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계속해서 기도로 데스티나 일행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있던 아르테어는 어느덧 자신에게도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의 축복은 광범위한 지역에 있는 동료를 축복할 수 있었지만, 그 축복이 효력을 낼 수 있는 일정 거리가 존재했다.
그렇기에 데스티나 일행이 싸우기 위해서 점차 안으로 들어갈수록 아르테어 역시 협곡의 안쪽으로 깊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거리를 좁히자 그녀의 존재가 감염자들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감염자들의 일부가 아르테어 쪽을 바라보더니 그녀에게 덤벼들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르테어는 자신의 기도를 멈추었다.
데스티나 일행에게 계속 축복을 내리면서 자신의 몸까지 지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지팡이의 위쪽을 잡고 당기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붉은색의 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르테어가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으려고 할 때, 그녀의 뒤에서 수십 명의 인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테어는 지팡이 안에 검을 다시 집어넣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앞장서서 달려오고 있는 갈로스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갈로스의 뒤에서는 싱클레어와 성전 기사단의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서 달려오고 있었다.
“아르테어 님!”
싱클레어가 아르테어를 발견하고는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아르테어는 곧장 당나귀의 기수를 돌려서 그들을 향해서 달려갔다.
“싱클레어 님!”
아르테어는 싱클레어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신 거죠?”
“아.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 되어서 후발대를 다시 또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2차 선발대를 보냈고 그게 바로 저희죠.”
싱클레어는 앞에 서 있는 갈로스를 가리켰다.
“그리고 로즈버드 빌리지에서 저 친구를 만났는데 저 친구가 피리 신호를 받자마자 달리기에 저희도 미친 듯이 뛰어서 이동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의 행군이었죠.”
“2차 선발대를 꾸리신 건 정확한 판단이셨어요,”
“그런가요? 지금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싱클레어의 물음에 아르테어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싱클레어는 곧장 기사단원들에게 외쳤다.
“지금 저기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적들은 사실 조종당하고 있는 평범한 주민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제압을 목적으로 한다. 모두 포승줄을 가지고 있겠지!”
“예!”
“제압한 상대는 바로 포승줄로 제압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라!”
“만약 포승줄이 부족하면 어떻게 합니까?”
단원 중 한 명이 질문했다.
“그럼 포승줄을 최대한 잘라서 여러 명을 묶어라. 그러고도 부족하다면!”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질문한 단원의 허리 쪽을 툭툭 쳤다.
“너희가 쓰고 있는 벨트라도 벗어서 묶어 버려! 바지는 내려가게 하지 말고. 알았냐!”
싱클레어의 농담에 단원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싱클레어는 옆에 서 있는 갈로스에게 말했다.
“갈로스 공. 공은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좀비 골렘을 막아 주길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제가 온 힘을 다해서 막을게요.”
“좋습니다. 자. 모두 날붙이는 집어넣고 제압봉으로 무장해라!”
싱클레어의 명령에 단원들은 허리춤에 매고 있던 날이 없는 제압봉을 꺼내 들었다.
“자. 그럼! 돌격!”
싱클레어의 명령에 갈로스와 성전기사단원들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르테어는 앞으로 달려 나가는 성전기사단의 단원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축복을 내리고 있었으므로 아르테어는 피곤함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지만 그녀는 기도를 올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밀어붙여라!”
달려 나가는 성전 기사단.
그들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는 감염자들.
두 무리가 서로 충돌하자 엄청난 충돌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갈로스는 높이 점프하여 감염자들을 뛰어넘은 다음 좀비 골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침 좀비 골렘은 데스티나 일행을 덮치려고 하는 중이었다.
“멈춰!”
갈로스는 마치 미식축구 선수처럼 어깨를 사용하여 좀비 골렘의 다리를 들이받았다.
갈로스의 키는 좀비 골렘보다 작았지만 워낙에 단단하고 힘이 좋았기 때문에 좀비 골렘으로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쾅!
좀비 골렘의 다리가 확 꺾이면서 좀비 골렘은 바닥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갈로스!”
데스티나와 루카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데미안은 감염자들을 밀어붙이면서 협곡의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는 성전 기사단을 발견했다.
“싱클레어.”
성전 기사단의 무리에서 무지막지한 완력으로 감염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싱클레어를 보면서 데미안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단장님. 원군이 왔군요.”
데스티나 역시 성전 기사단이 등장하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와주었군.”
데스티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지만 지금까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데미안이 손을 뻗어서 데스티나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 주었다.
“단장님.”
데미안은 데스티나를 부축하면서 말을 이었다.
“단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장님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 * *
주환과 이온이 포탑으로 하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함선 내부에서도 상당히 낮은 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지금 의료실의 화물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보낸 치료액은 포탑의 하부에 도착해 있을 터였다.
“여기예요.”
두 사람이 포탑의 하부로 통하는 입구에 도착하자 이온은 문을 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포탑의 하부에서는 여러 가지 기계 장치들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이온은 재빨리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 화물 엘리베이터의 문이 설치되어 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화물 엘리베이터의 알림판에는 화물이 도착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이온이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서 그 안에 있던 치료액을 담은 통과 손수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온과 주환은 손수레를 꺼낸 다음에 포탄의 내용물을 충전하는 기계로 끌고 갔다.
