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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의 이세계 뽀개기-53화 (53/182)

53화

“헛소리.”

클레이브의 설명에 주환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그런 헛짓거리 말고 당신들 마법사들이 망쳐 놓은 세상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 놓는 연구나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의 세상에선 마법사들이 공공의 적이나 다름이 없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야. 이 세계에 마족들을 끌어들여서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바로 마법사들이니까.”

“잘 알고 있군요.”

“마법사가 실수한 것은 결국 마법사가 해결해야 하는 법. 그렇지만 한번 좀비가 된 인간들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해서 살아남은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정상입니까?”

“지식의 진보는 이런 시대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어떤 윤리, 도덕에 얽매지지 않고 모든 노력이 보답받을 수 있는 그러한 시대. 왕조가 무너지고 법과 질서, 겉치레가 무너졌을 때에야 새로운 시대를 열 수가 있지.”

“나는 이쪽 세계의 법이나 문화는 잘 모르겠지만 제 상식선에서 판단을 해보자면 방금 말한 것들은 현 왕조에 대한 반역의 의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음대로 해석해도 좋다. 우리는 이제 더는 현 왕조를 계승하지 않으니까. 아니. 우리는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인간이라는 종 자체도 계승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실험은 더욱더 진화된 완벽히 새로운 인간종을 탄생시키겠지. 그 새로운 종은 다시금 융성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낼 것이다. 서로 증오할 필요도, 전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종이 탄생하는 것이지. 지금 남아 있는 인간들이 그러한 위대한 진화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우리 비를 쫓는 자들 역시도 그러한 실험에 동참하여 목숨을 바칠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클레이브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주환은 총을 겨눈 상태로 그를 위협했다.

“수작 부리지 말고 다시 자리에 앉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다 전한 것 같은데, 자네는 어떤가? 여전히 우리에게 동참할 생각이 있는가?”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입니다. 나랑 내 동료가 너희 비를 쫓는 자들을 해체할 거라는 거.”

“이해하지 못하는군. 아쉬운 일이야.”

“항복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제 곧 이 나라 제일의 검사 데미안도 우리 쪽으로 합류할 예정이니까.”

“데미안이 합류를 한다라.”

주환은 클레이브가 당황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재미있다는 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가 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의 존재 자체는 변수이지만 변수를 통제하는 게 우리의 일이니까.”

“성전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이 당신들 같은 반역자들을 그냥 놔두지 않겠지. 당신들이 이곳 로즈버드 빌리지를 포기하고 떠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당신들을 반드시 찾아서 막을 겁니다.”

“자신만만하군.”

“제 동료는 다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거든요.”

“그래. 오늘 밤이 지난 후에도 자네의 그 자신만만한 태도가 이어지기를 바라지.”

“그게 무슨 소리죠? 내일 이곳으로 총공격이라도 할 셈입니까?”

“아니. 내일은 아무런 공격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서 방심시키려는 속셈이로군요.”

“의심이 참 많은 친구로군.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오늘 밤은 푹 자두라고.”

“댁이 언제 또 이 방에 나타날지 모르는데 폭 잘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내 제안은 잘 생각해 보게. 아직은 유효한 제안이니까 말이야.”

“그럴 일 없습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그 말만을 남기고 클레이브의 몸은 검은색의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서 어둠 속에 녹아들듯이 사라져 버렸다.

주환은 즉시 벽에 세워 두었던 돌격 소총을 집어 들고는 좁은 방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클레이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사라진 건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주환은 여전히 총을 든 채로 침대에 앉았다.

‘환영이었다지만 경비병의 눈을 피해서 여기까지 들어온 녀석들이야. 방심할 수 없어.’

주환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각오를 다지면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아, 참. 지금 얻은 정보를 다른 녀석들한테도 전달해야 해. 엘레나야 내일 만나서 이야기해 줄 수 있지만, 우리 두 사람이 자리를 비웠을 때 데스티나와 루카가 돌아올 수 있으니까.’

거기에 생각이 미친 주환은 수첩을 꺼내서 클레이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 * *

“끄응.”

잠자리에서 일어난 엘레나는 눈을 비비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숙소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졸음을 어느 정도 몰아낸 엘레나는 피곤한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의 옆에 놓여 있는 탁자에는 큰 물그릇이 놓여 있었으며 그 안에는 세안할 수 있는 물이 담겨 있었다.

엘레나는 물을 조금 떠서 얼굴을 씻고는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가 일찍 일어난 것인지 주변은 조용했다.

“그래도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지?”

얼굴을 씻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엘레나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밀짚모자를 뒤집어쓰고는 자신의 숙소를 나섰다.

아침 일찍 촌장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논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아, 참. 주환도 데려가야지.’

엘레나는 주환의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환의 숙소는 엘레나가 묵었던 숙소와 방 몇 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어제 엘레나가 방을 배정받을 때 주환의 방이 어디인지 촌장에게 물어보았기에 그 위치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똑똑.

엘레나는 주환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직도 자는 건가?”

엘레나는 다시 방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엘레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녀가 손잡이를 잡자마자 문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정착지 건물들의 방은 허름한 편이었기에 대단한 잠금장치는 없었지만 대신 문틈에 괴는 굄목이 있어서 안에 사람이 있을 때는 밖에서는 쉽게 문을 열 수 없었다.

“야, 주환. 문도 안 잠가 놓다니, 너무 방심하고 있는 거 아냐?”

엘레나가 안으로 들어가며 그렇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엘레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방 안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주환의 모습도,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방이 아닌가?”

엘레나는 침대를 살펴보았다.

