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이온이 녹색의 비를 가지고 실험에 몰두하고 있을 때.
순간 이온이 손을 들었다.
그것은 목소리를 낮추어야 한다는 신호였기 때문에 주환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이온은 의료실의 바깥쪽 복도가 조금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다.
의료실의 문은 방음이 잘 되어 있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음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의료실 쪽으로 오는 것 같아요.”
주환은 살금살금 의료실의 문 앞으로 다가가 의료실의 문에 귀를 대고 바깥의 정황을 살폈다.
이온의 말대로 의료실의 바깥쪽에서 작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감지해 낸 주환은 더욱더 자세히 귀를 기울였다.
“대체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잖아. 이곳은 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거야? 복도는 좁고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우선 좀 더 찾아보자. 엘레나.”
밖에 있는 이들의 대화를 듣던 주환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의 목소리 중 어린 소녀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화의 중간에 들렸던 엘레나라는 이름.
주환은 의료실의 문을 열고 복도 쪽으로 나갔다.
“엘레나!”
주환이 복도로 나갔을 때 그를 맞이해 주는 것은 그를 향해서 날아오고 있는 마법의 불화살이었다.
퍽!
불화살의 끝이 주환의 가슴팍에 명중하자 그가 입고 있는 방탄복의 마법 방호기능이 작동하면서 불화살의 공격을 막아주었다.
그러나 그 충격을 모두 받아낼 수는 없었기에 주환은 뒤쪽으로 밀리며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윽!”
“뭐야. 주환이잖아!”
엘레나는 벽에 부딪힌 주환을 보고는 그제야 자신이 누구를 공격했는지를 깨달았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적인 줄 알았잖아!”
그때 이온은 즉시 자신의 하던 일을 멈추고 의료실의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검은 머리의 엘프가 밖으로 나간 주환을 공격하는 광경.
당연히 검은 머리의 엘프는 이온에게 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감히 주인님을!”
이온은 바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상대도 만만치가 않았다.
검은 머리의 엘프, 즉 엘레나는 공격을 피하면서 바람의 정령이 만들어낸 진공의 창을 이온에게 여러 개 던졌다.
그러자 이온은 손을 펴서 전자기 방어막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자 전자기 방어막에 진공의 창이 충돌하자 두 힘이 서로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그것을 보고 놀란 이온이 엘레나에게 파고들려고 할 때 뒤에서 주환이 두 사람을 말렸다.
“둘 다 멈춰. 다 같은 편이야.”
그 목소리를 들은 이온의 손은 엘레나의 바로 얼굴 앞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손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녀의 손이 엘레나의 얼굴을 파고 들었겠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손을 거두려던 이온은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그녀의 복부 쪽에 엘레나의 손이 멈추어 있었다.
이온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면 엘레나의 손에 맴돌고 있는 진공의 칼날들이 그녀의 복부를 찢어 놓을 것이 확실했다.
두 사람 모두 손을 거둔 뒤 엘레나는 주환을 보며 물었다.
“잠깐 주환. 우리는 네가 지금까지 갇혀 있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엘레나의 말에 주환은 고개를 저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싸움음 멈추었지만, 이온은 여전히 엘레나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같은 편이라면서 어째서 주인님을 공격한 거죠?”
“잠깐만! 내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건 저 녀석이라고! 그리고 주인님이라니. 너는 대체 정체가 뭐야?”
“자자. 너희 둘 다 좀 진정해.”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주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엘레나와 이온이 서로 보면서 화를 내고 있는 사이에 엘레나의 옆에 있던 루시아가 쪼르르 달려와서 주환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세요?”
“응? 아. 방어복을 입고 있어서 괜찮아. 그런데 너는 누구니?”
“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루시아라고 해요.”
“아아. 엘레나가 로즈버드 빌리지로 데려왔다는 애가 바로 너구나.”
“네. 주환님이시죠.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어요.”
“그래. 그나저나 너 동생을 찾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맞아요. 동생이 반드시 이곳에 있을 거라고 믿고 있거든요. 그래서 엘레나랑 간신히 이 안쪽까지 온 건데.”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온과 다투고 있는 엘레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 두 사람.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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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투던 엘레나와 이온을 말려서 간신히 의료실 안으로 데려온 주환은 그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러자 엘레나는 치료제를 만들고 있는 시설을 둘러보았다.
“그럼 지금 치료제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지?”
“응. 우선 대량으로 만들어 놓고 클레이브와 그 잔당들을 완전히 제압한 다음에 차근차근 감염자들을 치료해 줄 생각이었어.”
그러나 엘레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쩌면 그 치료제 지금 당장 필요할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주환의 물음에 엘레나 역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관해서 이야기 해주었다.
지금 바깥에서 데스티나 일행이 감염자들을 상대로 필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주환의 표정 역시 심각해졌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엘레나는 그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상태로 우리의 압박이 계속된다면 그 클레이브란 녀석은 감염자들이 단체로 자살하도록 명령을 내릴지도 몰라.”
“뭐라고?”
