 포위하고 있다니. 그런 건 다 거짓말이겠죠.”
“그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네가 우리에게 잡혀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헤스컴이 그렇게 말한 순간 갑자기 헤스컴이 쓰고 있는 후드가 벗겨지면서 머리가 뒤쪽 180도 방향으로 회전했다.
“뭐야!”
갑자기 헤스컴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 주환은 경악에 빠졌다.
두족류와 비슷한 몸을 가지고 있는 헤스컴이었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그리고 헤스컴이 쓰고 있던 가면이 스르륵 벗겨졌다.
이어서 주환과 데스티나는 징그럽게 변해 버린 헤스컴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때의 그 괴물!”
주환과 데스티나는 그의 얼굴이 동굴의 괴물 문어와 닮아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