침대의 이불이 흐트러져 있었기에 분명 누군가가 사용한 흔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장실을 간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해도 모든 짐을 다 챙겨서 화장실에 갈 이유가 없잖아?’

엘레나는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을 뒤지던 엘레나는 침대의 밑에 수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환의 수첩인가?’

그 수첩을 읽어본 엘레나는 비로소 비를 쫓는 자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야.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다니.’

수첩을 챙긴 엘레나는 곧 옆방들을 돌아다녔지만 모든 방이 비어 있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촌장을 만나러 갔을지도.’

엘레나는 숙소 건물을 빠져나갔다.

정착지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모두가 자고 있기에 그럴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해가 떠 있었기에 깨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해.’

엘레나는 즉시 촌장의 숙소로 이동했다.

촌장의 숙소로 가던 엘레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착지의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군.”

엘레나는 촌장의 숙소로 뛰어가서 숙소 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촌장!”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반겨 주는 이가 없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보았지만,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촌장이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지? 촌장, 주환, 경비병들이 모두가 다 자리를 비울 만한 일이 있나?’

거기까지 생각을 더듬어 가던 엘레나는 순간 다른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지금 이 정착지에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거 아니야?’

그렇다면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정착지의 분위기를 설명할 수 있었다.

엘레나는 즉시 정착지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는 건물이란 건물은 닥치는 대로 들어가며 이 잡듯이 뒤져 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정착지에 남아 있는 사람은 오로지 엘레나뿐이었다.

그렇다고 단체로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이사를 한 것은 아닌 듯했다.

주환의 짐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의 생필품과 짐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엘레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피용 땅굴까지 찾아가 보았다.

그렇지만 그곳 역시 텅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다들 어디로 간 거지?”

엘레나는 정착지의 중심부로 다시금 돌아왔다.

그녀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정착민들만 사라졌다면 모르겠지만 주환까지 사라진 건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그럼 어째서 나만 이곳에 남은 거지?”

“어째서 혼자인지 궁금한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엘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편에 서 있는 자는 바로 가스파르였다.

“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네가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니까 지금은 감이 잡히는데? 네가 정착민들을 빼돌린 거잖아?”

“그래. 그들은 모두 우리의 수중에 있다.”

“정착민들을 어떻게 이동시킨 거지?”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어. 그들 스스로 움직인 거니까.”

“방법은?”

“방법은 너희가 먹은 음식에 있지.”

엘레나는 전날 밤 정착민들이 벌인 파티를 떠올렸다.

“어제 기회를 봐서 벌레들을 이용해 미리 수를 써두었어. 정착지의 음식 저장고를 찾아서 저장된 음식들에 내 벌레들의 알을 심어 두었지.”

“벌레술사가 생각할 만한 방법이네.”

“그 벌레들은 평범할 벌레가 아니야. 음식에 열을 가하더라도 쉽사리 파괴되지 않고 인간의 몸에 들어가면 단시간에 부화하지. 그 벌레가 몸에 들어가 있는 인간은 내가 얼마든지 그들의 정신을 조종할 수가 있어.”

“그랬던 거네. 그래서 나는 멀쩡할 수가 있었던 거야.”

엘레나는 자신만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촌장에게 억지를 부려서 신선한 과일을 구해 오게 하였고 촌장은 정착지 안에 있는 작은 밭에서 겨우겨우 과일을 구할 수가 있었다.

가스파르는 저장고에 있는 음식들에는 손을 댔지만, 밭에 있는 작물에는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주환 역시 조금이긴 하지만 촌장이 준 음식을 입에 댔기 때문에 벌레에 감염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거 한 방 먹었네. 그런데 이런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어째서 정착지들을 돌아다니면서 살인을 일삼는 거지?”

“벌레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조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벌레가 빨리 부화한다고 하더라도 기생하는 인간의 뇌에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하거든. 하지만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것도 몹시 어려운 일이야. 특수한 영양제를 계속 공급해서 벌레가 굶어 죽지 않게 만들어 주어야 하니까. 그런데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는데도, 단 하루 안에, 그것도 수많은 인간을 이동시키는 무모한 작전을 성공해야 했지.”

“어째서?”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어. 바로 데미안의 존재가 변수였기 때문이지. 시간을 끌면 데미안이 이 일에 개입할 수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내 역량을 총동원하여 단 한 번에 정착민들을 이동시키는 계획을 실행한 거지.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어. 벌레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해서 간신히 걷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두를 우리의 아지트로 이동시킬 수 있었거든.”

“끌고 간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미안하지만 그 물음에는 대답해 줄 수 없군.”

“그럴 거로 생각했어. 이제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들어 주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또 벌레로 똘똘 뭉친 분신일 뿐인 건가?”

“아니. 나는 가스파르 본인 그 자체다.”

“잘됐네. 이제부터 너에게 실력 행사를 해서 정보를 얻어 낼 건데 또 내가 무서워서 분신이나 보내는 겁쟁이이면 어떡하나 해서 말이야.”

“엘프치고는 입이 좀 거칠군. 그렇지만 상관없다. 나도 너희와 제대로 된 싸움을 벌이질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거든. 너도 내 벌레에 감염시켜 데려갈 참이었지만 누가 더 강한지 실력을 겨뤄 보고 싶은 건 우리 같은 마법사들의 개인적인 욕심 같은 거니까.”

“전에는 정착민들이 이 싸움에 조금이라도 휩쓸릴까 봐 본 실력을 다 보여 주지 못했는데. 이곳에 아무도 없다면 그딴 거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그때, 엘레나의 양손에서 살라만다의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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