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발걸음 소리가 멈추었어.”
루카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그렇게 속삭였다.
계속해서 이동하던 두 사람은 괴목이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음을 깨달았다.
비상식적일 정도의 적막.
마치 무음의 세상으로 들어온 듯 주위에서는 거의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질 않았다.
동물들이 돌아다니는 발소리, 벌레의 울음소리조차도 없었다.
그것은 두 사람에게 정말로 묘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특히 루카는 숲속이라는 곳이 그렇게까지 완고하게 침묵을 지키는 그러한 공간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나름의 방법과 생활 양식을 고수하며 사는 숲속의 생명들.
숲에서는 서로의 존재성을 주장하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이 알게 모르게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루카로서는 이러한 고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숲이 너무 조용할 때는 조심해야 해.”
“아, 알고 있다. 숲을 행군할 때 숲속이 너무 조용하다면 매복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그 순간, 숲속에서 기다란 줄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식물의 넝쿨 줄기를 닮아 있었는데 굵기는 줄다리기에 쓰는 긴 줄과 비슷한 정도의 굵기였다.
“조심해!”
푸욱!
끝이 날카로운 창처럼 뾰족한 그 넝쿨은 데스티나가 반응을 할 새도 없이 그녀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부분에 넝쿨이 지나가자 상처가 생기며 피가 흘러나왔다.
데스티나의 팔을 스치고 지나간 넝쿨의 머리 부분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구부러졌다.
그리고 그물처럼 여러 가닥의 넝쿨들이 두 사람을 덮쳐 왔다.
데스티나의 다리와 허리, 그리고 팔은 넝쿨들에 꼼짝없이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넝쿨들은 상대의 몸을 휘감을 곳을 찾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이 숲은 왜 이렇게 묶는 걸 좋아하는 거야!”
루카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넝쿨들을 피해서 움직였다.
넝쿨들은 루카를 옭아매기 위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루카의 모습은 마치 그물 안에 들어간 커다란 꿩처럼 보였을 것이다.
데스티나는 넝쿨들을 뿌리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넝쿨의 섬유질은 베니어판처럼 단단하고 질겼다.
루카는 참마도를 휘둘러서 옆에 있는 나무를 단숨에 잘랐다.
그리고 옆차기로 잘린 나무를 단숨에 걷어찼다.
그러자 달려들던 넝쿨들은 루카 대신 날아온 그 나무를 휘감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넝쿨들의 신경이 잘린 나무에 쏠린 사이에 루카는 참마도를 휘둘러서 데스티나를 묶고 있는 넝쿨들을 잘라 냈다.
그러자 데스티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자.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루카의 말에 데스티나도 동의하였다.
넝쿨의 본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이상 그곳에서 계속 싸움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넝쿨들을 피해서 한참을 달리던 두 사람은 잠시 쉬기 위해서 자리에 멈춰 섰다.
“하아. 좀 쉬어야겠다.”
데스티나는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뒤의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러는 게 좋겠네.”
루카도 피곤해진 듯 짐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두 사람이라지만 계속해서 연달아 이어지는 싸움에는 지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 좀 마실래?”
루카가 짐에서 물통을 꺼내 데스티나에게 건넸다.
그 물통을 보던 데스티나는 어찌 된 일인지 손을 내저었다.
“나는 별로 생각이 없군. 강에서 물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야.”
자신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진 데스티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어진 루카 역시 피식 웃으면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데스티나는 옆에서 들리는 기묘한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까 강기슭에서 보았던 거대 자벌레 중 한 마리가 바로 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란 몸통과 윤기가 흐르는 껍질, 그리고 흑진주 같은 두 개의 눈알.
“어느새 나타난 거야?”
루카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데스티나는 거대 자벌레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기에 거대 자벌레들은 그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거대 자벌레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오로지 데스티나의 팔에 나 있는 상처였다.
그 자벌레를 관찰하던 두 사람은 아까 보았을 때와는 다른 명백한 차이를 알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등에 있는 커다란 노란색 구체였다.
타원형에 사람의 키보다 좀 큰 노란색의 구체는 자벌레의 등에 얹어져 있었는데, 자벌레의 등에서 솟아나 있던 4개의 뿔이 마치 거꾸로 매달린 인형 뽑기의 손처럼 그 구체를 받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대한 몸체를 한껏 흔들며 걸어가는 괴목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의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수많은 노란색 열매들.
탐스러우면서도 과일 같지 않고 보석같이 생긴 그 괴상한 열매가 지금 거대 자벌레의 등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어떡하지?”
“잠시 기다려 보도록.”
데스티나는 잠시 루카를 만류했다.
