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심상치가 않군요.”
데미안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저들은 지금 저희를 죽이기 위해서 오고 있는 거예요.”
“이거 큰일 났군.”
가스파르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묻어 있었다.
“저들이 누구인지 알겠나?”
가스파르가 묻는 것과 동시에 엘레나는 바람의 정령과 함께 날아올라 드롭킥으로 가스파르를 걷어찼다.
이번에는 정말로 강하게 걷어찼기 때문에 가스파르는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구르고 말았다.
엘레나는 가스파르의 가슴팍을 밟으면서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잘난 척하면서 헛소리하면 혀를 뽑아 주겠어. 저 사람들은 너희가 끌고 갔던 사람들이잖아!”
바닥에 쓰러진 채로 엘레나의 발에 밟혀 있던 가스파르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으면서 이죽거렸다.
“맞아. 저들은 우리가 데려간 사람 중에서도 벌레들이 완전하게 자리를 잡은 감염자들이지. 너희들이 쳐들어온 것을 보고 위에서 명령을 내린 거야. 너희를 완전히 말살하라고 말이지.”
가스파르는 고개를 들어서 데스티나와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특히 너희 기사들. 너희들이 저 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할 수 있을까? 그런 짓을 하면 기사의 이름이 울겠지. 안 그래?”
“최대한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힘으로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루카가 그렇게 말했지만 가스파르는 코웃음 쳤다.
“저들을 그냥 조종당하는 일반인으로 생각하지 마. 그거 알고 있나? 인간은 원래 사용하는 힘보다 몇 배의 힘을 더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인체가 스스로 몸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스스로 리미트를 걸어 놓은 거지. 그렇지만 벌레에 감염된 사람의 신체는 스스로 그 리미트를 해체해 버린다. 그렇기에 지치지 않고 몇 배의 힘으로 움직이지. 심지어 이들은 조종당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두려움조차 느끼지 않아.”
가스파르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데스티나 일행의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흘렀다.
어떻게 보면 차라리 파수꾼같이 거대한 괴수를 상대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은 힘이 몇 배나 강화되었으면서 공격적이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이겨 내야 하는 그러한 미션을 앞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막고 있는 이들의 숫자는 수십 명에 달했다.
협곡의 안쪽에는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 내 말을 들어 줘.”
데스티나는 일행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저들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돌파해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루카는 회의적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물론, 무작정 돌파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 루카. 네 짐에 공구가 있지?”
“응. 나는 항상 여러 가지 도구를 가지고 다니니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방패다. 방패가 있으면 저들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밀어붙일 수가 있어.”
“그렇지만 저희 모두가 사용할 만한 방패를 당장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데미안의 물음에 데스티나는 자신들이 왔던 길을 가리켰다.
“아까 데미안이 쓰러뜨렸던 파수꾼의 시체. 그 등껍질의 형태를 보니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낸 다음 손잡이로 사용할 수 있는 대용품만 달면 바로 방패로 사용할 수가 있다. 손잡이를 만드는 것은 루카에게 맡긴다. 그리고 껍질을 잘라 내는 것은 하르페로 충분하겠지.”
데스티나의 말에 데미안은 자신의 하르페를 꺼내 들면서 웃음을 지었다.
“하르페를 공구 대신으로 사용하는 것은 썩 당기지 않는 일이지만 단장님의 지시이니 어쩔 수가 없군요.”
“루카. 갈로스에게 지원 요청은?”
“아까부터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어.”
루카가 그렇게 대답하자 데스티나는 가스파르를 제압하고 있는 엘레나에게 말했다.
“엘레나. 지금 여기에서 가장 높은 기동력을 가진 이는 너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저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봉쇄하면 저들을 넘어서 곧장 저 하늘을 나는 배로 가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네. 그렇게 해서 저들을 조종하고 있는 우두머리를 제압하라는 이야기지?”
“그래. 우두머리를 먼저 제압할 수 있으면 이 싸움은 끝나게 된다. 만약 주환이 저기에 갇혀 있다면 주환을 구해 줘. 그는 분명히 도움이 될 테니까. 엘레나 너의 실력을 믿기 때문에 너를 혼자 보낼 수 있는 거다.”
“흐응.”
엘레나는 쓰고 있는 밀짚모자를 눌러쓰면서 가스파르에게서 발을 뗐다.
그러고는 데스티나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야. 우리가 살아남든지 저들을 살리든지 둘 중을 하나를 결정해야 할 수도 있어. 너희는 기사이지만.”
엘레나는 루카와 아르테어, 그리고 루시아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들은 기사가 아니야. 저들 역시 너희들이 지켜야 하는 대상 중의 하나란 말이지. 너는 계속해서 너의 신념을 지키고 싶겠지만. 우리와 저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쩔 생각이야?”
엘레나의 질문은 심플했다.
감염자들이 동료의 목숨을 빼앗는 순간이 올 때까지도 감염자들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그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 순간이 오면 나 역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나의 기사로서의 의지를 스스로 배신하지 않는 것.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짓은 할 수가 없다.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고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기사들이 해야 할 일일 뿐.”
