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맞아. 길버트는 내가 그걸 끝까지 모를 거로 생각했을 거야. 그저 집 안에만 박혀서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 아가씨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침대에만 있는 대신 책을 아주 많이 읽었거든. 내 몸을 낫게 할 수 있는 정보라면 무엇이든 알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약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공부했기에 나중에는 그가 주는 약의 정체를 알 수 있었지.”
“그런데 그는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기도에는 자신이 없으니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인가?”
데스티나의 물음에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 약의 정체에 확신을 했을 때 나는 길버트에게 따졌어. 어처구니없지만 길버트는 나를 사랑해서 그런 일을 했다고 변명했어. 나를 마약에 중독시켜서 자신의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거지. 그와 나의 말싸움이 커지면서 큰 소란이 일어났고, 나중에 사종장님이 내 방에 들어와서 길버트를 내쫓아 버리셨어.”
“무서운 녀석이네.”
“길버트를 내쫓았지만 나는 내가 왜 그와 싸우게 되었는지를 아버지께 말씀드리진 못했어. 나는 이미 어느 정도 마약에 중독된 상태였거든. 아버지께 내가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말씀드릴 자신이 없었어. 나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지.”
“그럼 지금은 괜찮아진 거야?”
주환의 물음에 사라는 자신의 팔을 들어서 장난스럽게 자신의 건강함을 표현하려고 했다.
“지금은 중독 증상이 다 없어졌어. 몸이 불편했던 게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나은 일이었을 지도 몰라. 그때는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픈 때였으니까 마약이든 뭐든 찾거나 구할 방법이 없었거든. 그래서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진짜 다행이다.”
“고마워. 아무튼, 그래서 길버트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길버트는 그 뒤에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다.”
데스티나의 말에 사라는 눈이 커졌다.
“미쳤단 말이야?”
“그래. 미쳐서 항구를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가 지금은 실종되었다더군. 어째서 갑자기 미쳐 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야.”
“그래. 그렇구나. 그 사람. 천벌을 받을 것일지도 모르겠네.”
사라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데스티나 네가 말한 것처럼, 길버트라는 사람 어째서 갑자기 미쳐 버렸을까?”
주환이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사라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나른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나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 뭔가. 아주아주 무서운 거라도 본 게 아닐까?”
* * *
그렇게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밤은 더욱더 깊어져 갔다.
그리고 이야기가 잠시 멈추었을 때 데스티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주환이 일어난 데스티나에게 묻자 데스티나는 사라의 방 한쪽에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좀 했더니 더워지는군. 사라. 창문을 좀 열어도 될까?”
“창문? 열고 싶으면 열어도 돼.”
사라가 허락하자 데스티나는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문으로 다가가는 데스티나를 보면서 주환은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지금은 날씨는 그다지 더운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좀 쌀쌀한 편이었다.
이온을 여관에 데려다 주는 김에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기는 했지만,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차가운 바닷물에서 한참을 잠겨 있기까지 했기 때문에 사라의 차 대접이 고맙기까지 했던 게 아니던가?
주환은 데스티나가 무엇인가 의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창문으로 다가간 데스티나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서 주위를 바라보았다.
사라의 방은 이 층에 있긴 했지만 잠겨 있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몸놀림이 날렵한 자라면 들어오기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창밖을 보던 데스티나는 문득 창틀에 시선을 두었다.
‘이건.’
데스티나는 무언가 창틀에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데스티나는 손가락을 창틀에 문질렀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검은 그을음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그 그을음을 보았을 때 데스티나는 처음에 풍로에 들어가 있던 숯을 떠올렸지만, 숯이 창틀에 묻어 있을 이유가 없으며 그 그을음이 창틀에 묻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생각을 접었다.
데스티나는 범선에서 사람들을 벨루드의 배로 대피시킨 다음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주환과 카미유와 대적하고 있던 하얀 가면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주환의 유탄 공격에 맞은 하얀 가면은 몸 일부가 파괴된 듯 검은 가루들을 흘리고 있었다.
그 가루들은 마치 불에 탄 재처럼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데스티나는 사라가 그들에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얀 가면은 분명히 사라의 창문을 이용했음이 틀림없었다.
사라가 하얀 가면과 동일인물이라면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데스티나는 고개를 돌려 주환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사라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주환 일행과 헤어진 카미유는 홀로 도빌워터의 경비대로 향했다.
한밤중이었기에 경비대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두 명의 경비대원이 경비대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카미유가 나타나자 경비대원들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입니까?”
“이곳에 납치되었다가 구출된 피해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왔는데.”
카미유는 그렇게 말하면서 경비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으로 온 것은 확실한 건가?”
그녀의 물음에 경비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으로 오기는 했지만.”
“했지만?”
“지금 이곳에는 없습니다.”
경비대원들의 대답에 카미유는 의구심을 느꼈다.
“이곳에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나저나 그들과 당신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그 안에 당신의 가족이라도 있는 겁니까?”
