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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의 이세계 뽀개기-71화 (71/182)

71화

한편, 모두가 가스파르 때문에 분주할 때, 루시아는 어렵사리 엘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엘레나.”

“왜?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응. 그게…… 내 맘대로 행동해 버려서 미안해.”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 나를 끝까지 믿지 못했다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루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어. 엘레나는 엘프니까. 인간들의 일에 신경 쓰는 게 귀찮아진 게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를 이곳에 맡기고 떠나 버린 게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한 명이라도 더 강한 사람들의 힘을 빌리고 싶었어.”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데미안과 데스니타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엘레나는 약속을 지켜 줬어. 그래서 사과하고 싶어.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말이야. 엘레나, 정말 미안해.”

“사과 따위는 필요 없어.”

엘레나는 차갑게 대답했다.

자신이 용서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루시아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으니까 됐어. 그리고 네가 사과할 만한 일도 아니고 내가 사과받아야 하는 일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는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잘못한 것은 없어. 이건 다 어른들의 잘못이니까. 죄를 묻는다면 놈들에게 물을 거야.”

* * *

잡혀간 정착민들과 주환을 구하기 위해서는 가스파르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데스티나 일행은 아르테어가 가스파르를 돌보며 그를 회복시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촌장의 침실에 있는 사람은 가스파르와 아르테어 단둘뿐이었으며 나머지 인원들은 침실 밖의 응접실에 모여서 이후에 필요한 상황들을 논의하고 있었다.

아르테어는 침대에 누워 있는 가스파르를 세심하게 돌봤다.

그녀의 회복술에 따라 가스파르는 눈에 띄게 회복하고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날 것이 분명했다.

아르테어가 잠시 숨을 돌리 위해서 회복술을 멈췄을 때 가스파르가 서서히 눈을 떴다.

“깨어났군요.”

아르테어가 그렇게 말하자 가스파르는 고개를 살짝 돌려 아르테어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날 회복시켜 준 거로군.”

가스파르는 아르테어의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파루시아 교단 소속인가? 옷차림을 보니 그중에서도 고위 사제인 것 같은데.”

“그래요.”

가스파르가 움직이려고 하자 아르테어가 제지했다.

“아직은 누워 있는 것이 좋을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나?”

“그런 행동은 자신을 위해서도 좋지 않아요. 당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이 방안에 신성 결계를 쳐 놓았으니까요.”

가스파르는 아르테어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신성 결계는 인간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흑마법사에게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신성 결계는 흑마법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강력한 힘을 가진 흑마법사라면 그런 결계를 깰 수 있지만 지쳐 버린 가스파르로서는 그러한 힘을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방의 밖에는 데미안 님을 비롯한 모두가 모여 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의 안전을 책임질 수가 없어요.”

아르테어의 말에 가스파르는 알았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우선 항복을 하도록 하지. 걱정하지 마. 이 정도 경고를 들었는데도 의미 없이 반항을 시도할 생각은 없으니까.”

“감사하군요.”

“그나저나 결국에는 데미안까지 이 일에 끼어들고 말았군.”

“그분은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님이세요. 당신들 같이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의 소문을 들으셨으면서도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죠.”

“기사라는 족속들은 참으로 피곤하겠군. 그렇지 않아?”

“그분에 대한 무례한 발언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아르테어의 반응을 지켜본 가스파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알았어. 그 녀석에게 푹 빠졌나 보군.”

아르테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루시아 교단은 남녀 간의 애정에 대해서 금지하지 않던가?”

“저와 데미안 님의 사이는 그런 1차원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좀 더 신성한 인연으로 묶여 있죠.”

“신을 숭배하지 않고 인간을 숭배한다는 건가?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이야, 아까는 왜 그렇게 자신이 숭배하는 우상을 따돌리려고 했던 거지?”

“무슨 뜻이죠?”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하지 마. 분명 지금까지 기절해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침대에 눕혀질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금의 의식은 있었거든. 그렇기에 들려오는 대화들을 들을 수가 있었지.”

“듣고 있었군요.”

“그래. 당신은 나와 둘만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했지. 목소리에서나 반응에서나 그런 의도가 잘 느껴지더군. 어때. 내 말이 틀렸나?”

“계속 말씀하시죠.”

“당신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나에게서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겠지. 단둘이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마지막일 지도 몰라. 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날카로운 면이 있으시군요.”

“반은 넘겨짚은 거지만.”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당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그 녹색의 비, 그리고 그 비를 사용해서 진행했던 실험들의 데이터에 관심이 있어요.”

아르테어가 그렇게 대답하자 가스파르는 놀랐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파루시아 교단의 고위 사제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이번만큼은 내가 놀랐군.”

“물론 저는 사제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르테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순간 아르테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산전수전 다 겪은 가스파르마저도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게 할 정도였다.

“저는 흑마법에 더 조예가 깊은 사람이랍니다.”

“뭐라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테어는 가스파르의 목을 붙잡았다.

가스파르는 반항을 하려고 했지만 아르테어가 다른 손에 들려 있는 날붙이를 그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것은 그녀가 사용하는 치료용 메스였다.