“단체로 자살하게 하는 명령이 쉬운지 어려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면서 우리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거지. 비를 쫓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녀석들이잖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야.”
“그렇다면 비를 쫓는 자들을 전부 제압한 다음에 치료하는 건 늦을 수가 있어. 무슨 수를 쓰든지 지금 당장 감염자들을 치료해야 해.”
엘레나의 제안을 들은 주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엘레나 너는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잖아. 치료제는 액체로 만들어질 거고. 그럼 물의 정령이 그 치료제를 조종해서 사람들에게 뿌리면 되지 않을까?”
주환이 위와 같이 제안했지만,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의 정령은 순수한 물이 아니면 그 액체에 깃들 수 없어.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전쟁 때 운디네를 인간 몸에 있는 피에 깃들게 해서 한 번에 인간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것도 가능했겠지. 그렇지만 그런 건 불가능해.”
주환은 이온에게 물었다.
“이온. 방법이 없을까?”
“찾아봐야죠. 우선 잠시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시간을 좀 주세요.”
이온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치료제를 만들고 있는 실험도구 쪽으로 돌아갔다.
“좋아. 우선 치료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수확이니까. 그렇지만 한 가지 방법에만 매달릴 수 없으니 우리는 우리가 처음 짰던 계획대로 움직이도록 할게.”
“감염자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그 소년을 찾는 것 말이지?”
“맞아. 둘 중 한 팀이라도 성공해야 해. 혹시 너는 우리랑 같이 갈 생각은 없어?”
주환은 엘레나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쪽도 원래 하려던 계획이 있으니까. 이온도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고.”
“좋아. 하지만 너무 많이 시간을 끌지는 마. 저쪽도 도움이 필요하거든.”
엘레나의 말에 주환은 지금 분투하고 있을 데스티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알았어.”
그때 엘레나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까 이곳에서는 이런저런 실험용액들을 만들 수 있는 거네?”
“그런 셈이지.”
“마침 잘되었네. 그럼 이걸 이용해서 약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엘레나는 자신의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주환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본 주환은 엘레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하. 그걸 만들려고 하는 거네.”
그러면서 주환은 자신의 탄창을 꺼내서 엘레나에게 보여주었다.
“다행히 나도 전투에서 다 써버리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그게 필요한 이유가 있어?”
“만약 감염자들을 조종하는 아이가 정말로 루시아의 동생이라면, 어떻게든 상처 없이 제압할 수 있어야 하니까.”
“알았어. 이온에게 물어보도록 할게.”
주환은 엘레나가 준 물건과 자신의 탄창을 들고 이온에게 다가가 그 두 가지 물건을 내밀었다.
“이온. 이 두 가지로 만들어 줘야 할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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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환과 이온에게 부탁했던 물건을 받은 뒤 엘레나와 루시아는 의료실을 떠났다.
엘레나와 루시아가 의료실을 떠나고 난 뒤 얼마 후 이온은 기다리고 있던 주환에게 외쳤다.
“주인님! 다 끝났어요!”
“드디어?”
주환은 이온에게 달려갔다.
이온은 시험관에 담겨 있는 하늘색의 액체를 주환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바로 치료제에요. 이게 주입되면 감염자들의 몸에 기생하고 있던 벌레들은 버티지 못하고 몸 밖으로 튀어나올 거예요.”
“그럼 이제는 이것 어떻게 하지? 아까 엘레나의 이야기를 들었잖아. 기다릴 시간이 없으니까 당장 이 약을 감염자들에게 주입해야 해. 방법을 생각해 둔 게 있어?”
“네. 하나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어요.”
“정말?”
“아까 갑판으로 올라갔을 때 포탑을 보신 적 있죠?”
이온의 말에 주환은 이온의 몸체가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서 갑판 위를 이동했을 때를 떠올렸다.
오르페우스호를 공격하는 적에게서 함선을 방어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대한 포탑의 위용이 주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기억나. 분명히 갑판에서 본 기억이 있어. 근데 그 포탑이 왜?”
“그 포탑은 분명 함선의 방어를 위해서 존재하는 포탑이지만 용도에 따라서 다양한 탄을 교체해 가면서 사용할 수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바로 소화탄이에요.”
“소화탄?”
“네. 소화탄은 소화액으로 가득 차 있는 탄인데. 한 번 발사되면 날아갔다가 목표지점에서 작은 프로펠러가 생성되면서 마치 민들레 씨처럼 떨어지죠. 그리고 사방에 달린 사출구에서 소화액을 분출해서 불이 난 곳을 빠르게 진압할 수 있어요.”
“잠깐만 그렇다면.”
주환은 이온의 설명에 따라서 소화탄의 다른 용도를 상상해보았다.
“그럼 그 소화탄 안에 들어 있는 소화액을 치료액으로 교체한 다음에 하늘에 쏘아 올리면 사방으로 치료액을 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잖아?”
“네.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였어요.”
“좋아. 그럼 당장 시작하자!”
“그렇지만 그 작전을 실행하려면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해요.”
“뭘 하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