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유지하는 겁니까?”
주환의 물음에 로브를 입은 변이체는 자신의 세 번째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항상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에 몇 번 정도는 의식이 돌아올 때가 있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고.”
주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이온을 공격하려던 변이체들은 로브를 입은 변이체가 나타나자 갑자기 적의를 감추고는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사라져 갔다.
“당신이 저들을 돌려보낸 건가요?”
“그게 내 능력이지. 변이체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음파를 발사할 수 있네. 이 몸뚱이가 되는 것을 대가로 얻은 능력이지.”
주환은 그제야 아까 들었던 그 정체불명의 휘파람 소리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로브를 입은 변이체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당신. 아니, 계속 그렇게 부르기는 그러니 이름을 묻고 싶네요.”
“레브. 그냥 레브라고 부르면 되네. 자네들은?”
“저는 주환, 이쪽은 이온입니다. 그나저나 입고 있는 그 옷 때문에 물어보는 거지만, 레브 씨는 비를 쫓는 자에 속해 있던 마법사인가요?”
주환의 물음에 레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브는 여섯 개의 다리를 움직이면서 주환과 이온을 스쳐 지나갔다.
주환이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레브는 두 사람을 향해서 말했다.
“따라오게.”
“어딜 가려는 겁니까?”
“아까 이곳을 빠져나간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부터는 내가 안내하도록 하지.”
레브의 말에 주환과 이온은 서로 마주 보았다.
다른 수가 없었기에 두 사람은 곧 레브의 뒤를 따랐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가요?”
“나갈 수 있는 출구는 분명히 있네.”
레브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죠?”
“가보면 알게 될 걸세.”
주환과 이온은 레브가 이끄는 대로 계속해서 동굴을 나아갔다.
중간중간에 다른 변이체들을 마주쳤지만 레브가 그때마다 그 특유의 음파를 발사했기에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앞장서서 걷던 레브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까 나보고 비를 쫓는 자가 아닌지 물어봤었지?”
“그랬죠.”
“자네 말이 맞아. 나는 분명히 비를 쫓는 자들에 소속되어 있었지. 그들을 위해서 일했고, 그들을 위해서 실험을 하던 마법사였어.”
“역시 그랬군요.”
“비를 쫓는 자들이 사람들을 납치해 와서 인체 실험을 하는 이유는 결국에는 그 실험 결과를 자신의 몸에 적용해서 더 강한 힘을 얻고자 하는 거지. 처음에는 인간의 진화니 완벽한 인간이니 하면서 사람들과 추종자들을 속이지만 결국에 원하는 것은 한 가지야. 더 큰 힘. 더 강력한 힘일 뿐이지.”
레브는 힘에 겨운 듯 강하게 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그 속임수 빠진 어리석은 인간이긴 하지만 말이지. 나 역시도 실험으로 얻은 결과들을 바탕으로 내 몸에다 실험해 나갔지. 그때에는 실패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 내가 당하는 실패들도 이후에 있을 더 큰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될 거로 생각했거든.”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실험은 실패로 끝났나 보군요.”
“그래. 실패였지. 비를 쫓는 자들은 실패자를 용납하지 않아. 같은 편이었어도 말이지. 실험은 실패했지만 나는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그들은 가차 없이 나를 이 구덩이 안으로 던져 넣더군. 기적인지 아니면 몸이 변이된 것의 영향인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 그리고 깨달았어. 우리가 이곳에 버린 수많은 실험체들도 사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이 꽤 있었다는 것을.”
“당신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저는 당신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럴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내가 겪은 일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이지. 이 동굴의 어둠 속에 갇혀서 많은 시간을 생각했어. 그리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지. 나는 마법사라는 내 능력에 취한 나머지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지금은 이들에게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있지.”
걸음을 걷던 레브는 자리에서 멈추고는 뒤에서 따라오는 주환과 이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들은 어떤 사정인가?”
레브의 물음에 주환은 자신들도 비를 쫓는 자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친 상황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온의 정체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레브가 비를 쫓는 자들 출신이라는 점이 주환의 경계심을 샀기 때문이었다.
물론, 레브는 위험에 빠진 그와 이온을 구해 주었으며 그가 겪고 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에게 아직 비를 쫓는 자들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으리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그렇지만 주환은 우선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까 복수를 하겠다고 했는데 만약 이곳을 빠져나가게 된다면 도망치지 않고 놈들에게 맞설 생각인 건가?”
“이대로 도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하니까요.”
도망쳐서 동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주환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해야 로즈버드 빌리지를 찾아갈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군. 자네의 뜻이 그렇다고 한다면 나도 미약하나마 도움을 주어야 하겠지.”
레브는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걷던 세 사람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여기가 바로 동굴의 출구이지.”
“여기가 출구라고요?”
주환은 레브의 말에 의아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브가 가리킨 곳에는 나갈 수 있는 입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갈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원래는 있었지.”
“그럼 지금은요?”