“포부는 좋네.”
엘레나는 데스티나의 말에 수긍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 빨리 준비하자고. 저쪽에서는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들이닥칠 모양이니까.”
“알았다. 우선 모두 잠시 물러나도록 하자. 가스파르 너도 따라오도록.”
“쳇. 알았다.”
가스파르는 투덜대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말에 올랐다.
모두 준비가 되자 데스티나는 일행이 잠시 재정비를 할 수 있도록 파수꾼을 쓰러뜨렸던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명령을 내렸다.
* * *
잠깐의 작업 이후.
준비를 마친 데스티나 일행은 다시금 감염자들의 앞에 섰다.
파수꾼의 껍질을 잘라서 만든 방패를 들고 있는 이는 데스티나와 루카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방패는 전신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거대했으며 특이하게도 루카는 그렇게나 큰 방패를 양손에 하나씩 즉,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두 개나 들고 있으면 거추장스럽지 않겠나?”
데스티나가 루카에게 그렇게 물었다.
“우리 쪽은 사람은 부족하니까. 이렇게 양손에 하나씩 들면 막을 수 있는 면적이 두 배잖아? 그럼 더 많은 사람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겠지. 그리고.”
루카는 턱으로 데스티나의 옆에 서 있는 데미안을 가리켰다.
“저기 데미안은 방패를 아예 준비하지도 않았고.”
루카의 말 그대로였다.
데미안은 방패를 준비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손에 하르페를 들고 있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맨손 그 자체.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패를 들고 있으면 오히려 움직이는 데 방해가 돼서 말이죠.”
데미안은 자신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풀어 주면서 말을 이었다.
“맨손으로 하는 싸움은 오랜만인데 말이죠.”
그들은 천천히 걸으면서 감염자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가장 앞줄에 선 것은 데스티나와 데미안, 루카였으며 그 뒷줄에는 엘레나와 가스파르가,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아르테어와 루시아가 있었다.
맨 뒷줄에서 일행을 따라가면서 루시아는 고개를 들어서 함선 오르페우스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순간, 함선의 갑판 위에서 두 명의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명은 검은색의 로브를 입은 노인.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한 명의 소년.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루시아로서는 두 사람의 정확한 생김새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루시아는 그 소년에게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다.
루시아는 분명 일행들에게 말했었다.
가스파르가 말한 소년은 절대로 자신의 동생 페드로가 아닐 것이라고.
페드로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를 돕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지만 루시아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 보이는 얼굴을 알 수가 없는 소년.
그 소년이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동생일 수 있다는 바로 그 예감을 말이다.
“엘레나.”
루시아는 앞서서 걷고 있는 엘레나를 불렀다.
“왜?”
“아까 데스티나 님이 엘레나는 저들을 넘어서 바로 저 하늘을 나는 배로 올라가라고 하셨잖아?”
“그랬지.”
“그럼 나도 같이 데려가 줄 수 있어?”
“그건 위험해. 이곳에 있으면 유사시에 협곡의 바깥쪽으로 말을 몰아서 도망칠 수 있지만, 완전히 안쪽으로 들어가면 포위될 수가 있어.”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루시아는 손을 들어서 함선 갑판 위의 소년을 가리켰다.
“저 꼬마가?”
그 소년을 확인한 엘레나는 루시아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네 동생이 맞아?”
“그건 아직 몰라. 너무 멀어서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점점 내 동생이라는 확신이 들어.”
“네 동생이 비를 쫓는 자들을 돕고 있을 리 없다고 한 건 너잖아.”
“맞아.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을 거야. 협박을 당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정신을 조종당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리고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페드로의 누나이니까. 가족이니까.”
루시아의 이야기를 듣던 엘레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알았어. 그 대신 절대로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알겠지?”
“응. 약속할게!”
루시아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신의 허리에 매여 있는 숏소드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그것은 숏소드를 사용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 과감하게 사용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이제 코앞이다.”
데스티나가 모두에게 들리게끔 그렇게 외쳤다.
감염자들과의 거리는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데미안이 아르테어에게 외쳤다.
“아르테어 님. 축복을 준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데미안 님, 맡겨 주세요.”
데스티나 일행이 가까워지자 감염자들도 그들과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서로 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그 순간.
먼저 움직인 것은 감염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데스티나 일행에게 쇄도했다.
“막아라!”
데스티나와 루카는 앞에 방패를 앞세운 다음 전신에 힘을 주었다.
쾅!
그리고 충돌.
감염자의 무리가 데스티나 일행을 들이받았다.
데스티나와 루카는 방패를 들고 간신히 버텨 나갔다.
“크윽!”
데스티나는 툴레오의 갑옷을 이용하여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에 마나를 집중하여 밀리지 않을 수 있도록 마치 뿌리박은 나무처럼 굳건하게 버텨 나갔다.
“막는 것만으로는 안 돼!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야 한다! 밀어!”
데스티나의 외침과 동시에 데스타나와 루카는 필사적으로 감염자들을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