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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의 이세계 뽀개기-57화 (57/182)

57화

“첩?”

“두 번째 부인. 두 번째 부인이 낳은 딸. 그게 나일 따름이다. 귀족인 아버지의 피를 이었기에 모두가 존중해 주고 있지만 나에게 남은 운명은 집안에 갇혀 있다가 다른 가문과 정략결혼을 하는 것뿐.”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까 기사들은 보통 다 남자들이 하는 거잖아? 그런데 집에서는 용케 네가 기사 학교에 갈 수 있게 해주었네?”

“꽤 긴 설득이 필요했다. 내가 강해지지 않으면 어머니를 지킬 수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으시지. 기사 학교에 다녀도 결국에는 내가 알아서 포기할 거로 생각하고 계실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귀족의 첩의 딸이 도달하게 되는 결말은 대부분 정해져 있으니까.”

“너도 꽤나 집안 사정이 복잡한가 보네.”

“어머니와 나는 언제든 이 집에서 쫓겨날 수 있는 처지였지. 지금도 별로 다를 것은 없지만. 그래서 언제나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 하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소문이라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었으니까.”

데스티나는 커튼을 손에 잡고 꽉 쥐었다.

“나는 강해질 거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어지고 나와 어머니의 편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살아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생각이다. 나는 성공한다면 검으로서 성공할 것이라고 마음에 정해 두었지. 아버지는 기사이시니까. 내가 아버지가 인정해 주실 만한 검사, 기사가 된다면 아버지는 나를 버리지 않으실 테니까. 내가 검으로서 가문의 영광을 드높인다면 어머니를 버리시지 않으실 테니까.”

데미안은 순간 데스티나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을 느꼈다.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반드시 아버지가 데리러 오실 거란다.]

훌륭한 인간이 된다면 성전 기사단인 아버지가 데리러 오실 거라는 믿음.

훌륭한 기사가 된다면 아버지가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두 사람은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묶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데미안이 무언가 더 말을 하려 할 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오며 시종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가씨.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갈아입으실 옷도 준비해 두었으니 씻고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스티나가 고마움을 표하자 시종장의 발걸음 소리가 방문 앞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자 데스티나는 데미안에게서 자신의 외투를 받아들면서 말했다.

“그럼 씻고 오도록.”

* * *

데미안은 목욕탕에서 몸을 씻은 후 시종장이 준비해 준 옷을 입고는 다시 데스티나를 만났다.

잠깐 본 것으로도 옷의 사이즈를 제대로 판단하였는지 시종장이 준비해 준 옷은 데미안에게 딱 맞았다.

데미안이 돌아오자 데스티나는 그를 이끌고 저택의 바깥으로 나갔다.

데스티나가 데미안을 데리고 간 곳은 바로 저택의 뒤뜰이었다.

뒤뜰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원도 넓었는데 여기도 꽤 크네.”

“조용해서 쉬기에는 좋은 곳이지.”

그렇게 말한 데스티나는 한쪽에 놓여 있는 두 개의 목검 중 하나를 집더니 그것을 데미안에게 던졌다.

데미안은 데스티나가 던진 목검을 받아들었다.

“뭐야, 갑자기 이 목검은?”

“너와 대련을 해보고 싶다.”

“뭐?”

데미안은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검술을 배운 적도 없다고. 너 설마 뒤탈 없이 때릴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해서 날 데려온 거냐?”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 목검으로 나를 진심으로 공격해 주었으면 좋겠다.”

“잠깐. 너 같은 귀족집 아가씨를 목검으로 때렸다가는 큰일이 난다고.”

“이곳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안심하고 공격해라.”

데미안은 당황했지만 데스티나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대체…….”

데미안은 거절하려고 했지만 데스티나의 기백에 눌러 쉽사리 거절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각자의 목검을 맞잡은 채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데미안으로서는 데스티나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은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럼 시작한다.”

“그래.”

데스티나는 발을 살짝 끌다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면서 목검을 휘둘렀다.

상대가 모르는 사이에 거리를 좁혔다가 단번에 뛰어드는 고급 기술이었다.

“으앗!”

딱!

깜짝 놀란 데미안은 자신의 목검을 들어서 데스티나의 공격을 받아 냈지만, 발을 헛디뎌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황급히 자세를 다시 취하려던 데미안은 데스티나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계속할 수 있나?”

데미안은 데스티나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데스티나는 손을 당겨 그를 일으켜 주었다.

“그래. 계속할 수 있어.”

“좋아. 그럼 계속한다.”

이어지는 목검의 대련. 이번에도 먼저 공격해 온 이는 데스티나였다.

첫 번째 공격은 데미안의 가슴을 노리는 찌르기 공격.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었기에 데미안은 피하면서 거리를 좁히는 것은 포기하고 안전하게 뒤쪽으로 물러섰다.

타닷.

그러자 데스티나는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한 번 더 스텝을 밟으면서 거리를 좁힌 다음 이번에는 데미안의 발목 쪽을 공격했다.

‘속임수였나!’

목검이 그의 발목에 닿기 전에 데미안은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데스티나의 목검은 데미안의 몸에 닿지 않고 지면 위를 스쳐 지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데미안은 또다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나?”

이번에도 데스티나는 데미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냥 넘어졌을 뿐이야.”

데미안은 데스티나의 도움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생각했다.

‘이런 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데미안의 의문과는 상관없이 다시 세 번째 대련이 이어졌다.

데미안은 이번에는 자신 쪽에서 먼저 공격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데미안은 데스티나를 향해서 목검을 휘둘렀다.

