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당신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었지?”
카미유가 묻자 잡혀 온 이들은 자신들이 끌려온 곳의 이름을 말하였다.
“도빌 워터와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곳이야.”
“어째서 범선까지 대동했는지 알 만하네.”
잡혀온 이들은 입을 모아 주환 일행에게 사정했다.
“저희들 말고 잡혀온 다른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들도 구해 주세요.”
그들의 이야기에 카미유는 곧장 와이어를 이용해서 잠겨 있는 다른 선실의 문들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도 잡혀온 이들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데스티나와 주환 일행은 그들 모두를 다독인 후에 가까스로 안심을 시켜 모두를 복도로 나오게 했다.
선실에 갇혀 있던 이들의 수는 스무 명 남짓이었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잡혀온 이들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반드시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약속하지.”
데스티나의 약속에 그들의 사이에서 기쁨의 분위기가 흘렀다.
데스티나가 사람들을 통솔하고 있는 동안 주환은 망가진 자물쇠를 집어 들었다.
“뭐 하고 있어?”
카미유가 주환을 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이곳에는 정말 좀비만 있는 걸까?”
“무슨 말이야?”
“이 배를 그 좀비들이 움직이고 있다지만 이 자물쇠들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다른 이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환과 카미유가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선미 쪽에 쌓여 있던 오크통들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요란한 소리에 잡혀온 이들의 사이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정해라.”
데스티나는 그들의 앞을 막아서면서 선두에서 오고 있는 이를 주시하였다.
그곳에서 걸어오고 있는 이는 하얀색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상대가 점점 가까워지자 주환은 그를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헤스컴과 같은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헤스컴의 가면은 파란색이고 특유의 문양이 들어가 있었지만 지금 상대가 쓰고 있는 가면은 아무 문양도 없는 하얀색의 가면이라는 사실이었다.
“헤스컴?”
주환이 상대를 향해 그렇게 물었지만,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렇지만 주환은 최소한 상대가 헤스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헤스컴보다 키와 덩치가 왜소한 편이기 때문이었다.
정체불명의 하얀 가면을 본 카미유는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괴물 사냥꾼 일을 하면서 단련된 그녀의 감각이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얀 가면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오크통들을 손으로 밀어서 옆으로 치우며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배에 실려 있는 오크통들은 대부분 가득 차 있었으며 건장한 사내가 두 명씩 달라붙어야 겨우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에게 오고 있는 하얀 가면은 그러한 오크통들을 한 손으로 가볍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데스티나는 롱소드를 들어서 하얀 가면을 겨누었다.
“네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면 멈춰라. 경고한다. 멈추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도 반격할 것이다.”
데스티나의 경고에도 하얀 가면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주환 일행이 방어할 준비를 할 때 이번에는 그들의 뒤에서 인기척들이 들려왔다.
이번에 들리는 것은 다수의 발걸음 소리였다.
잡혀온 이들 무리의 뒤쪽에 있던 주환과 카미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두건 좀비들이 선실들이 늘어선 복도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범선의 더 아래층에 있다가 계단을 이용해 올라온 것으로, 그들이 나타났기에 주환 일행은 복도의 가운데를 점한 채 양쪽에서 포위된 형세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위쪽 갑판으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그들이 아래층으로 내려오기 위해서 사용했던 곳.
그곳은 선두와 가까운 데 위치했으며 지금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통로를 하얀 가면이 막고 있었다.
둘째는 선미 쪽에 가까운 출구로 그 출구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카미유가 들어갔었던 선장실의 바로 앞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방금 도착한 좀비들이 막아서고 있다.
“데스티나.”
카미유는 하얀 가면과 대치하고 있는 데스티나를 불렀다.
“네가 이들을 이끌고 선미 쪽으로 빠져나가. 저쪽을 막고 있는 건 좀비들뿐이니까. 너라면 어렵지 않게 뚫고 나갈 수 있을 거야.”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데스티나의 물음에 카미유는 주환과 어깨동무를 했다.
“저 가면 쓴 녀석은 우리 둘이서 막도록 할 테니까.”
“내 의사는 반영이 안 되는 거야?”
주환이 그렇게 묻자 카미유는 빙긋 웃었다.
“혼자는 외롭거든.”
“나 참.”
서로의 뜻이 모이자 데스티나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럼 부탁한다.”
“그래. 너는 반드시 이 사람들을 탈출시켜 줘.”
카미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환과 카미유, 그리고 데스티나는 서로가 서 있던 자리의 위치를 바꾸었다.
“다들 겁내지 말고 나를 따라와라! 단숨에 이곳을 탈출한다!”
데스티나는 선미 쪽으로 방향을 돌려 복도를 달려가며 자신의 뒤에 있는 이들을 독려했다.
처음에는 좀비들의 등장에 겁을 먹고 있던 이들은 데스티나는 앞장서서 달려가자 곧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데스티나의 뒤를 따랐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 좀비들이 우르르 달려왔지만 데스티나는 앞쪽에서 달려드는 좀비들을 모조리 베어내면서 앞으로 밀고 나갔다.
데스티나가 잡혀온 이들을 이끌고 선미 쪽으로 사라지자 주환과 카미유는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얀 가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카미유는 망토의 안쪽에서 술병을 꺼내서 하얀 가면 쪽으로 내밀었다.
“우리 술이나 한잔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어때?”
카미유의 권유가 먹힐 리가 없었다. 하얀 가면은 양손으로 오크통을 하나씩 들더니 주환과 카미유를 향해서 그 오크통을 던졌다.
두 사람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그 오크통들을 피했다.
공격을 피한 카미유는 아쉽다는 듯 술병을 품속에 집어넣으며 주환에게 말했다.