“가족은 아니지만 납치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에게 의뢰를 받은 사람이야. 이곳에 온 사람 중에 의뢰인들의 가족이 있을 수도 있거든. 그들이 지금 안전한지 확인해야 해.”
카미유는 이유를 설명한 후 경비대의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두 자루의 창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문의 양옆에 서 있던 경비대원들이 창 자루를 겹쳐서 그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었다.
“들어갈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
“아까도 말했듯이 그들은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저희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니까요. 지금 호위대와 함께 도빌워터를 떠났을 겁니다.”
경비대원의 말을 듣고 있던 카미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기다란 귀를 어루만졌다.
“이 한밤중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오자마자 사람들을 바로 고향으로 이동을 시켰다는 말이지?”
“맞습니다.”
“납치당한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들은 적이 있는데, 그들은 꽤 먼 곳에서 왔었어. 그곳까지 가려면 나름의 준비가 필요할 텐데 그 짧은 시간에 그 준비를 다 끝냈다는 말?”
“당신이 믿든지 말든지 그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카미유가 설득을 하려고 해도 경비대원들은 그녀를 경비대의 안으로 들여보낼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러자 카미유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래. 들여보내 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카미유가 뒤로 물러나자 경비대원들은 방심하면서 창을 치웠다.
그 순간 카미유는 빠르게 품속에서 곰방대를 꺼냈다.
곰방대의 자루는 나무로 되어 있었지만, 그 끝은 금속.
곰방대의 끝 부분은 매우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카미유는 곰방대를 경비대원들을 향해서 휘둘렀다.
목표는 그들의 턱 끝 부분이었다.
퍼벅!
경비대원들이 반응할 틈도 없이 곰방대의 단단한 끝이 두 사람의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복싱 선수가 턱을 강타당했을 때처럼 곰방대의 끝은 두 사람의 턱을 때려 그대로 뇌를 뒤흔들어 놓았다.
경비대원 두 사람은 손에서 들고 있던 창을 놓으면서 바닥으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경비대원 두 사람이 순식간에 제압을 당하자 카미유는 손안에서 곰방대를 멋들어지게 회전시켰다. 그리고 곰방대를 물고는 담뱃잎을 채워 넣고 불을 붙였다.
“흐읍.”
불이 오르자 카미유는 연기를 들이마시고는 깊게 내뱉었다.
“내가 아무리 이해심이 많다지만 너희처럼 수상하게 행동하면 그냥 넘어가 줄 수 없잖아.”
그리고 카미유는 발을 들어서 경비대의 문을 걷어찼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자 카미유는 경비대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리 오너라!”
카미유가 경비대 건물의 안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고함을 지르자 경비대의 안쪽에서 경비대원들이 한둘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슨 일이야!”
나타난 경비대원들은 문 앞에 서 있는 카미유를 보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놈이냐!”
경비대원들의 아우성을 치자 카미유는 경비대 건물의 안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납치 피해자들은 다 어디에 있지?”
“그게 무슨 소리냐?”
“이곳에 있는 건가? 아님은 다른 곳에 숨겼나?”
경비대원들은 문밖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를 바라보았다.
“적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카미유에 대한 적의가 경비대원들의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놈을 붙잡아라.”
경비대원들은 허리춤에 걸려 있는 곤봉을 꺼냈으며 몇 명은 카미유를 묶을 수 있는 포승줄을 손에 거머쥐었다.
그들의 준비하는 것을 보고 있던 카미유는 열려 있던 문을 조용히 닫았다.
“아무래도 쉽게 대답해 줄 생각은 없는 것 같네. 다들 사이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아쉬운 일이야.”
카미유는 피우던 곰방대의 재를 떨어 버리고는 품속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나도 친절하게 물어볼 생각은 더는 없지만 말이지.”
카미유의 말이 신호가 된 듯 곤봉을 들고 있는 경비대원들이 일제히 카미유를 향해서 돌격했다.
카미유의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곤봉. 그녀는 팔을 들어서 곤봉을 쳐냈다.
카미유는 건틀릿을 창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으로도 곤봉 정도를 방어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카미유는 반대쪽 손을 앞으로 내밀어 자신을 공격한 경비대원의 얼굴을 때렸다.
퍽!
그러자 맞은 경비대원의 코가 부러지면서 뒤쪽으로 넘어졌다.
상대를 쓰러뜨린 카미유는 양손을 들어서 자세를 잡았다.
권투.
카미유는 현재 유능한 괴물사냥꾼이지만 그전에는 이름난 권투사였던 것이다.
카미유는 포위되지 않게 리드미컬한 스텝으로 경비대원들의 옆쪽으로 빠져나갔다.
왼손은 방어, 오른손은 공격. 그리고 완력에 의지하는 둔중한 권투.
그것이 대다수의 권투사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카미유는 양손을 다 자유롭게 사용하면서도 빠른 기동을 중시하는 권투 스타일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빡!
카미유가 손을 휘두르자 갈고리처럼 턱을 걸어치는 훅 펀치가 다음 경비대원의 턱에 작열했다.
턱을 맞은 경비대원은 온몸에 힘이 풀린 듯 스르륵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