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허억.”
데스티나는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툴레오가 힘을 빌려 주고 있다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정신력 덕분이었다.
[견디기 힘든가 보군.]
그때, 툴레오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말을 걸어왔다.
‘이제… 이대로 끝나는 겁니까?’
데스티나의 목소리를 필사적이었지만 툴레오의 목소리는 여유 그 자체였다.
[글쎄. 너와 나와의 계약을 조금 바꾼다면 더 나은 상황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니까 이런 거지. 예를 들어서 말이야. 저 밑에 있는 인간들의 목숨 중 일부를 내게 준다는 계약은 어때?]
툴레오의 말을 데스티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건 그런 건…….’
[그렇게 하면 내 힘을 조금 더 빌려 줄 수도 있어. 어때? 나쁘지 않은 거래잖아?]
툴레오의 속삭임은 점점 낮으면서도 음흉한 목소리로 변해 갔다.
그러나 데스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목숨을 희생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네가 모든 것을 짊어지려는 거야? 너는 지금 너를 희생하여 다른 이들을 구하고 있다는 사명감에 도취해 있지만 너는 잃는다는 것의 공포에 대해서 전혀 몰라.]
그러자 데스티나의 오른손에서부터 오른 어깨까지 슬라임의 몸처럼 투명하게 변하였다.
[제대로 된 공포가 뭔지 모르니 강한 척을 할 수 있는 거지. 이제부터 잃는 것의 공포가 무엇인지 알려 주도록 할게.]
툴레오가 말을 마치자마자 데스티나의 손가락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래쪽으로 흐르는 끈적한 액체처럼 그녀의 손가락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녹아내린 몸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툴레오의 속삭임은 마치 검처럼 데스티나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가 평생을 수련에 매진하면서 단련해 온 그녀의 오른손.
그 손에 검을 잡고 휘둘러서 공을 세워 온 수많은 시간들.
기사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단련된 손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빨리 정해 봐! 이런 이미 손목까지 잃어버렸군. 다른 놈들의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네 몸이 점점 사라져갈 거야.]
공포.
몸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극한의 공포.
데스티나는. 나는 평생 기사로서 살고 기사로서 죽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최고의 명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점차 몸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직접 느끼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직도 고민하는 건가? 이제 팔꿈치까지 날아갔어.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에게 바치다 보면 너의 몸에는 남는 게 없을 거야. 그럼 너는 죽게 되는 거지. 그러니 너의 몸을 보존하면서도 다른 이들을 희생하는 방향으로 거래의 판을 다시 짜보는 건 어때?]
거래.
거래.
거래.
데스티나의 머릿속에 휘몰아치고 있는 그 단어.
툴레오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스티나는 대답을 정했다.
데스티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머릿속으로 대답했다.
‘그런 거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희생시키지 마시고 그 대신 저의 모든 것을 가져가십시오.’
데스티나의 대답에 툴레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데스티나의 머릿속에 온통 울려 퍼졌다.
[그럼 거래의 결과는 온전히 너에게 받도록 하겠어.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네. 네가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만큼 너의 몸이 그다지 크지 않으니까 말이야.]
툴레오는 데스티나를 조롱하며 그렇게 말했다.
* * *
툴레오가 만든 방어벽의 바깥에 서 있던 클레이브는 방어벽에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대보았다.
파직!
사정없이 손을 튕겨 내 버리는 방어막의 힘을 느끼면서 클레이브는 그것이 보통의 방어막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의지가 개입한 모양인데…….”
그는 자신이 루드비히를 소환하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생각하고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제 마족의 개입을 좌시하지만은 않겠다는 이야기인가?”
쿨럭!
클레이브는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막은 손가락의 사이로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주환의 총에 맞은 상처.
그리고 루드비히를 소환하면서 가해지는 전신의 격통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던 것이다.
‘아직은 견딜 수 있다.’
스윽.
클레이브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살덩이 괴물이 서 있었다.
“이건.”
클레이브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괴물에게서 흥미를 느꼈다.
“너는 뭐 하는 괴물이냐?”
그러자 살덩이 괴물은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바꾸어 나갔다.
최종적으로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모습.
가스파르의 모습이었다.
“가스파르?”
“네. 접니다.”
“네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가?”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입니다.”
가스파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이 꿈틀거리면서 이리저리 형태를 바꾸어 나갔다.
“부하들에게 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셨더군요.”
“그래. 너는 너의 개인적인 호승심 때문에 굳이 그 엘프를 상대하러 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우리의 아지트까지 끌어들였지. 설마 아무리 뻔뻔한 너라도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이야기하진 않겠지?”
“네. 저의 죄는 인정할 수밖에 없겠죠. 그것까지 발뺌한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하죠.”
“그래서. 지금 고양이를 한번 물어 볼 생각인가?”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말이죠. 중요한 건 이제는 당신이 전혀 고양이로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좀 강해졌나 보군.”
“네. 제 몸에 녹색의 비를 아낌없이 뿌렸거든요. 이렇게 되니까 그런 생각마저 드네요. 우리가 지금까지 무수히 실험을 실패한 것은 그 녹색의 비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문제가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그것참 궁금하군.”
“그저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지식이 아니라 녹색의 비의 절대적인 양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쩨쩨하게 주사기 같은 물건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녹색의 비에 몸을 담그는 거죠. 저는 녹색의 비 한 통밖에 쓰지 않았지만 이렇게 신과 같은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무수한 진동들.
클레이브는 지금 자신의 보고 있는 가스파르는 변이한 가스파르의 아주 일부일 뿐임을 눈치챘다.
