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클레이브는 계속해서 그 탄환들을 맞으면서 주환에게 다가갔다.
클레이브를 감싸고 있는 것은 분명 불꽃이었지만 그 불꽃에 탄환이 닿는 순간 물결 모양의 파문이 퍼져 나갔다.
“그 정도 공격으로는 소용이 없는데 포기하질 않는군.”
연속해서 사격하던 주환은 곧 포기했다는 듯 사격하는 것을 멈추었다.
“이걸로 끝인가?”
“아니. 아직 한 가지 더 남았는데.”
주환은 그렇게 말하면서 탄창을 산성탄으로 바꾸었다.
“호오. 아까와는 달라 보이는군.”
“확실히 다를 테니까. 한번 받아보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무서워서 피할 것 같은데.”
주환이 도발을 했지만 클레이브는 그러한 도발에도 여유가 넘칠 따름이었다.
“한번 해보게 얼마든지 받아 줄 테니.”
클레이브의 자신감에 주환은 그를 향해서 산성탄을 발사했다.
클레이브를 향해서 날아간 산성탄은 그의 오오라에 충돌하더니 껍질이 터지면서 노란색의 액체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산성 액체 역시 그의 오오라를 뚫지 못하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산성 액체를 보면서 클레이브는 미소 지었다.
“안됐군. 회심의 일격이었을 텐데.”
산성탄이 먹히지 않자 주환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져 갔다.
“그거 하나 믿고 있었던 모양인데. 솔직히 나쁘지 않은 공격이었네. 어설픈 상대였다면 치명적인 공격이었을 거야. 아니, 자네가 처음에 보여주었던 그 공격 역시 마찬가지이지. 그렇지만 문제가 있다면 자네를 지금 상대하는 것이 바로 나라는 거야.”
주환은 다가오는 클레이브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됩니까?”
“뭔가?”
“당신은 알케비젼 가문의 사람입니까?”
주환의 물음에 클레이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어째서 궁금한 거지?”
“확실히 사실인가 보군요.”
“알케비젼의 사람 정도가 아니야. 내가 바로 알케비젼 가문의 가주이니까.”
“저는 알케비젼의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지?”
“이브.”
“이브?”
“네. 이브 알케비젼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자네가 내 손녀를 알고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주환이 놀랄 차례였다.
“이브가 당신의 손녀란 말입니까?”
“그래. 자네는 이브와 무슨 사이지?”
“지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제야 알겠군.”
클레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브의 의뢰를 받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모양이로군.”
그의 말에 주환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엮인 건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당신이 알케비젼의 사람이라는 것도 우연히 들은 거죠. 그런데 이브가 당신을 죽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아이는 우리 가문이 얻게 된 힘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으니까. 그러니 가주인 나를 원망하고 있을 테지.”
클레이브의 대답에도 주환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제물이라고 했지만, 이브는 멀쩡히 살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의 예상 밖이었어. 설마 이브의 목숨을 받아가기 위해서 간 마족이 오히려 이브를 지키는 것으로 마음을 바꿀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
“설마. 그게 타마두크를 말하는 겁니까?”
“그래. 맞아. 이브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계약에 따른 제대로 된 힘을 받지를 못했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손녀를 희생해야 하는데, 당신은 단지 힘을 얻지 못한 것에만 아쉬움이 있는 것 같군요.”
주환의 말에 클레이브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는 내 손녀의 지인이라면서 알케비젼 가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우리는 말이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진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라면 가족의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가문이지. 이제야 알겠는가?”
말을 마친 클레이브는 주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자네도 더는 저항할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 곧 편하게 만들어 주겠네.”
클레이브가 주환을 죽이려고 할 때 갑자기 포탑이 연달아 발사되면서 세 발의 소화탄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자 클레이브는 곧장 고개를 돌려 날아가는 소화탄을 눈으로 좇았다.
“저게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클레이브는 그제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환에게 끌려다니면서 포탑과 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이브는 재빨리 몸을 돌려서 소화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주환이 그의 뒤에서 재빨리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퍼벅!
주환의 총에서 발사된 산성탄이 클레이브에게 명중했지만 역시나 산성탄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클레이브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딴 무기로는 소용이 없다니까…….”
클레이브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뭐지……? 몸에서 힘이.”
클레이브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클레이브는 자신의 실수로 주환의 공격이 조금이라도 먹혔다고 생각했지만 산성탄은 여전히 그의 오오라를 뚫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클레이브는 자신을 맞춘 산성탄 중 단 한 발에서 나온 용액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클레이브는 조금씩 희미해지는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방금 클레이브가 맞은 것이 주환이 노리고 있던 진정 마지막의 노림수였다.
아까 주환이 엘레나와 의료실에서 만났을 때 엘레나는 주환에게 수면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었으며, 주환은 이온에게 시켜 수면약을 만들어 엘레나에게 건네주었었다.
그리고 엘레나가 나갔을 때 이온은 주환에게 수면약이 조금 남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주환은 잠시 생각을 한 끝에 탄창에서 산성탄 하나를 빼고는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교체해서 수면탄을 만들어 줄 수 있겠냐고 이온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이온은 남은 수면약을 사용해서 수면탄을 만들었지만 남은 수면약이 워낙 적었기에 수면탄은 단 한 발밖에 만들지 못했다.
