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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의 이세계 뽀개기-109화 (109/182)

109화

그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달빛이 밝은 날이지만 그가 달리고 있는 곳은 나무가 우거져 있는 깊은 숲속.

달빛조차 제대로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둠을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어둠이 아니라 새하얀 공간을 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그의 시각은 밝아져 있었다.

낮은 절벽이 그를 가로막는다.

그는 힘을 주어서 앞으로 점프했다.

땅을 박차는 발과 다리의 근육.

전신에 넘치는 강렬한 에너지.

그는 절벽에서 뛰어내려 단숨에 수 미터의 아래쪽으로 착지했다.

낙법조차 필요 없는, 탄력 있는 움직임을 보이며 그는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본능.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본능이었다.

날고기를 씹고 피를 빨아들이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

무력한 상대의 살을 가르고 내장을 헤집어 놓고 있다는 핏빛의 욕망.

평소에는 그를 괴롭히지 않았던 핏빛 환상은 보름달이 뜰 때에 가장 강렬하게 그를 옥죄여 왔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욕구를 채우고 난 뒤였다.

그는 숲을 벗어나서 마을의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커다란 담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단 한 번의 몸놀림으로 담을 뛰어넘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바로 마구간이었다.

마구간은 나무로 지어졌으며 지금과 같은 새벽에는 그 안에서 말들이 얌전히 잠을 자고 있을 것이었다.

말은 잠을 많이 자지 않는 동물이지만 그는 그때쯤에는 말들이 대부분은 잠을 자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구간에 가까이 다가간 그는 마구간의 입구가 자물쇠로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손으로 자물쇠를 쥐고는 완력으로 그 자물쇠를 박살 냈다.

자물쇠가 망가지는 요란한 소리가 나자 마구간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말 중 몇 마리는 귀를 쫑긋 세우면서 눈을 떴다.

그는 마구간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뒤쪽에 드리워진 달빛이 그의 몸을 비추면서 그림자가 마구간의 안쪽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마구간 안에 가득 차는 야성의 냄새.

그 냄새에 자극을 받은 말들은 공포에 질려 목줄이 묶인 채로 그 자리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말들이 소란을 피우면 곧 마을 사람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는 마구간의 안으로 들어와 마구간의 문을 닫은 후 자신의 사냥감이 될 말을 물색했다.

가장 겁에 질려 있는 말을 찾아낸 그는 그 말을 향해서 다가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에 있는 말들의 소란스러움이 더욱더 심해져 갔다.

그가 다가올 때까지도 말들은 도망갈 수가 없었다.

목줄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물색한 말에게 다가가 곧바로 말의 목을 붙잡았다.

히힝!

목을 잡힌 말은 빠져나오기 위해서 앞발을 치켜들고 저항했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촤악!

그 말이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얼굴을 향해서 휘둘러지는 날카롭고 거대한 손톱이었다.

* * *

챙그랑!

이브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박살이 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액체가 바닥으로 주륵 흘렀다.

이브의 뒤에 서 있던 타마두크는 조용히 이브의 옆으로 와서 깨진 찻잔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이브 씨의 할아버지인 클레이브를 만났습니다,”

주환의 대답에 찻잔의 조각을 치우고 있던 타마두크의 손이 멈췄다.

지금 주환은 잠시 나이츠 빌리지를 떠나 이브의 탑에 와 있었다.

그리고 이브를 만나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던 도중 필연적으로 클레이브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기에, 주환은 이브에게 숨기지 않고 당시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바로 그 사람이 엘레나가 쫓던 비를 쫓는 자들을 이끌고 있더군요.”

주환은 그날에 있었던 일들을 이브에게 모조리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브와 타마두크는 어째서 갑자기 전신에 격통이 찾아왔던 것인지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결국에 저희 할아버지는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버린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브는 자신의 고통이 사라진 시점을 떠올렸다.

‘할아버지와 루드비히 둘 다 다른 차원 너머로 사라져 버려서 저주가 약해진 걸까? 아니면 그 둘이 다른 차원으로 간 뒤에 루드비히는 마계로 돌아가 버렸을 수도 있겠네.’

생각에 잠겨 있는 이브의 모습을 보면서 주환을 말을 이었다.

“이브 씨와 가문 사이의 이야기, 그리고 할아버지와의 이야기는 솔직히 남들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알려지게 되어서 좀 그렇네요.”

“어쩔 수 없죠. 이건 제가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하나의 숙명과도 같은 거니까요. 아참. 그럼 스승님은 어떻게 되신 거죠?”

“우선 루시아를 데리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어요. 적당한 시간이 오면 저희를 돕기 위해서 다시 돌아오겠다는군요.”

주환은 엘레나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정말로 갈 거야?”

주환은 물음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로즈버드 빌리지의 입구에 선 채로 잠시간의 헤어짐을 앞두고 있었다.

“나도 언제까지 여기에만 있을 수는 없어. 내가 사는 엘프들의 나라로 돌아가야지.”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서 작은 불꽃을 만들어 보였다.

“정령들은 엘프들의 나라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그 힘이 점점 약해져. 그래서 주기적으로 돌아가 그 힘을 보충해 주어야 해. 이번 싸움으로 정령들이 너무 고생을 많이 했거든. 내 마나로만 이 녀석들을 달래 주자니 나 자신이 말라서 죽을 지경이야. 그리고.”

