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크악!”
화염의 구체가 추종자에게 명중하면서 추종자는 온몸에서 타는 듯한 작열통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엘레나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추종자 중 마지막 남은 자를 쓰러뜨리고는 곧장 옆에 있는 계단으로 올랐다.
루시아는 역시 숏소드를 뽑아든 채로 계속 엘레나를 따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좌우로 열 수 있는 쌍여닫이문이 있었는데, 그녀가 그 문을 밀자 여닫이문은 쉽게 안쪽으로 밀리면서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입구를 만들어 주었다.
엘레나와 루시아는 몰랐지만, 그곳은 바로 오르페우스호의 휴게소로서, 함선의 모든 선원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좌우로 도열되어 있는 최신식의 운동 기구들이었다.
러닝머신에서 부위별 운동 기구, 덤벨과 바벨, 그리고 파워 렉 등등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 트레이닝 룸이 두 사람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엘레나. 이것들은 다 뭘까?”
루시아의 물음에 엘레나는 운동 기구들에 가까이 가서 그것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함선이 충돌했을 때의 충격 탓인지 잘 정리되어 있었을 덤벨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덤벨 중에서 가장 가벼운 덤벨을 들어보던 엘레나는 그것들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예전에 기사들이 이런 종류의 도구들로 몸을 단련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아마 이 하늘을 나는 배를 사용했던 사람들도 이런 기구들을 사용해서 신체를 단련했겠지.”
엘레나와 루시아는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그곳은 바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바였다.
왼편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어서 주문한 음료수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눌 수가 있었으며 오른편에는 바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어 바텐더가 그곳에서 주문을 받은 음료수를 제작할 수 있었다.
지금 바 테이블에는 바텐더가 존재하지 않았다.
엘레나와 루시아는 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은 엘레나와 루시아를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다.
물론, 두 사람이 사는 이 세계에도 술집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함선 안에 존재하는 아이템들의 세련됨은 그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엘레나는 바의 안쪽으로 들어가서 바 테이블의 뒤쪽에 진열되어 있는 술병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엘레나는 그중 하나를 들어서 뚜껑을 열어 본 뒤 냄새를 맡아보았다.
확 올라오는 알코올의 향기.
살짝 맛을 본 엘레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술이잖아.”
루시아 역시 엘레나를 따라서 술병을 열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냄새가 이상해.”
“여기도 볼 것은 없는 것 같은데.”
그때, 엘레나는 어디선가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레나는 루시아를 이끌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바의 옆쪽에 있는 방이었는데 그 방으로 통하는 문은 열려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암막 커튼으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가려져 있었다.
대화 소리는 그 암막 커튼의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밀치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둠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입구의 맞은편 벽에서 광범위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로 소규모의 극장이었다.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좌석.
지금 스크린에서는 영화가 한 편 상영되고 있었다.
스크린의 안에서는 두 명의 남녀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엘레나가 들었던 말소리는 바로 영화 속 배우들의 대사였던 것이다.
“환술인가?”
영화가 상영되는 구조를 알 리가 없었던 엘레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은 단 한 명뿐이었다.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자는 비를 쫓는 자들이 입는 검은 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지만, 그 로브의 크기는 상당히 작았다.
그는 두 사람이 들어온 것을 알았는지 앉아 있던 좌석에서 일어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서 있었으며 스크린의 빛을 등지고 있었기에 생김새를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키가 어린아이처럼 작았기에 두 사람은 그가 자신들이 쫓던 그 소년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소년 쪽이었다.
엘레나와 루시아가 스크린에서 나오고 있는 빛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누나.”
소년이 입을 열었을 때 루시아는 그 소년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그가 자신의 동생임을 확인했다.
“페드로?”
“맞아, 누나. 나야. 페드로.”
“페드로. 역시. 살아 있었구나!”
루시아가 감격하여 페드로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엘레나가 루시아의 팔을 붙잡았다.
“엘레나?”
루시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엘레나를 돌아보자 엘레나는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소년이 네 동생인 건 확인되었지만, 우리 편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어.”
“그런 걸 확인할 필요가 없잖아. 페드로는 내 동생이야. 분명히 우리를 도와줄 거야. 반드시 그럴 거라고!”
루시아는 이어서 페드로에게 외쳤다.
“페드로! 빨리 누나랑 같이 이곳에서 벗어나자. 지금 너를 구하기 위해서 많은 분이 도와주고 계셔. 이제는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나 페드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얼른!”
루시아의 재촉에도 페드로는 요지부동이었다.
“페드로. 정말로 네가 우리를 도와줄 마음이 있으면 지금 우리 쪽을 공격하고 있는 감염자들을 멈춰 줘. 가스파르에게 들었어. 여기에 있는 감염자들의 정신을 조종하고 있는 이가 바로 너라는 걸.”
