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특전사의 이세계 뽀개기-91화 (91/182)

91화

“으윽.”

쓰러져 있던 가스파르는 간신히 눈을 떴다.

‘내가 살아 있는 건가?’

그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가 쓰러져 있던 곳은 실험실의 바닥으로, 그가 힘겹게 고개를 들자 자신이 쓰러뜨렸던 마법사들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허억.”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가스파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실험실의 바닥에 웅크린 채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마지막 기억은 분명 아르테어와 대화를 나눈 직후 끊어져 있었다.

기억 속의 그는 아르테어에게 자신을 받아달라는 제안을 하였고 아르테어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가스파르가 옆에 놓아두었던 가방 중 하나를 챙겼으며 가스파르는 그녀와 함께 함선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녀의 뒤를 따르려고 하였다.

그 순간, 그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 바닥으로 쓰러졌다.

놀란 그가 넘어진 채로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붉은색의 검을 들고 있는 아르테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붉은 검은 그녀가 들고 다니는 지팡이의 안에 숨겨져 있었으며, 가스파르가 방심한 순간 그 검을 뽑아서 가스파르를 공격한 것이었다.

“안타깝네요.”

아르테어는 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고 있는 가스파르를 내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당신같이 교활한 사람을 저희 쪽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히 우리를 다시금 배신하겠죠. 그런 위험을 안고 간다면 데미안 님에게 누가 될 겁니다.”

그 말만을 남긴 채 아르테어는 가방들을 챙기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것이 가스파르에게 남아 있는 아르테어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망할…….’

가스파르는 자신의 팔을 들어서 몸 상태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그의 팔은 마치 미이라처럼 말라 있었다.

그의 팔 뿐만이 아니라 그의 온몸이 마찬가지였다.

아르테어가 가지고 있던 그 붉은색의 검에 정확히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검이 그의 몸에 있는 혈액을 흡수해 버린 것이 확실했다.

“그랬군. 그런 거였어…….”

가스파르는 말라붙은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켜서 옆에 있는 테이블을 붙잡았다.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자신의 몸을 테이블의 위에 걸쳐 놓았다.

“나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지 않은 건… 그 검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겠지. 어차피 이 정도로 피가 빠져나가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없으니까.”

가스파르는 테이블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일어선 가스파르는 아주 천천히 걸어서 실험실의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렇지만 잘못 생각한 거야…. 나를 바로 죽였어야지.”

가스파르가 다가간 곳은 바로 약품 보관함으로,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서 보관함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녹색의 비 한 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아르테어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가스파르가 보관함 안에 있던 한 통만을 꺼내 가방에 넣고 보관함의 문을 닫았기 때문에 아르테어는 가방 안에 있던 녹색의 비가 가스파르가 가진 전부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가스파르는 보관함 안의 통을 꺼낸 다음 밀봉 뚜껑을 개봉했다.

가스파르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영롱한 에메랄드빛의 액체를 바라보더니 그 통을 들고 안에 있는 액체를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 버렸다.

촤악!

“아아악!”

녹색의 비가 그의 몸에 쏟아지자 가스파르는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가 지른 비명이 실험실의 바깥까지 울려 퍼지면서 그는 더는 버티질 못하고 다시금 실험실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 * *

“안 돼!”

수면탄의 효능을 어떻게든 버텨 내는 클레이브의 모습을 보면서 주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클레이브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소화탄을 없애려고 하자 그는 황급히 달려가 그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주환보다 클레이브의 행동이 더 빠를 수밖에 없었다.

뻗어 나가는 불꽃의 팔.

지금 클레이브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그 자리에 있었던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푸른빛에 둘러싸인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서 불꽃의 팔을 조종하고 있는 클레이브의 측면에 충돌했다.

쾅!

푸른빛의 마나와 클레이브의 보라색 불꽃이 서로 부딪치면서 생긴 에너지의 격돌이 결국 충격파의 형식으로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으악!”

바로 그 근처에 있던 주환은 충격파를 버티지 못하고 뒤쪽으로 넘어졌다.

그때, 누군가가 와서 그가 쓰러지지 않게끔 받아 주었다.

주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놀랐어?”

그를 받아 준 이는 바로 빙긋이 웃고 있는 루카였다.

“루카!”

“나만 온 게 아니야.”

루카의 말에 주환은 반사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클레이브와 대치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하얀색의 갑옷과 하얀색의 검.

그리고 흩날리고 있는 황금빛의 머리칼.

“데스티나.”

온몸에 마나를 두른 채로 클레이브를 밀어내 버린 데스티나는 지금 갑판의 한가운데서 클레이브와 마주하고 있었다.

“데스티나!”

주환이 소리치자 데스티나는 주환을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아직 살아 있었군.”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어?”

“아무튼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좀 더 반갑게 맞아 주면 좋겠는데.”

“그런 인사는 좀 더 나중에 하도록 하지.”

그때, 주환은 자신과 루카를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를 발견하였다.

붉은 머리칼에 성전 기사단을 상징하는 하얀색의 갑옷과 망토를 두른 귀공자 스타일의 미남자가 주환을 노려보았다가 곧 시선을 떼면서 데스티나와 클레이브가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주환과 루카는 그에게서 뻗어 나오고 있는 엄청난 살기를 느끼면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누구야?”

