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가스파르의 벌레 몸이 완전히 붕괴해서 바닥에 흩뿌려지게 되자, 주환과 엘레나 두 사람은 바닥에 깔린 가스파르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죽은 건가?”
주환의 물음에 엘레나는 벌레들의 위에 손을 뻗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것은 마나의 흐름을 감지하기 위한 행동으로, 손으로 마나를 감지하던 엘레나는 눈을 뜨면서 주환의 물음에 대답했다.
“놈은 죽지 않았어.”
“응?”
엘레나의 말에 주환은 다시금 죽어있는 벌레들을 훑어보았다.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개체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이 상태에서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이건 그저 꼭두각시일 수도 있어.”
“꼭두각시?”
“방금 마나를 감지해 보았는데 아주 약하긴 하지만 마나의 선이 다른 곳까지 이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어. 감지하자마자 연결이 끊어져 버려서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이 벌레들을 조종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야.”
“어쩐지.”
주환은 이해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쓰러졌다고 생각하긴 했지.”
“스스로 오지 않고 꼭두각시만 보냈다는 건 이미 이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야. 아마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데미안일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솔직히 이런 타입은 상대하기 힘들어.”
“어째서?”
“충분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놀랍도록 신중하잖아. 나는 이 녀석들의 방심을 유도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우리가 방심하고 있었던 거야. 놈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으니까. 놈들은 사냥감이 아니야. 놈들도 사냥꾼이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사냥당할지도 몰라.”
“하아.”
엘레나의 설명을 듣고 있던 주환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 * *
가스파르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자신이 보낸 꼭두각시가 주환의 손에 파괴되었을 때까지도 가스파르는 여전히 자신의 꼭두각시와 마나적인 연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종자인 가스파르와 벌레 꼭두각시 간에 마나의 선이 연결되어 있음으로써 가스파르는 꼭두각시를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엘레나가 꼭두각시에 손을 대고 마나를 역추적하기 시작했을 때 가스파르는 바로 그 연결을 끊어 버렸다.
추적을 당한다면 지금 그가 있는 장소를 들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추적이 시작되자마자 막을 수 있었군. 마나 추적술까지 알고 있다니 그 엘프, 보통이 아니야.’
가스파르는 로즈버드 빌리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간단한 움집을 지은 뒤 그 안에서 꼭두각시를 조종하고 있었다.
지금 움집의 안에 있는 가스파르의 모습은 정착지 안에서 주환과 엘레나가 보았던 그 모습과 완전히 일치했다.
살아 있는 생물들에 흑마법을 걸어서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꼭두각시를 만드는 것이 가스파르의 특기 중 하나였다.
‘혹시나 데미안이 그곳에 있을지도 몰라 꼭두각시를 보낸 건데 예상과는 달리 이상한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었군. 아마 촌장이 수를 쓴 것이겠지. 그렇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협조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로군. 그 녀석들의 존재가 우리에 위협이 되는 정도는 아니지만 방심할 수 있는 수준 역시 아니야.’
특히 가스파르는 이상한 무기와 복장을 하고 있던 주환을 떠올렸다.
주환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꼭두각시의 중추 역할을 하던 벌레들이 박살 나 꼭두각시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정확히 중추 벌레들만을 골라서 파괴하다니.”
가스파르가 중얼거리는 순간 그의 코에서 한 줄기 핏물이 주륵 하고 떨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코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닦아 냈다.
아무리 꼭두각시라고 하더라도 꼭두각시를 조종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가스파르의 전신의 감각과 정신이 꼭두각시에 일체되어 있다.
그렇기에 꼭두각시가 가스파르 본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촌장이 대접했던 그 술을 꼭두각시가 마셨다고 하더라도 가스파르의 본체 역시 그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꼭두각시가 파괴되면 그 충격이 가스파르에게 전해졌다.
충격을 최소화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가스파르이지만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신기한 기술을 가진 녀석이었어. 만약 그놈을 생포할 수 있다면 ‘그분’도 좋아하시겠군.”
그렇게 말하며 가스파르는 자신의 움집을 떠날 채비를 하했다.
* * *
“헉헉.”
루시아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쫓아오던 ‘추격자’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뚝뚝.
루시아의 팔에서 떨어지는 핏물들이 그녀의 손가락에 맺혀 있다가 조금씩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움직임, 발소리, 발걸음, 그리고 흘러내리는 피까지.
모든 것이 추격자들을 불러 모으는 요소들이었지만 루시아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최소한 잠시라도 멈추어서 지혈을 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팔이 움직이지 않아.’
루시아는 피가 더 흐르지 않도록 다른 쪽 팔을 들어 상처 입은 팔의 상처 부위를 눌렀다.
지금 상처를 입은 팔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팔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하면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루시아는 추격자를 피해서 산길을 미친 듯이 헤매는 중이었다.
그녀가 길을 잃어버린 곳은 멀록산의 어느 한 지점이었다.
그녀는 촌장의 이야기에서 들은 대로 멀록 산을 넘어 데미안이 이끌고 있는 생존자 공동체를 찾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방향을 잘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윽고 루시아는 자신이 대단히 무모한 도전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길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산이라는 곳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주 다니지 않는다면 수월하게 다닐 길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 내려갈 수 있는 곳이라고 판단했지만, 막상 내려가 보면 위험한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 경우 역시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루시아는 산속에서 효율적으로 캠핑할 수 있는 방법조차 잘 알지 못했다.