“가스파르 씨는 입이 싼 사람이네요. 어차피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요.”
냉정한 페드로의 목소리에 루시아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페드로…….”
“페드로. 지금 당장 감염자들을 멈춰!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 그 이유라도 들어야겠어.”
“그건 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어째서지?”
“클레이브 씨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페드로! 그자는 우리 부모님을 죽인 사람이야. 그뿐만 아니라 우리 정착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죽였단 말이야. 너도 봤잖아. 네 눈으로 직접 봤잖아!”
“아아. 봤지.”
페드로의 목소리에는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누나. 나는 지금 수많은 사람을 조종할 수 있어. 물론, 아직은 완전한 능력이 아니야. 녹색의 비로 만들어진 벌레에 감염된 인간만을 조종할 수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의 인간과 동시에 연결된 적이 있어. 그렇게 하면 내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도 있지만, 역으로 그들의 기억이 내 쪽으로 흘러들 때도 있거든.”
“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페드로?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조금만 더 들어봐. 그렇게 되면 말이야. 나는 수천 명이 될 수도 있으면서 그 수천 명이 하나가 될 수도 있어. 그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 무슨 기분이 되는 줄 알아? 이 세상의 일 같은 것들은 그냥 개미들 세상의 일처럼 느껴져. 나는 서 있고 구멍의 이곳저곳을 이동해 다니는 개미들을 보고 있는 거지.”
페드로는 엘레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제 당신들을 도와서 클레이브에게 복수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는 거지? 이런 멸망한 세상에서 지옥에 가까운 생활로 돌아갈 뿐이잖아. 그리고 이곳에 온 사람들은 성전 기사단이지. 나는 들었어. 성전 기사단은 다시 황제를 세울 생각이라는 걸. 세상을 이렇게 만드는 데 일조한 황제를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을 도와서 무슨 발전이 있다는 거야?”
실제로 황제를 찾으려는 것은 성전 기사단 중 데스티나뿐이었지만 페드로는 성전 기사단 자체가 황제를 다시 세우려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페드로 너는 속고 있는 거야. 그건 진짜, 네 생각이 아니잖아? 너는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 뿐이야.”
“누나 말이 맞아. 나는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몰라. 그렇지만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클레이브는 내게 복수할 권리가 있다고 했어. 그렇지만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를 경험해 보라고 했지.”
페드로는 손을 들어서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화를 가리켰다.
“누나.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여? 저 사람들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그런 거지 같은 소굴에서 언제 좀비에게 죽을지도 모른 채 겁내며 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게 너무나 많았던 거야. 클레이브는 내게 모든 것을 만끽한 다음에 그래도 그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자신을 죽이라고 했어. 누나. 지금 클레이브를 죽이면 내 마음은 편해질 수도 있지만 새로운, 더 나은 미래는 오지 않을지도 몰라. 클레이브가 가져온 그 미래를 내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그를 내 손으로 죽여도 늦지 않는단 말이야.”
페드로는 두 사람을 향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의 압력에 루시아는 할 말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그때, 페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레나가 분노의 사자후를 질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 멍청아!”
엘레나는 꽤나 분노했는지 그녀의 기다란 귀가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네 누나를 아프게 하면서, 그리고 너희 부모님의 복수까지 미루면서 얻겠다는 게 그런 미치광이가 만들어 내는 미래라는 말이야? 생각이 없는 거에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너의 그따위 얼치기 같은 투정이나 받아 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당신이 알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어차피 엘프. 엘프는 자신들의 입장 빼고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면 이런 거지 같은 곳까지 올 리가 없잖아, 이 멍청아. 너는 클레이브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바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천만에. 지금 수많은 사람이 이 미쳐 버린 세상을 고쳐 보겠다고 노력하고 있어. 지금 너를 구하러 온 사람들 역시 그런 사람들이야. 그리고 네가 그렇게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동안 밖에 있는 그 사람들에게는 시시각각 위험이 찾아오고 있단 말이야.”
“그건 당신들의 사정일 뿐이죠.”
“정말로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네.”
엘레나는 결심했다는 듯 자신의 손마디를 꺾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 같이 정신이 썩어 빠진 녀석은 힘으로 말을 듣게 하는 것도 방법이야.”
“결국 그렇게 나오는군요.”
페드로는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검은색의 로브를 벗어 버렸다.
그는 검은색의 로브 안에 바지 하나만을 입은 채였다.
어둠 속에 눈이 익숙해진 엘레나와 루시아는 그의 등 뒤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무언가들을 볼 수 있었다.
페드로의 등에 감추어져 있던 6개의 다리.
그것은 벌레의 다리에 가까웠으며 페드로의 등가죽은 그야말로 끔찍한 형태로 변이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