“저쪽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네.”
“당연하지.”
두 사람이 몸을 피한 사이에 하얀 가면에 의해 날려진 오크통들은 벽에 부딪히면서 박살이 났다.
오크통의 안에 있던 내용물이 바닥에 흘러넘치면서 주환과 카미유의 후각을 자극했다.
‘기름.’
오크통에 담겨 있던 기름이 바닥을 적셨다.
“날리는 거라면 나도 자신이 있거든.”
카미유는 그렇게 말하며 로프를 발사해 오크통에 고정했다.
그리고 카미유는 기계 장치를 작동시켜 그 힘으로 오크통을 당겨 원심력을 이용해 그 오크통을 하얀 가면에게 던졌다.
카미유의 조준은 정확했다.
그렇지만 하얀 가면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퍽!
그는 손을 움직여서 날아오는 오크통을 부숴 버렸다.
카미유의 공격은 하얀 가면에게 아무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하얀 가면은 오크통을 때려 부순 자신의 손을 가볍게 털어낼 뿐이었다. 손에 묻은 기름을 떨어내려는 듯이 말이다.
카미유는 이번에는 두 줄기의 와이어를 발사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력의 와이어가 하얀 가면에게 쇄도해 갔다.
그리고 하얀 가면과 카미유의 사이에 있던 오크통들 중 몇 개가 가볍게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와이어가 오크통들을 스치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와이어가 워낙에 얇고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초집중 모드를 사용하는 주환 정도만이 그 와이어를 잠깐이나마 포착할 수 있었다.
하얀 가면은 앞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허공을 움켜잡았다.
사실 그가 잡은 것은 허공이 아니었다.
자신을 잘라내기 위해서 오고 있던 두 줄의 와이어를 잡은 것이었다.
“윽!”
놀란 카미유는 와이어를 회수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여의치 않았다.
하얀 가면이 잡은 와이어를 당기자 마치 그와 카미유 간에 줄다리기 같은 힘 싸움이 이어졌다.
카미유는 와이어를 더욱더 강하게 당겼다.
보통 때였다면 날카로운 와이어의 날이 잡고 있는 상대의 손가락들을 절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와이어는 하얀 가면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저 녀석. 보통 놈이 아니야.”
카미유는 감탄했지만 정작 하얀 가면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얀 가면이 와이어를 잡고 있는 것은 카미유가 제압당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은 주환에게 기회이기도 했다.
카미유가 버티고 있는 동안 주환은 총을 들어서 하얀 가면을 겨누었다.
지금 하얀 가면은 카미유와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
그리고 하얀 가면은 양손으로 와이어를 잡고 있었기에 움직임이 상당히 봉쇄된 상태였다.
주환으로서는 너무나도 쉬운 과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주환은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조준한 다음 신중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상대가 인간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었기에 지금 발사한 탄은 비살상탄이었다.
주환은 언제든지 실탄으로 교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채였다.
퍽!
탄이 명중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주환과 카미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얀 가면은 자신에게 날아온 탄환을 방어해 냈다.
그렇지만 하얀 가면은 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로브의 사이에서는 검은색의 긴 촉수가 솟아나와 있었다.
괴물 문어의 촉수는 문어나 오징어와 같은 두족류의 그것과 닮아 있었지만 지금 하얀 가면에게 달린 촉수는 오히려 뱀과 비슷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촉수의 끝 부분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입이었는데 그 입에는 주환이 발사했던 비살상탄이 물려 있었다.
으직.
촉수의 입이 그 탄을 깨물자 탄환은 그대로 으깨져 부스러지며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 * *
단지 상황만으로 보자면 데스티나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티나가 상대해야 하는 좀비들은 스무 명 남짓.
심지어 데스티나는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지켜야 하는 상황.
그리고 좀비들은 두려움도, 고통도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데스티나는 좀비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다.
데스티나에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지금 그녀가 좀비들을 상대하고 있는 복도가 그리 넓지 않다는 점이었다.
오크통이 쌓여 있던 선두 부분은 화물을 실어야 하므로 공간이 넓었지만, 선실들이 도열해 있는 선미 부분은 선실의 공간만큼 복도가 협소해지기 때문에 데스티나로서는 어느 정도 신경을 쓴다면 좀비들에게 포위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데스티나가 복도를 달리자 마주 오던 좀비들도 그녀를 막기 위해서 달려왔다.
데스티나는 가장 앞에서 달려오는 좀비를 밀어차기로 걷어찼다.
발차기를 맞은 좀비가 바닥으로 쓰러지자 데스티나는 바로 그 뒤에 있던 좀비를 베어 버린 뒤 검은 회전시켜 검 끝을 아래쪽으로 찔렀다.
그러자 롱소드는 바닥에 넘어진 좀비의 목을 통과했다.
은말뚝 발사기를 사용할 시간은 없었기에 데스티나는 은말뚝 두 개를 꺼낸 다음 마나를 실어 앞쪽으로 던졌다.
발사기가 아니면 말뚝을 멀리까지 발사할 수 없었지만 바로 앞쪽으로 던지는 정도라면 발사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다.
마나가 실린 말뚝들은 두 마리의 좀비를 관통했다.
데스티나는 좀비의 목에 박혀 있던 롱소드를 뽑은 다음 앞으로 휘둘러 두 마리의 좀비들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여섯 마리의 좀비들을 쓰러뜨리는 데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데스티나는 검을 휘둘러서 몇 명의 좀비들을 더 베어 버리곤 롱소드를 가로로 눕힌 다음, 검의 몸 부분에 손을 대고 앞으로 밀어붙여서 좀비들을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