그렇게 산속을 헤매다가 그녀가 겨우겨우 만나게 된 것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공격하려는 존재였다.
그러한 존재들을 만났을 때에야 루시아는 지금 숲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로 탈바꿈하였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루시아는 멀쩡한 팔로 앞을 막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치웠다.
수월하게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녀가 달리고 있는 곳에 제대로 된 길 자체가 없었다.
그녀는 팔로 나뭇가지들을 밀치고 풀들을 밟아 가며 도망칠 길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나아가던 루시아는 문득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루시아는 곧장 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물을 타고 도망가면 발자국과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소리를 쫓아갈수록 물이 흐르는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탁 트인 곳까지 나아갔을 때, 루시아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폭포였다.
당황한 루시아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뛰어내리기에는 높이가 너무 높았다.
강에 안전하게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슭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스슥.
풀이 스치는 소리.
루시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추격자는 이미 그녀의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갑옷을 두른 듯한 몸체
머리에 달린 두 개의 검은색 집게.
그곳에는 한 마리의 거대한 사슴벌레가 루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단순히 사슴벌레의 크기만을 키워 놓은 모습이 아니었다.
전신에 나 있는 날카로운 돌기와 거대한 검에 가깝게 변한 집게.
그것은 이미 흉포한 괴물 그 자체였다.
루시아의 팔을 다치게 한 것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이곳까지 그녀를 추격해 온 것이다.
“아앗!”
루시아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괴물 사슴벌레는 단숨에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지금으로서는 루시아가 그 괴물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루시아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자신의 근처에 있는 나무 중 가장 굵은 나무의 뒤로 몸을 숨겼다.
쿵!
괴물 사슴벌레는 개의치 않고 루시아가 몸을 숨긴 나무에 돌진하였다.
사슴벌레가 나무에 충돌하자 그 뒤에 있던 루시아는 엄청난 충격을 느끼며 튕겨 나갔다.
“안 돼!”
루시아는 몸이 가벼웠기에 공중에 뜬 그녀의 몸은 멀리 밀려나 뒤편에 있던 폭포 쪽으로 빠지고 말았다.
“어푸!”
루시아는 폭포의 격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물에 뜨기 위해서 계속해서 물장구를 쳤지만, 폭포의 강한 물살이 계속해서 그녀를 물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물 아래쪽으로 잠긴 루시아는 자신의 몸이 더욱더 아래쪽으로 끌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이 폭포의 끝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순간 루시아는 폭포를 따라서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 * *
축 늘어진 루시아의 몸이 강의 물결에 밀려 뭍으로 도달하였다.
계속해서 강물에 떠다녔기 때문에 그녀의 피부는 창백했다.
뭍에 떠밀린 루시아는 간신히 팔을 움직여서 자신의 몸을 완전히 강물에서 벗어나게 했다.
“우욱!”
루시아는 어쩔 수 없이 마셨던 강물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하늘을 보면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만약 괴물 사슴벌레가 이곳까지 그녀를 쫓아왔다면 그녀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만큼 루시아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하아. 하아.”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몇 번 심호흡하던 루시아는 더는 버티질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사삭사삭.
그때, 기절해 버린 그녀의 주변으로 무언가가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기절해 버린 루시아로서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땅바닥을 낮게 기어 다니는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발소리.
루시아에게 몰려들고 있는 정체 모를 존재들의 숫자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 * *
“그 루시아라는 아이는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
루카는 손에 들고 있는 참마도를 휘두르면서 데스티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루카의 참마도가 나뭇가지들과 덩굴들에 닿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런 식으로 산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참마도보다 훨씬 짧고 가벼운 정글도가 필수였지만 루카는 평소와 같이 놀라운 완력으로 참마도를 휘둘러서 빠르게 길을 만들어 나갔다.
“이미 데미안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그건 무리다.”
데스티나는 땀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길을 잃었을 게 확실하다.”
데스티나는 지도를 꺼내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지도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지만 루카와 데스티나 역시도 이 멀록산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었기에 새롭게 길을 개척해야 하는 데다가, 가장 문제인 것은 숲 자체에 가득 차 있는 일종의 독기가 데스티나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독기를 감지하고 있는 것은 데스티나의 기사로서의 감각으로, 그러한 감각이 자극받고 있다는 것은 지금 두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들이 숲 안의 곳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루시아도 우리처럼 이렇게 길을 만들면서 갔을 테니까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거나 사람 발자국이 있거나 하는 흔적을 찾으면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루시아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찾은 것 같아.”
“루시아인가?”
데스티나의 물음에 루카가 손으로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명백한 사람의 발자국과 나뭇가지를 부러뜨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의 크기가 작은 것을 보니까 루시아가 틀림없는 것 같아.”
“그럼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그 아이를 찾을 수 있겠군?”
데스티나의 목소리가 밝아졌지만, 루카의 반응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그러지 못할지도 몰라.”
“어째서?”
“여길 봐.”
루카는 주변의 풀에 묻어 있는 핏자국을 가리켰다.
“이건 피 아닌가?”
“맞아. 발자국의 주인이 루시아가 맞다면 지금 루시아는 다쳤을 거야. 그리고 핏자국이 말라 있는 것을 보니까 최근에 이곳을 지난 게 아니야.”
루카의 설명을 듣던 데스티나는 루시아에 대한 걱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도 서둘러 움직이도록 하자. 상처를 입었다면 지금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이 루시아의 흔적을 살펴보고 있을 때, 그들의 뒤에서는 두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존재가 살금살금 그들과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