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데미안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데스티나의 손을 잡으려고 했을 때 데스티나는 갑자기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자네의 뜻을 존중하네.”
“저의 손을 잡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나는 평생 기사로 살았고. 아직도 기사이다. 기사는 충성을 다하는 자. 자네가 자네의 길을 가겠다면 나 역시 나의 길을 가는 수밖에.”
“황제에게 가봐야 여전히 한낱 기사 중 한 명으로 남을 뿐입니다.”
“알고 있네.”
데스티나는 데미안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자네도 기사 된 자라면 기사의 의무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주게. 지금까지 나누었던 대화는 없던 걸로 하겠네.”
데스티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막사를 빠져나갔다.
데미안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데스티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이유를 고민해 보았다.
그렇지만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었기에 그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갔다.
다시금 이유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한 데미안은 데스티나의 뒤를 쫓으려 했다.
그때, 막사의 입구가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데미안은 데스티나가 다시 돌아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아르테어였다.
“데미안 님.”
“아아.”
데미안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평온함을 가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르테어 님?”
“루시아라는 아이가 깨어났기에 알려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렇군요. 잘된 일입니다.”
아르테어는 식사가 차려져 있던 식탁을 바라보았다.
데스티나의 자리에 있던 음식들은 다 비워지지 않고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데스티나가 테이블을 내리친 탓에 그릇에서 흘러넘친 음식들이 테이블보의 이곳저곳을 더럽힌 상황이었다.
“데스티나 님은 식사가 마음에 안 드신 건가요?”
“아니요. 식사는 좋았습니다. 단지 저와의 대화가 문제였던 것 같군요.”
데미안의 이야기를 듣던 아르테어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은 건가요?”
“그런 셈이죠. 분명히 권유 드렸지만…… 거절하셨습니다. 이해가 되지를 않는군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데스티나 님은 기사이시니, 아직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으실 테니까요. 심지어 아까 이야기를 들으니 황제를 찾기 위해서 마법사까지 고용하셨다죠. 그러니 그런 이야기들은 데스티나 님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우셨을 듯해요.”
“제가 너무 성급했던 건가요?”
“아뇨. 이런 이야기는 차라리 빨리하는 것이 낫겠죠. 그렇지만 저는 데스티나 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반대입니다.”
“어째서입니까?”
데미안의 목소리가 격해져 있었다.
아르테어 역시 그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데스티나 님을 올린다고 해서 그분에게 어떠한 큰 상징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데스티나 님은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셨기 때문에 이름이 알려졌긴 하지만 사실 모두가 다 알고 있죠. 성전 기사단의 진정한 리더는 데미안 님이시라는 걸요. 지금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도 바로 데미안 님이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데미안 님이 저희를 직접 이끌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아르테어의 말에 데미안은 분노한 듯 식탁 위에 있던 음식 그릇을 들어 막사의 벽 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릇이 막사의 벽에 부딪히면서 음식 얼룩을 남기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분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계속 그분만을! 그분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저 때문에 꿈을 버렸다는 등의 말씀을!”
아르테어는 분노에 찬 데미안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살며시 그의 뒤쪽으로 다가가 양팔로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데미안의 등에 대었다.
두근두근.
데미안의 뛰는 심장이 아르테어의 귀에 들려왔다.
“안심하세요. 모든 일은 잘될 겁니다. 데스티나 님이 없으셔도 데미안 님은 잘 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지요.”
아르테어의 부드러운 속삭임에 데미안은 자신의 온몸에 차 있던 분노가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군요.”
“무엇인 말인가요?”
“아르테어 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느새인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니 말입니다.”
“저는 그저 데미안 님의 도움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가요.”
아르테어가 데미안에게서 떨어지자 데미안은 품속에서 종전 협약서를 꺼내 들었다.
“이제야 뭔가 깨달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을 깨달으셨습니까?”
“데스티나 님이 저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 말입니다. 데스티나 님은 저의 제안을 거절하신 게 아닙니다. 저 자체를 거절하신 거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바로 이겁니다. 종전 협약. 이제 전쟁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저희 같은 기사들도 필요가 없게 되죠.”
[너는 검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어릴 적 데스티나의 목소리가 데미안의 귀에 감돈다.
“그분은 저의 재능을 높게 산 겁니다. 그 재능을 발휘할 곳이 없으면 저 자체가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이 종전 협약서를 보시자마자 데스티나 님의 반응이 달라졌어요. 이제 전쟁은 필요 없고 저라는 존재도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아르테어는 데미안의 목소리에 광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데미안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전쟁이 있어야 기사도 있는 겁니다. 즉, 저의 재능은 전쟁이 있어야만 성립이 되는 것이죠.”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며 식탁에 켜져 있는 촛불에 종전 협약서를 태우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종전 협약서를 꼼꼼하게 불태워서 완벽히 재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저는 다시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겁니다. 그분은 지금은 저의 진심을 모르시지만 이제 곧 알게 되시겠죠.”