그렇기에 주환은 산성탄이 들어 있는 탄창 하나에 수면탄을 넣고 그것을 사용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일반 총알과 산성탄으로 클레이브를 공격했던 것은 지금 이 수면탄을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수면탄 안에 있는 수면약의 약이 매우 적었기에 효과를 보려면 반드시 상대를 맞추거나 상대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탄이 터져야 한다.
그리고 단 한 발밖에 없었기에 혹시나 클레이브가 피해 버리기라도 한다면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었다.
일반탄과 달리 산성탄을 베이스로 하는 수면탄은 그 속도도 다소 느리므로 클레이브가 피할 확률이 더 높았다.
그렇기 주환은 계속해서 무의미한 공격을 함으로써 클레이브로 하여금 자신의 공격은 전혀 피할 필요조차 없는 공격이라고 느끼게끔 했다.
클레이브가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그 순간.
수면탄은 발사되었고 그것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클레이브는 그것을 그대로 몸으로 받았다.
산성탄은 액체이기 때문에 클레이브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지만 수면탄은 달랐다.
수면약은 공기에 노출되는 순간 바로 기체로 기화해 버린다.
클레이브 역시 숨을 쉬어야 하므로 아무리 방어 능력이 출중한 오오라도 기체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주환의 계획은 들어맞았지만, 주환이 포착하지 못한 부분이 존재했다.
그것은 클레이브가 흑마법사란 사실이었다.
흑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몸에 다양한 약물을 실험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에 높은 수준에 오른 흑마법사들은 그 신체가 독극물과 같은 약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클레이브는 수면약의 효과를 어느 정도 방어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는 엄청난 수면욕과 싸우고 있었지만, 결코 잠들지 않았다.
잠들기는커녕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떨어지고 있는 소화탄들을 향해서 손을 벌렸다.
그러자 그에 맞추어서 클레이브의 보랏빛 불꽃이 다시금 불꽃의 팔로 변화했다.
“안 돼!”
주환은 클레이브를 막기 위해서 그의 등을 향해 달려나갔다.
* * *
타닷!
데스티나 일행이 절벽을 오르기 위해서 계단으로 달려갈 때, 데스티나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데스티나 님!”
데스티나는 절벽의 아래쪽에 있는 작은 동굴에 달린 철창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안에서 서 있는 촌장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촌장!”
데스티나 일행은 곧장 촌장과 정착민들이 갇혀 있는 감옥 쪽으로 다가갔다.
“저희를 구하러 오셨군요!”
데스티나가 가까이 오자 촌장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철창의 바깥으로 손을 뻗었다.
데스티나는 촌장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잘 견디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끌려온 사람들은 전부 다 여기에 있는 것인가?”
“네. 다 여기에 있습니다. 아. 단 한 사람만 빼고 말입니다.”
“그게 누구지?”
“그 데스티나 님이 데려오신 동료분이 없습니다.”
‘주환을 말하는 거로군.’
촌장이 말하는 것이 누구인지 데스티나는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이어지는 촌장의 말에 데스티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분은 저쪽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셨습니다. 처음 보는 여자분이랑 같이 올라가시던데요.”
“여자?”
데스티나와 루카는 동시에 그렇게 외치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어떤 여자와?”
“그건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이상한 분위기의 여자였는데 그 시종분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보였습니다.”
“가까운 사이?”
데스티나의 얼굴이 혼란에 빠지자 촌장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빨리 꺼내 주시면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기분 나쁜 곳에서는 한시도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알았다.”
철창문의 잠금장치를 부수려던 데스티나는 로즈버드 빌리지의 정착민들 역시 벌레에 감염되어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까 비를 내리던 그 이상한 기구가 망가져 버렸는데.’
데스티나는 불꽃의 팔이 하늘을 날고 있던 소화탄을 붙잡고 던져 버렸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 치료의 비를 내리던 기구는 분명 주환이 보낸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 그 한 번의 시도가 끝인가? 그럼 실패하고 만 건가?’
생각을 하던 데스티나는 그것이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번의 시도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데스티나는 툴레오의 검을 들어서 잠금장치를 잘라 냈다.
그리고 안쪽에 있는 인원들이 빠져나오려고 하자 데스티나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붙잡았다.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아직은 나올 때가 아니다. 바깥은 아직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그럼 대체 언제 나갈 수가 있는 거죠?”
“바깥을 주시하고 있다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걸 신호로 받아들이면 된다.”
“비가요?”
“그래.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곧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끌고 나가서 그 비를 맞도록 해야 한다. 그때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도록.”
“만약 비가 내리지 않으면요?”
“그렇다면 우선 계속 기다릴 수밖에. 그때에는 우리가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자네들을 구해 줄 테니.”
데스티나의 설득에 촌장이 이해를 하자 데스티나 일행은 그들을 뒤로하고 촌장이 이야기한 계단을 이용하여 절벽의 위쪽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