가스파르는 클레이브를 향해서 자신을 손을 뻗었다.
“제 손을 잡으시면 당신은 저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뭐?”
“당신은 더 거대한 존재의 일부가 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지요.”
가스파르의 말에 클레이브는 비웃음을 날렸다.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질 않는군.”
“거절하시는 거군요?”
“그럼 그걸 받아들일 거로 생각한 건가? 이거 연구 리포트에 추가할 게 더 생겼군. 녹색의 비를 너무 많이 쓰면 과대망상증에 빠진다고 말이야.”
“제가 당신의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에 권유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스파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몸에서 수도 없이 많은 팔이 생성되면서 클레이브에게로 쏟아졌다.
클레이브는 불꽃의 검을 만들어서 다가오는 가스파르의 팔들을 모조리 베어 냈다.
그러나 가스파르는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클레이브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아무리 가스파르였다고 하더라도 그를 제압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처와 루드비히의 소환에 대한 대가가 클레이브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휘릭!
그때, 가스파르의 팔들이 올가미처럼 변형되더니 클레이브의 몸을 감싸 버렸다.
그 올가미들은 하나로 합쳐지면서 거대한 손으로 변하였는데, 그 안에 있는 클레이브는 사람의 손아귀에 붙잡힌 작은 인형의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놈!”
클레이브가 불꽃을 발하자 보랏빛의 불꽃이 그를 쥐고 있는 거대한 손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가 태우는 만큼 가스파르는 동시에 재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 힘겨루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누가 이길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클레이브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가스파르의 재생력은 그야말로 무한에 가까웠다.
자신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클레이브를 보면서 가스파르는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상대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상대를 흡수하면 상대의 기억과 지식을 저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지요.”
“제법 쓸 만한 기술을 가지고 있군.”
“네. 이런 능력이 생기고 보니까 역시나 가장 흡수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렸을 때 당신밖에 생각나지 않더군요. 가장 존경하던 분이었으니까요. 당신이라면 저에게 더 다양한 지식을 안겨 줄 수 있겠죠.”
“내 지식을 다 흡수하기도 전에 네 녀석의 작은 뇌가 터져 버릴 거다.”
“그건 해봐야 하는 일이죠.”
그렇게 말하며 가스파르는 점점 클레이브의 몸을 강하게 쥐었다.
한편, 아래쪽을 향해서 계속 불꽃을 폭사하던 루드비히는 클레이브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감지했다.
그는 방어막의 바깥에서 가스파르에게 붙잡혀 흡수당하기 일보 직전인 클레이브를 발견했다.
“이상한 괴물 놈이 끼어들었군.”
적들을 죽이는 것보다 계약자를 지키는 일이 더 우선순위가 높았기에 루드비히는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날개를 펴면서 아래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날아가는 루드비히의 손에는 어느 새인지 검은색의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다.
“응?”
무언가 빠르게 날아오는 소리에 가스파르는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루드비히가 휘두른 검이 클레이브를 잡고 있는 가스파르의 팔을 잘라 냈다.
“이런.”
가스파르의 팔을 자른 루드비히는 그에게 다가가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루드비히의 덩치가 워낙 컸기 때문에 머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은 마치 작은 과일을 잡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신은 클레이브 씨와 계약한 마족이로군.”
“그래. 뭐 하는 괴물 놈인지는 모르지만, 네놈의 주제를 알아라!”
루드비히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가스파르의 머리 쪽에 힘을 집중하여 그곳에 불꽃의 공격을 때려 넣었다.
“끄아악!”
가스파르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루드비히의 공격은 그의 예상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루드비히의 공격이 그의 몸을 파괴하는 속도는 그가 재생할 수 있는 속도보다도 더 빨랐다.
가스파르의 눈과 귀, 그리고 입에서 보랏빛의 불꽃이 흘러나왔다.
루드비히의 불꽃 공격으로 가스파르의 몸은 완전히 숯덩이로 변해 버렸다.
루드비히가 주먹을 쥐자 그의 손안에서 가스파르의 다 타버린 머리가 박살이 나면서 그 잔해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하찮은 놈.”
가스파르를 처리한 루드비히는 여전히 가스파르의 거대한 손에 붙잡혀 있는 클레이브에게 다가갔다.
루드비히가 그 팔과 가스파르의 본체를 검으로 분리했기에 오히려 잘린 팔은 불타지 않고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꼴사납군.”
루드비히는 가스파르의 손에 잡혀 있는 클레이브를 보면서 그렇게 비웃었다.
“방심하지 마. 이놈은 평범한 괴물이 아니야. 계속해서 증식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괴물이다.”
“너도 늙긴 늙었나 보군, 클레이브. 이런 허접한 놈을 겁내 하다니.”
그때, 가스파르의 손의 잘린 부분이 꿈틀거리더니 길게 쭉 늘어나면서 검을 들고 있는 루드비히의 팔을 꽁꽁 감싸 버렸다.
그러면서 그 살덩이에서 가스파르의 얼굴이 솟아올랐다.
“방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걸로 나를 제압했다고 착각하는 건가? 너 같은 쓰레기가 아무리 달려들어도 전부 다 태워 버리면 그만인 것을!”
또다시 루드비히는 불꽃을 생성하며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가스파르의 살덩이들을 태워 버렸다.
버티지 못한 살덩이가 떨어져 나가자 이번에는 사방에서 몰려든 다른 살덩이 괴물들이 루드비히에게 몰려들었다.
“귀찮은 벌레들!”
루드비히는 팔을 휘둘러 주변에서 몰려드는 살덩이 괴물들을 파괴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