거대 자벌레는 데스티나의 팔에 가까이 붙어서 그 상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어딘가로 안내하려는지 머리로 데스티나를 약하게 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개가 주인을 어딘가로 데려가려 할 때의 행동과 상당히 유사했다.
“뭘 하는 걸까?”
“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우리를 지금 어딘가로 안내하려는 모양이다. 만약 이 벌레와 그 나무가 관련이 있다면 이 녀석을 따라간 곳에 그 나무가 있을지도 몰라.”
거대 자벌레가 앞장서고 두 사람은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목적하는 곳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을 이끌고 있는 것과 같은 거대 자벌레들이 주변에서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저 자벌레가 저 열매를 가지고 있는 걸까?”
루카는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대 자벌레들을 관찰하면서 그렇게 물었다.
“일종의 공생 관계일지도 모른다.”
“마치 진딧물의 엉덩이를 빠는 개미처럼 말이지?”
“그래. 저 자벌레도 그 괴목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고 그 대가로 열매를 받아 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저 열매에는….”
데스티나는 루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저 열매 역시 평범한 열매가 아닐 것이다.
그 열매의 안에는 다른 생명체들이 잠들어 있었으니까.
지금 앞장서고 있는 거대 자벌레가 등에 업고 있는 열매 안에도 분명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실루엣으로 보았을 때 산에서 사는 작은 들짐승의 한 종류일 것이다.
두 사람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쫓던 괴목은 한 넓은 공터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앉아 있었지만 하늘 높이 솟은 괴목의 위용은 여전했다.
마치 숨을 쉬듯 괴목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기에 가지에 노란색의 열매들이 그에 맞추어서 천천히 흔들렸다.
주변에서 돌아다니는 거대 자벌레들은 사실 대부분 그 괴목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장 낮게 있는 열매 쪽으로 다가갔다.
아무리 낮은 곳에 있는 열매라고 하더라도 건물의 2~3층 높이 정도에 매달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때, 두 사람을 안내했던 거대 자벌레가 괴목을 타고 올라갔다.
괴목을 타고 올라가던 거대 자벌레는 열매 중에 속이 비어 있는 열매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등에 달려 있는 열매와 그 열매를 능숙하게 교체했다.
그리고 비어 있는 열매를 등에 장착한 뒤에 다시금 괴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역시 이 둘은 공생 관계였어.”
“그렇지만 무엇을 위한 공생 관계인지 알 수가 없군.”
부스럭.
지금 들리는 발걸음 소리는 거대 자벌레들의 움직임 소리와는 달랐다.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세 명의 남녀가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중 남자들은 모두 하얀색의 갑옷과 붉은색의 망토 차림이었으며, 여성은 푸른색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기사 중 한 사람은 젊었지만, 그 옆에 있는 인물은 강인한 인상에 아주 짧은 머리 스타일을 한 중년 남성이었으며, 손에는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었다.
여성 사제는 푸른색의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손에는 나무로 된 지팡이를 든 채였다.
숲속에서 등장한 이들을 발견한 데스티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것은 데스티나와 루카를 발견한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특히나 그 일행 중 젊은 기사와 중년의 기사는 데스티나를 보자마자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 전쟁터에서 서로에게 목숨과 등을 맡겨온 사이들.
그런 그들이 이런 위험한 숲속에서 서로 우연히 다시금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람이 너무나 반가우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가고.
데스티나는 감격으로 가득 찬 얼굴로 서서히 입을 열었다.
“데미안.”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바로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 데미안, 그리고 데미안을 보좌하고 있는 성전 기사단 소속의 기사 싱클레어였다.
“단장님!”
데스티나가 먼저 입을 열자 그에 호응하듯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단숨에 데스티나에게로 달려왔다.
두 사람은 데스티나의 모습을 보며 그야말로 환희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데스티나의 앞에 섰다.
“단장님…….”
데스티나의 앞에 선 그 두 사람은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두 사람은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단장님. 무사하셨군요.”
“더 빨리 단장님을 찾아 모셨어야 하는데 그 불충함을 사죄드립니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사죄를 하자 데스티나는 몸을 숙이며 그들을 위로했다.
“괜찮다. 어서 일어나라.”
그러나 두 사람이 쉽사리 일어나지 않자 그녀는 자신 역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완전히 낮춘 뒤 그들을 향해 자신의 양손을 한 쪽씩 내밀었다.
“괜찮으니까 어서 일어나라. 이건 명령이다.”
데스티나의 명령에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강인하면서도 온화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데스티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그녀의 손을 잡자 세 사람은 동시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서로를 마주 보는 그들의 눈에는 서로를 향한 더할 나위 없는 애정이 담겨 있다.
“단장님! 살아 계셨군요!”
“그래! 너희도 살아 있었구나!”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외친 세 사람은 양팔을 펼치더니 서로가 동시에 서로를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