“저 사람이 바로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 데미안이야.”

“저 사람이?”

“응. 솔직히 저렇게 강한 검사는 처음 봤어.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데미안이 있다면 큰 걱정은 없을 거야.”

한편, 클레이브와 대치하고 있던 데스티나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이 클레이브인가.”

“그래. 내가 클레이브다.”

클레이브는 데스티나의 너머에서 바닥을 향해서 떨어지고 있는 소화탄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미 늦었군. 저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그 소화탄이 감염자들을 치료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성전 기사단의 주요 인물들이 함선의 갑판까지 올라온 이상 그런 것에 연연하는 것 역시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클레이브는 지금 닥친 상황만을 타개하기 위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데미안을 발견했다.

“자네는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인 데미안이군.”

“그렇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로군요.”

데미안의 말에 데스티나는 놀랐다.

“저자를 아는가?”

“황궁에서 오가며 몇 번 마주친 일이 있습니다. 이 정도의 일을 벌였다면 범상치 않은 능력을 갖춘 상대일 거로 생각했는데 당신은 아마도…… 클레이브 알케비젼 아닙니까?”

알케비젼이라는 말이 데미안의 입에서 나오자 이번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알케비젼이라면?”

루카가 그렇게 말하면 주환을 바라보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주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이 이브의 할아버지야.”

“정말로? 대체 저 집안은 어떻게 정상인이 하나도 없는 거지?”

“내 말이 그 말이야.”

“클레이브 알케비젼.”

데스티나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구국의 12 가문을 이끌고 있는 그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안정화하고 백성을 구제하며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렸다. 그리고 백성을 납치하여 그들에게 끔찍한 실험을 자행하고 수도 없이 많은 죄 없는 이를 죽였으니, 성전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이 자리에서 당신을 단죄할 것을 선언한다.”

“구국의 12 가문이라는 자리는 그저 허울뿐인 자리이지. 그러한 껍데기를 가지고 우리 가문의 본질을 가두어 둘 수는 없는 법이야. 그리고 황제에 대한 충성?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지금 황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클레이브는 보란 듯이 양팔을 펼쳐 보였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데스티나는 막사에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던 데미안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네라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클레이브는 이번에는 데미안을 향해서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자네 같은 사람은 그저 망국의 황제에게 묶여 있을 만한 그런 그릇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라네.”

“저 역시 이번 사태를 마주하는 황제의 대처에 실망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이야. 다시금 구시대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데미안! 저자의 혀 놀림 따위는 신경 쓰지 마라! 저자는 지금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되는 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데스티나는 데미안이 클레이브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데미안에게 소리쳤다.

“알고 있습니다.”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면서 클레이브를 향해서 하르페를 겨누었다.

“서로가 가진 불만이 같다고 해서 내가 당신에게 동조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클레이브, 당신의 그 좁은 식견으로 저의 그릇을 재단하지 마십시오.”

“뭐, 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네의 자유일세. 그렇지만 그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 자네는 나와 닮았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더 이상 당신의 이야기는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괴롭혀 온 당신의 죄악을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죠.”

데미안은 단숨에 클레이브와의 거리를 좁히고는 들고 있던 하르페를 휘둘렀다.

파직!

하르페의 녹색빛 광선검과 클레이브를 지키고 있는 보랏빛의 불꽃이 서로 충돌하는 순간 서로의 에너지가 공명하다가 상쇄되어 버렸다.

클레이브의 오오라의 일부가 순간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났으며 데미안의 하르페 역시 그 검날이 눈에 띄게 짧아졌다가 다시 생성되었다.

데미안으로서도 클레이브가 그 정도로 강력한 방어막을 두르고 있을 것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로서도 섣불리 두 번째의 공격을 내지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클레이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마검의 기사로군.”

클레이브는 데미안의 힘에 감탄한 모양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였어. 어지간한 공격이 아니면 나의 방어막에 흠집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데 방금은 자칫 잘못했으면 방어막 자체가 소멸할 뻔했지.”

“하르페가 베지 못하는 것은 없을 터인데. 당신이 다루고 있는 그 불꽃, 평범한 불꽃이 아니로군요.”

“이쪽 세계의 법칙이 통용되는 마법의 종류였다면 자네의 그 마검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겠지. 그렇지만 이 불꽃은 이쪽 세계의 법칙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네.”

“당신은 알케비젼을 이끄는 자. 그렇다면 그 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 불꽃은 마족의 힘을 빌리고 있는 것 같군요. 내 말이 틀립니까?”

“정답이라네.”

클레이브의 말이 끝나자 그를 감싸고 있는 불꽃은 더욱더 커지면서 그의 주변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솔직히 내가 방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내가 지금까지 모은 실험체들을 자네들에게 빼앗기게 생겼으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였으니 내 쪽에서도 내 모든 것을 걸고 자네들을 상대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지금 클레이브를 감싸고 있는 힘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그 거대한 힘의 격류를 보면서 주환과 루카 역시 자신들의 무기를 들고 클레이브를 상대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섰다.

데스티나 일행을 둘러보면서 클레이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준비되었다면 이제부터 한번 나를 즐겁게 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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