“궁금하다면 더 가까이 가서 확인을 해보게.”
레브의 권유에 주환은 앞으로 더욱더 나아갔다.
그가 상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도록 이온 역시 그의 옆을 지켰다.
주환과 이온은 두 사람을 막고 있는 거대한 벽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주환은 그 벽을 만지고 나서야 레브가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그 벽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듯 자연적인 동굴의 벽이 아닌 건축물의 벽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비를 쫓는 자들은 자신들의 방법으로 이 입구를 막아 버렸지. 단지 토목 공사와 같은 방법으로 입구를 막은 것이 아니야. 그들이 사용한 것은 바로 마도 과학이네.”
“마도 과학.”
주환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마도 과학에 대해 이브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마법과 드워프의 기술을 혼합하여 만들어 낸 새로운 기술 체계로, 이후에 인간과 드워프 간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드워프가 마도 과학 분야에서 손을 뗐기에 현재는 인간들이 독자적으로 개발을 이어 나가고 있는 기술이었다.
“이 벽은 마도 과학의 결정체야. 허상도 아니고, 심지어 땅의 정령을 부려서 세운 것도 아니야. 겉보기에는 완벽하게 벽처럼 꾸며져 있지만 실은 문에 가까워.”
“어떻게 하면 열리는 거죠?”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이 문의 구조를 파악해야 해. 나는 마도 과학에 대해서 조금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 그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말이야.”
주환은 돌격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벽을 두드려 보았다.
그 정도의 충격으로는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방법이 없나.”
벽을 앞에 둔 채 주환은 그곳을 나가는 방법을 모색해 보았다.
그때.
주환은 이브에게 받았던 손거울을 떠올렸다.
‘잠깐 손거울은 순간이동 능력이 있었을 텐데.’
손거울의 순간이동 능력을 떠올린 주환은 곧바로 자신의 짐을 뒤졌다.
“찾았다!”
주환은 자신의 배낭 안에서 손거울을 발견했다.
주환은 손거울을 열어서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주환은 손거울의 상태가 예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손거울을 열면 스마트폰처럼 열어서 잠금 해제 표시가 떠 있어야 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어째서 작동을 하지 않는 거지?”
주환이 거울을 보면서 의아해하고 있을 때, 거울에 비치는 그의 얼굴 뒤에서 귀신처럼 빛나는 여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주인님…….”
주환은 놀라면서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몸에서 빛을 내고 있는 이온이 그를 바라보았다.
“뭐 하고 계신 거예요?”
“아니. 별건 아니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다른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고 느꼈는데.”
주환은 자신이 가진 거울에 대해서 설명했다.
“내가 가진 이 거울은 그냥 거울 아니야. 이 거울을 깨면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울이지. 이 거울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기억해 내다니.”
주환의 말에 이온이 반색했다.
“그래요? 그럼 바로 사용을 하면 되겠네요?”
“그렇지만.”
주환은 손으로 거울을 깨보았다.
쨍깡!
그가 거울을 깨버렸지만, 그 거울은 전혀 작동하질 않았다.
‘역시나 작동을 하지 않아.’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어째서 순간 이동이 불가능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주환이 엘레나를 처음 만난 날.
엘레나는 이브의 탑으로 억지로 쳐들어갔으며 그 때문에 이브는 자신의 탑에 있는 모든 순간 이동용 거울들을 폐기처분해 버렸다.
도착지에 거울이 없으니 그가 가지고 있는 손거울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사용해야 할 때에는 사용할 수가 없다니.’
주환이 아쉬워하고 있을 때.
레브는 주환 쪽으로 다가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손거울을 들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허.”
그 손거울을 보던 레브는 감탄을 내뱉었다.
“자네는 마법사인가?”
레브의 물음에 주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마도 과학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거지?”
“지인에게 받은 거니까요.”
“그래. 아쉬운 일이군. 자네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물건은 분명 마도 과학을 적용해서 만들어 낸 물건이네.”
“알고 있습니다. 이걸 만든 지인이 마도 과학에 조예가 깊으니까요.”
“그렇구만. 그런 손거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면 자네의 그 지인은 마도 과학에 통달한 마도 과학자일 걸세. 내가 아쉽다고 한 건 만약 자네가 마도 과학자라면 이 문도 다룰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확실히 아쉬운 일이군요.”
주환이 아쉬워하고 있을 때, 이온은 그가 들고 있는 그 거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주인님. 잠시만요.”
“왜?”
“제가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그러며 이온은 그의 손에서 거울을 받아들었다.
거울을 세밀하게 살피던 그녀는 그 거울을 가지고 동굴을 막고 있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온은 들고 있는 거울과 그 문을 번갈아 가면서 자세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주환과 레브는 그런 이온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윽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이온은 몸을 돌려 주환과 레브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뭔가 알아낸 게 있어?”
주환의 물음에 이온은 고개를 굳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주인님. 이 문은 제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