데미안은 손에 묻어 있는 재를 입으로 훅 불어서 없앤 뒤에 아르테어를 바라보았다.
“아르테어 님은 저를 배신하지 않으실 거죠? 저랑 끝까지 함께하실 겁니까? 그렇습니까?”
데미안의 물음에 아르테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끝까지 데미안 님과 함께할 겁니다. 데미안 님이 어떤 길을 걸으시든 저는 그 뒤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 * *
엘레나와 가스파르.
두 사람은 대치 중이었다.
엘레나는 이미 양손에 살라만다를 소환한 상태.
둘 중 한 명만 먼저 움직여도 바로 전투가 일어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 같군.”
가스파르가 그렇게 말하자 엘레나는 온몸의 마나를 강하게 회전시켰다.
“네 쪽에서 올 생각이 없으면 이쪽에서 갈 생각인데.”
“그래? 그럼 잠깐 기다려 주겠어? 나는 조금 준비가 필요해서 말이야.”
“뭐?”
엘레나가 잠깐 당황한 사이에 가스파르의 뒤편에 있던 건물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엘레나는 처음에는 그들이 가스파르의 동료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가스파르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엘레나의 착각이었다.
그 두 사람의 얼굴은 가스파르와 완전히 똑같았다.
“너희가 쓰러뜨렸던 내 분신은 편의상 1호기라고 부르도록 하지. 이번에 너를 상대하기 위해서 준비한 것은 2호기와 3호기다.”
3명이 되어 버린 가스파르를 보면서 엘레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2호기나 3호기니 해도 누가 누구인지를 대체 모르겠는걸? 옷에 번호라도 쓰고 다니지 그래?”
“그래서야 분신을 두는 의미가 없겠지. 아무튼, 이 둘이 너를 상대해 줄 것이다. 2 대 1은 좀 치사할 것 같으니 우선은 2호기를 보내도록 하지.”
가스파르가 손짓하자 분신 중의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분신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엘레나에게 돌진했는데 그는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살짝 공중에 떠 마치 피겨 스케이팅 선수처럼 움직였다.
엘레나가 왼손을 앞으로 뻗자 불덩어리들이 2호기에 폭사 되었다.
2호기의 속도를 의식해서 여러 개의 구체를 날린 것인지만 그 의도가 무색하게도 2호기는 빠른 움직임으로 그 모든 불덩어리를 피해 냈다.
“화염 공격은 과연 위력적이지만 맞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
가스파르의 말대로였다.
2호기는 여유 있게 불덩이들을 피하고는 엘레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렇지만 엘레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두 가지의 공격을 준비한 상태였다.
왼손에는 다수의 불덩이를 날리는 원거리 공격.
그리고 오른손에는 근접한 상대에게 강력한 폭발을 날리는 단발 공격.
2호기가 달려들자 엘레나는 오른손을 뻗었다.
“받아라!”
쾅!
엘레나의 손에서 마치 작은 대포가 발사되듯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공격이 2호기에게 적중했다면 2호기는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2호기의 몸은 위와는 다른 의미로 산산이 조각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간 형태를 버리고 몸을 이루고 있던 벌레의 무리로 변하여 엘레나를 포위해 버린 것이다.
“이따위 벌레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따끔!
엘레나는 예상치 못한 고통에 목덜미를 만졌다.
그녀가 만진 곳은 크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설마?’
엘레나는 자신의 주변을 돌고 있는 벌레들을 살펴보았다.
엘레나는 그것들이 1호기와 같은 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2호기의 몸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바로 벌이었다.
“이런!”
벌들이 맹렬하게 엘레나에게 합동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엘레나는 몸을 보호하는 불꽃의 방어막을 만들어서 벌들이 물러나게 했다.
그러고는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공중으로 떠올라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의 지붕으로 피신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가스파르가 엘레나를 비웃었다.
“2호기의 실체가 벌인 것은 예상하지 못했나 보군?”
“시끄러워. 조금 당황한 거뿐이야.”
“그래? 그래서야 마나가 남아나지 않을 텐데?”
가스파르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정령을 이용하는 마법이라고 해서 무작정 정령의 힘을 빌릴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령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 정령이 활동할 수 있는 ‘매질’이 필요했다.
간단하게 말해 불의 정령인 살라만더를 부리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된 불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엘레나가 매질 없이 정령들을 부릴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굉장한 양의 마나를 정령들에 매질 대신으로 지급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엘레나는 매질이 풍부한 바람의 정령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었다.
‘매질의 풍부함으로 따지면 땅의 정령인 노움도 좋지만.’
그렇지만 엘레나는 땅의 정령과 상성이 좋지 않아 그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그렇게 방심하고 있어도 되나?”
“뭐?”
그 순간, 엘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와 있던 것인지 이번에는 3호기가 그녀를 뒤쪽에서 덮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