그곳으로 간 이온은 주환에게 기계의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이곳에서 비어 있는 포탄에 내용물을 채울 거예요. 제가 비어 있는 소화탄들을 가져올 테니까 이 기계에 치료액을 채워 주세요.”
설명을 다 들은 주환은 기계에서 호스를 빼내어 치료액이 담겨 있는 보관통과 연결했다.
그리고 기계를 작동시키자 기계는 호스를 통하여 치료액을 힘차게 빨아들였다.
한편, 이온은 포탑 하부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창고로 들어가 비어 있는 소화탄의 몸체를 찾아냈다.
그녀는 그중 몇 개를 들어 손수레에 실은 다음 주환이 있는 곳으로 손수레를 밀고 왔다.
이온이 소화탄의 몸체를 들어서 기계에 장착하자 기계의 탱크에 보관되어 있던 치료액이 소화탄에 충전되기 시작했다.
이온은 주환에게 다음 계획을 설명했다.
“이제 소화탄에 치료액이 다 충전되면 기계가 저절로 채우는 것을 멈출 거예요. 그러면 여기 있는 버튼을 눌러 주세요.”
그러면서 이온은 천장을 가리켰다.
주환이 고개를 들자 기계에 달린 탄 공급용 파이프가 천장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이 소화탄이 자동으로 파이프를 타고 위로 올라가서 장전될 거예요. 대부분 과정이 자동이니까. 걱정하실 건 없어요.”
“탄이 몇 개나 필요할까?”
“우선 가져온 치료액이 빠듯하니까 제가 가져온 소화탄 몸체에 최대한 치료액을 채운 다음에 차분히 위쪽으로 계속 공급해 주세요. 그리고 저는 위쪽에 올라갈 거예요.”
“위쪽에?”
“네. 저기 보이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하부에서 포탑의 몸체로 올라갈 수 있어요.”
이온이 가리키는 곳에는 과연 위층으로 통하는 철제 사다리가 있었다.
“포탑 몸체에는 조준 장치가 있어요. 조준 장치가 멀쩡한지 확인할 수 있고 소화탄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저밖에 없으니까요. 주인님은 지금 하나 완성된 소화탄을 위로 올려보내 주세요. 우선 먼저 하나 쏴보도록 할게요.”
“알겠어. 맡겨 둬.”
주환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자 이온은 곧바로 사다리를 타고 포탑의 몸체 쪽으로 곧장 올라갔다.
포탑의 몸체 안에는 마치 전투기의 그것과 비슷하게 생긴 조종석이 있었다.
조종석에 앉은 이온은 자신의 목의 뒤쪽에서 와이어를 뺀 다음 조종석에 연결했다.
위잉.
그러자 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조종석의 패널들과 화면들에 불이 들어왔다.
그 추락 속에서도 포탑 자체는 그렇게 큰 타격을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래에서 소화탄이 장전되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이온은 포탑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 정도면 양호해. 좀 불안정하긴 하지만 내가 조준을 보조하면 충분히 가능해.’
그때, 소화탄 중 하나가 장전되었다는 신호가 패널에 들어왔다.
그러자 이온은 조종간을 잡고는 소화탄이 가장 적절한 위치에 떨어질 수 있는 각도와 조건을 계산했다.
‘지금이야. 지금이면 충분할 거야.’
모든 준비가 끝나자 이온은 조종간에 달려 있는 버튼을 검지로 당겼다.
* * *
“드디어. 너도 이쪽으로 넘어오게 되었구나. 고고한 척하는 기사에서 이 시대에 걸맞은 진정한 생존주의자로 말이야.”
데미안이 감염자들을 베어 버렸을 때 갑판의 위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클레이브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데미안과 좀비 골렘과의 싸움이었다.
데미안의 좀비 골렘의 공략은 클레이브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대부분 녀석들은 저런 상대를 만나면 당황하거나 공포에 질리기 마련인데. 데미안 저자는 당황하거나 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아주 재미있는 친구야.’
데미안이 좀비 골렘의 팔을 밟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 좀비 골렘의 머리를 노렸을 때 분명 데미안은 좀비 골렘을 쓰러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떠한 골렘이든 내부에는 중심이 되는 ‘코어’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좀비 골렘의 경우 그 코어는 바로 머리의 안쪽에 존재했다.
그렇지만 데미안은 좀비 골렘을 쓰러뜨릴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그는 좀비 골렘의 머리를 밟으면서 뒤로 뛰어 데스티나를 구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의 감염자를 베어 버림으로써 데스티나의 뜻을 반하게 되었다.
“너는 기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지. 아니. 너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시대에 기사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기사라는 것들은 사람을 죽이면서도 자신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자신에게 핑계를 대며 프라이드를 지키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식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거든.”
클레이브는 실로 즐거워 보였다.
“자기 자신은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타인의 희생을 틈타 고고한 척하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손을 더럽히는 일이 있더라도 기꺼이 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야. 그런 면에서 데미안 너는 충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질이 보이는군. 싹이 보여.”
데스티나의 일행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던 클레이브는 협곡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성전 기사단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