엘레나는 손을 들어서 뒤쪽의 벽에 기대어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아를 가리켰다.

“루시아에게 기분 전환을 좀 시켜 주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엘프들의 나라는 마음을 다친 사람들에는 좋은 휴식처가 될 수 있거든. 물론,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멋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하지만.”

주환은 엘레나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우리가 너를 도우면 너도 우리를 영원의 교차점으로 데려다주기로 했잖아?”

“그 약속은 잊지 않았어. 그때도 말했지만, 영원의 교차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위치가 아니라 시간이야. 영원의 교차점은 특별한 시간대에만 열려. 그리고 그 시간대를 확실히 관측하려면 엘프의 나라에서 관측해야 하고. 어쨌든 그 시간에 맞추어서 다시 너희를 찾아올 거야.”

“믿어도 되는 거지?”

“우리 엘프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거야말로 거짓말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일어나건 약속은 약속이니까 내가 알아서 너희를 데리러 올 거야. 나는 이브랑 영계 통신을 할 수 있으니까 이브랑 지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 너희도 이브와의 연락은 유지하고 있는 게 좋을 테지. 그럼 주환, 데스티나를 부탁해. 나도 그녀가 죽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

* * *

그게 주환과 엘레나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였다.

“결국에 스승님은 그 소녀를 데리고 가셨다는 거로군요.”

“그게 루시아를 위한 일이니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저처럼 제자로 키우려고 하시는 게 아닐까요?”

“엘레나의 제자로 있던 시절은 어땠죠?”

“글쎄요. 무난했다고 하면 무난했고 험난했다고 하면 또 험난했다고 해야 할까요. 저에게 엘레나 스승님은 제가 생각하는 유일한 스승님이지만 사실 저는 스승님에게 마법의 기초밖에 배우질 못했어요. 엘레나 스승님의 특기는 정령 마법인데 저는 정령 마법에 손도 대지 못했죠.”

“어째서요?”

“정령은 자신이 따를 상대를 극도로 가려요. 정령의 환심을 사지 못하면 정령 마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런 점에서 저는 처음부터 정령 마법을 배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거죠. 저는 알케비젼 가문 사람이었고 마족들에게 제물로 바쳐진 인간이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엘레나가 이브 씨를 제자로 받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들은 적이 없지만, 스승님으로서는 저를 흑마법의 세계에서 완전히 연을 끊게 하실 생각이셨나 봐요. 그리고 정령들과 관계를 맺고 고위 정령들과 연결되면 그 힘으로 저주를 약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아예 정령들에게 무시 받는 저로서는 그게 불가능했던 거죠. 그래서 스승님의 허락도 없이 엘프들이 나라에서 도망쳐 나온 거고요.

이브의 이야기를 듣던 주환은 어째서 인간이 싫다고 투덜거리는 엘레나가 루시아를 돕기 위해서 나섰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엘레나는 이미 예전부터 어려움에 빠져 있던 이브를 도운 경험이 있었으며 루시아의 모습에서 이브의 과거를 투영시켜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차원을 이동하는 배가 사라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게 있다면 그야말로 신급의 아티팩트를 손에 넣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그 가스파르라는 괴물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할 수는 없었을걸요.”

“그랬겠네요. 아. 주환 씨 이야기에서 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뭐죠?”

“그. 아르테어라는 사람. 정확한 이름을 알고 있나요?”

“아뇨. 그러고 보니까 풀네임을 듣지는 못했네요.”

“그 사람 인상착의를 자세히 들려주시겠어요?”

주환은 이브의 요구에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르테어의 인상착의를 이브에게 말해 주었다.

타마두크 역시 이브의 뒤에 서서 그 이야기를 아주 관심 있게 듣고 있었다.

“자신을 파루시아 교단의 사제라고 했단 말이죠?”

“네. 그것도 제법 고위 사제 축에 들어가는 듯했어요. 의학에도 정통하고. 데미안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것 같던데.”

“그렇군요.”

“아는 사람입니까?”

“잘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 ‘두 사람’이 같은 곳에 있었다니.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무슨 말이죠?”

“아직 정확한 것은 아니라서 나중에 말씀해 드릴게요. 그나저나 타마두크에게 들으니 단순히 정보 공유만을 위해서 오신 게 아니라던데.”

이브의 물음에 주환은 아르테어에 대한 궁금증은 잠시 미뤄 두었다.

“사실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요. 나이츠 빌리지에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곳에서는 이런 문제에 정통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이런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브 씨밖에 없었죠.”

“무슨 문제이기에?”

이브의 물음에 주환은 타마두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타마두크는 알겠다는 듯 자리를 벗어나 응접실을 빠져나가더니 이윽고 바퀴가 달린 커다란 침대를 밀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타마두크가 응접실 테이블 옆에 침대를 멈추자 이브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를 바라보았다.

침대의 위에는 바로 이온이 미가동인 상태로 누워 있었다.

이온의 몸은 갈로스가 검은 탑에 복귀하면서 겸사겸사 주환 대신 그곳으로 옮겨 준 것이었다.

이온을 바라보고 있던 이브가 주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부탁합니다. 이 친구를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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