상대와의 거리를 생각하지 않는 조잡한 공격.

그렇지만 휘두르는 그 속도만은 예사롭지 않았다.

딱.

데스티나는 자신의 목검으로 데미안의 목검을 받아 내면서 단숨에 밀어붙였다.

그것은 방어함과 동시에 자신의 검 끝으로 상대의 목을 공격하는 고급 기술로, 검술을 모르는 사람은 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티나와 목검이 맞부딪쳤을 때 데미안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데스티나의 공격을 버티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데미안은 직감대로 자신이 잡고 있던 목검을 놓으면서 바로 바닥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 데스티나의 목검이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데미안은 앞으로 달려들어 데스티나의 팔을 잡았다.

처음에는 데스티나가 들고 있는 목검을 뺏을 생각이었지만 너무 힘을 줘서 달려들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 엉켜 뒤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앗!”

앞으로 넘어진 데미안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데미안은 자신이 데스티나의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데스티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무겁다.”

“아앗! 미안해!”

데미안은 깜짝 놀라면서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가 피해 주자 데스티나는 비로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 그게.”

멋쩍어진 데미안은 말을 잇지 못했지만 데스티나는 상관없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방금 어째서 목검을 버린 거지? 공격을 잘 막아 냈을 텐데.”

“그렇긴 했는데 뭔가 그대로 있다가는 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목검을 놔버렸거든.”

“목검을 버리는 것은 무모했지만, 위험할 것 같다는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어째서?”

“목검만을 쓰는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진짜 검은 검날의 모든 부분이 위험하지. 방금 내가 쓴 기술은 방어함과 동시에 힘으로 밀어붙여 검의 끝부분으로 상대의 목 줄기를 베는, 공수양면을 동시에 충족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이게 진짜 검으로 하는 싸움이었고 검을 버리지 않았다면 내가 당했을 거라는 이야기네?”

“그렇다. 물론, 검을 버린 행동도 그다지 현명하진 않았다. 방금 너는 몸을 숙여서 내 공격을 피했지만, 실전에서는 너도나도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아까 같은 일은 벌어지기 힘들지.”

“아아.”

데미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놀란 것은 데미안 네가 세 번 동안 단 한 번도 내 공격을 제대로 허용하지 않았다는 거다.”

“별거 아니야. 그냥 볼썽사납게 뛰고 넘어졌을 뿐인데, 뭐.”

“내가 보기엔.”

그다음에 이어지는 데스티나의 말에 데미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는 검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래. 이 생각을 처음 했을 때가 너를 처음 다리에서 만났을 때였다.”

“말도 안 돼. 그때는 그 돼지 같은 빵집 아저씨한테 맞은 기억밖에 없는걸.”

“너는 기억 못 할지 몰라도 나는 기억한다. 네가 근처에 있는 막대기를 들어서 그 빵집 주인의 머리를 맞힌 것을.”

“그건 우연일 뿐이야.”

“우연일까? 너는 분명히 상대의 공격을 막아서 흘려낸 다음 머리를 정확하게 공격했지. 데미안, 너 검술을 배운 적이 있나?”

“그런 걸 배웠을 리가 없잖아.”

“그래. 그렇기에 너는 재능이 있는 거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고.”

데스티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미안은 의문점이 생겼다.

“그렇지만 내가 검에 재능이 있건 없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걸 어째서 네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데?”

“나는 제대로 된 대련자가 필요하다.”

“말도 안 돼. 기사 학교에는 검을 잘 쓰는 학생들이 널렸을 거 아니야.”

“그건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를 진지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

“아.”

데미안은 비로소 데스티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사도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대련을 할 때 진지하게 혼을 담아서 대련해 주는 것을 느낀 적이 없다. 약자를 지키고 여성을 보호한다는 기사도 정신은 존중하나, 나는 여자가 아니라 한 명의 기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를 고른 거야?”

“그래. 이건 순전히 내 욕심이지만 너에게서 재능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네 말은 알겠지만 잘될 리가 없어. 너랑 실력 차이가 나는 나랑 대련한다고 해도 여전히 실력을 쌓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를 가르쳐 줄 테니까.”

“뭐?”

데미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가 나를 가르쳐 주겠다고?”

“그래. 시간과 장소는 대강 생각해 두었다. 시간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 그리고 장소는 내가 너를 처음 봤던 그 다리의 밑이 좋다고 생각한다.”

“잠깐만. 그렇게 멋대로 계획을 짜는 건 자유지만 나도 내 생각이라는 게 있잖아.”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해도 좋다. 다만 나는 너의 재능이 아깝다.”

“하나도 아깝지 않아.”

데미안은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검술을 익히고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나 같은 밑바닥 인생은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다고.”

“그 한계를 네가 정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나는 첩의 자식이긴 하나 남들보다 더 좋은 환경을 타고났기에 너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이 환경과 내 노력을 이용해서 내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고 싶은 게 뭔데? 최고의 기사가 되고 싶은 거야? 그렇게 해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야?

“모두가 능력에 맞추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

데스타나의 말은 진지했다.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서 데미안은 묘한 존경심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아버지란 존재에게 묶여 있을 때 이 아이는 아버지의 존재를 넘어서려 한 거구나.’

데미안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데스티나는 갑자기 생각난 듯 데미안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네 이름도 모르는군.”

“어. 맞네?”

데미안은 자신 역시 눈앞 소녀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로서는 소녀의 집에서 귀중품을 훔쳐 달아날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이름을 물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데미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데미안은 데스티나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데미안이야. 너는?”

“내 이름은 데스티나다.”

“데스티나. 좋은 이름이네.”

“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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