가스파르가 긴장을 하며 마른 침을 삼키자 아르테어는 그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어차피 당신들을 소탕하면 그 모든 게 제 손에 들어오겠지만 데스티나 님이나 데미안 님은 고지식하셔서 그 모든 것들을 폐기해 버리실지도 모르죠. 그렇기에 미리 알아 두고 싶어요. 녹색의 비, 그리고 자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말이죠.”

* * *

이온에게 안겨 있던 주환은 구덩이의 바닥으로 무사히 착지했다.

주환이 고개를 들어서 함선의 바닥에 있던 입구를 다시 찾아보려고 했지만, 위쪽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공간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주환이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오르페우스 호의 갑판에서 확인했을 때 오르페우스 호의 선체는 분명히 계속 절벽의 꼭대기에 불시착해 있었다.

그렇다면 선체의 밑은 꼭대기의 땅바닥과 완전히 밀착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선체의 밑바닥에 있는 입구가 열리니 아주 깊게 파여 있는 구덩이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닐 거예요.”

주변을 둘러보며 이온은 말을 이었다.

“아까 주인님과 제가 떨어졌던 그 입구는 원래 실험실 안으로 곧장 필요한 화물을 싣거나 아니면 폐기물을 버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치예요. 실험실을 발견한 마법사들도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겠죠. 그렇지만 정작 열어 보니 바닥은 흙바닥으로 막혀 있었던 거고요.”

“그럼 어떻게 한 거야?”

주변을 보던 주환은 그 방법을 금세 깨달았다.

“설마 직접 다 파낸 건가?”

“맞아요. 물론, 지금 이 바닥의 벽을 보면 이 구간까지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확실해요. 아마 그들은 이 동굴을 발견했을 거고 위쪽까지 파낸 거겠죠. 일을 시킬 포로들은 넘쳐날 테니까요.”

이온의 말에 주환은 바깥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동하고 있던 감염자들을 떠올렸다.

“미쳤군. 대체 어느 정도로 실험해댈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큰 공간을 이어 버린 거야?”

“막는 사람이 없다면 이곳이 가득 찰 때까지 멈추지 않았겠죠.”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네. 구덩이가 아니라 자연 동굴이라면 반드시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실험체를 이곳에 버릴 정도면 그 출구가 열려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그래도 그쪽에 희망을 걸어 봐야죠. 그럼 제가 앞장서도록 할게요.”

이온은 몸에서 나오는 빛을 사방으로 비추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던 주환은 곧바로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까 바닥 입구를 통해서 떨어진 피험자와 마법사들, 그리고 추종자들의 시체였다.

“이 마법사들도 이 피험자를 당해내지 못했는데,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클레이브가 오자마자 단 한 번에 정리가 되어 버렸어.”

“클레이브라면 비를 쫓는 자들의 수장을 말씀하시는 거죠?”

“응. 처음에는 그냥 기분 나쁜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주환은 그의 옆에 서 있던 정체 모를 소년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뭐였을까?’

“그 사람을 물리쳐야 모든 일이 끝나는 거겠죠?”

“그러면 좋겠지만. 클레이브는 비를 쫓는 자들이 전국에 퍼져 있다고 말했어. 그렇다면 수장인 클레이브를 쓰러뜨린다고 하더라도 놈들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

주환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녹색의 비를 이온에게 보여 주었다.

“우선 이걸 얻을 수 있었으니까 확실하게 한 발짝 나아간 셈이야.”

주환은 녹색의 비를 다시 가방에 넣은 뒤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잠시 후, 이온과 주환은 동굴의 안쪽을 걸어 나갔다.

주환은 평소처럼 군복 차림에 완전 무장을 마친 상태였다.

그는 돌격 소총의 밑에 장착된 플래시 라이트를 장착해서 시야를 확보하고 있었다.

동굴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두 사람의 말수는 적어졌다.

클레이브의 말처럼 이 동굴의 안쪽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이 구덩이에 버려진 자들의 말로를 똑똑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한쪽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뼈 무더기들.

인간의 뼈 형태를 한 것들도 있었지만 변이된 이들의 특이한 뼈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뼈가 이런 안쪽에서도 발견된다는 이야기는.”

“구덩이 안쪽으로 떨어졌음에도 살아 있었던 실험체들이 이만큼이 많았다는 뜻이겠죠.”

“산 채로 버려졌다는 거네.”

두 사람이 그러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동굴 안쪽의 어둠 속에서 약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자 이온은 즉시 걸음을 멈췄으며 주환 역시 빛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총구를 겨눴다.

“무언가 있어요.”

“그래. 저쪽에서도 우리를 발견했다는 뜻인데. 하긴 이렇게 밝게 하고 다니면 발견하는 게 당연하겠지.”

“어떻게 할까요?”

“이 동굴은 일직선의 구조야.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가려면 이곳을 돌파하는 수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그럼.”

이온이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그녀의 양손이 열리면서 두 개의 에너지 권총이 튀어나왔다.

“주인님의 명령에 따라 이제부터 이곳을 돌파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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