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엘리나는 거기까지 말한 뒤 주환 일행을 쭉 둘러보았다.
“난 하겠다.”
데스티나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외도(外道)에 빠진 마법사들이 있다면 그 죄를 물어 그에 걸맞은 벌을 내리는 것이 합당할 터. 나는 성전 기사단의 전 단장이지만 악한 자들을 토벌하는 의무를 잊지는 않았다.”
“듬직하네. 나머지 사람들은?”
주환은 루카를 바라보았다.
루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환은 엘레나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이걸 생각하고 탑으로 온 거야? 너 처음에는 일을 도와줄 사람한테는 보상이 당연하다느니 잘난 척했지만 그렇다면 사실 너도 우리에게 부탁이 있었던 거잖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비를 쫓는 자들과의 싸움. 그 싸움을 혼자서 해결해 볼 생각도 가지고 있었지. 솔직히 말하면 난 정령 마법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상대는 마법사들이 다수. 여러 명의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나로서도 버거운 일이야.”
엘레나는 손을 들어 이브를 가리켰다.
“그러던 와중에 저 바보 제자한테서 연락이 왔지. 지금 쓸 만한 모험가들이 자신의 별장에 머물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직접 온 거야. 너희 실력도 한번 보고 싶었거든. 우르르 몰려가서 개죽음시키는 건 내가 의도하는 바가 아니니까.”
“그래서 억지로 이브의 탑으로 쳐들어간 거네. 괘씸한 제자를 혼내 줄 생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우리들의 실력을 시험해 볼 의도였던 거고?”
“당연히 제자 녀석을 혼내는 것도 포함된 일이지. 그리고 이렇게 억지로 들이닥쳐야 이브가 진심으로 우리를 막으려고 할 거 아냐? 그러면 이 검은 탑은 너희의 실력을 직접 볼 수 있는 괜찮은 시험장이 되는 거지.”
“그럼 네가 우리한테 일을 권했다는 건 우리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지?”
루카는 가슴을 한껏 펴면서 상기된 표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엘레나는 손가락을 펴서 허공에 선을 그었다.
“아주 아주 근소한 차이의 턱걸이 합격이라고 해야겠지.”
엘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 계약을 맺은 거야. 너희는 비를 쫓는 자들이라는 마법사 집단을 토벌하는 일에 협조해 주고 그 일이 끝나면 나는 영원의 교차점으로 가는 방법을 안내한다. 다들 동의하는 거겠지?”
* * *
쿵쿵쿵.
루시아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지금 촌장의 숙소 2층에 마련된 다락에서 생활하면서 정착지를 떠난 엘레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엘레나의 부탁으로 로즈버드 빌리지의 촌장이 루시아를 돌봐 주고 있긴 했지만, 루시아는 촌장 가족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눈치를 주거나 구박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촌장의 가족들은 그녀를 잘 돌봐 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규모가 있고 기반 시설이 잡혀 있는 정착지라고 하더라도 자원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좀비 사태 때문에 제대로 된 농사 시기를 놓쳐 버린 지금은 더욱더 그랬다.
‘손님이 찾아온 걸까?’
루시아는 다락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가까이 아래층의 상황에 귀를 기울였다.
촌장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엘레나가 다시 돌아온 걸까?’
루시아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촌장님.”
“무슨 일인가?”
그러나 손님의 목소리는 엘레나가 아니었다.
그는 정착지의 정착민 중 한 명으로 엘레나 역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루시아는 손님이 밤늦은 시간에 촌장을 찾아왔을 때에는 분명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놈들이 우리에게 요구한 기한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네.”
루시아는 비를 쫓는 자들이 로즈버드 빌리지를 노리고 있음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엘레나는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러 떠났으며 촌장은 엘레나가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엘레나란 분이 돌아오신다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좀 더 기다려 보세.”
“정말 그렇게 쉽게 풀릴까요?”
“무슨 말인가?”
“그 엘레나란 분은 엘프 아닙니까? 엘프는 인간들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더군다나 그분이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저희 쪽에서는 보답할 수 있는 것도 없고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확실하게 말해 보게.”
“제 말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나름의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반드시 돌아오실 거야. 지금 우리가 그분의 동료를 맡아 두고 있지 않은가?”
동료는 바로 루시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때 듣기로는 여행 중에 우연히 주운 아이라고 했습니다. 엘프가 인간 아이를 떠맡을 이유가 없으니 저희 쪽에 떠맡겨 버린 것일지도 모르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말은 루시아의 마음 깊은 곳을 찌르고 있었다.
요 근래 루시아 역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엘레나가 그녀를 위해서 행동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겠네. 그렇지만 지금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마법사들을 상대로 우리가 무슨 대책을 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게,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방법이라니?”
“이번에 들은 이야기인데 저희가 있는 정착지랑 멀지 않은 곳에 생존자 공동체가 자리를 잡은 모양입니다. 그 공동체는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있는데 그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사람이 무려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 ‘데미안’이라고 합니다.”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데미안의 전설과도 같은 위용은 촌장으로서도 잘 알고 있었다.
촌장의 목소리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럼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만.”
“예. 그렇지만 문제는….”
루시아의 귀에 지도를 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그들의 예상 거점으로 가려면 이쪽의 ‘말록 산’을 통과해야 합니다.”
설명에 따라서 지도를 살피던 촌장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산은 현재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굴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궁금한 게 있는데.”
일행과 함께 로즈버드 빌리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루카가 입을 열었다.
“뭐가 궁금한데?”
앞장서서 주환 일행을 이끌고 있던 엘레나가 그렇게 대답한다.
“지금 내 짐 안에 먹을 게 가득 있단 말이지.”
“그렇지. 아, 아침에 네가 만들었던 스프 괜찮더라.”
주환이 루카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먹는 거는 먹는 거지만 내가 궁금한 건 이브네 별장에는 항상 신선한 먹거리가 가득 차 있는데 그걸 대체 누가 다 가져다 놓느냐는 거지.”
“당연히 그 음흉한 마족 집사가 준비하는 거지.”
엘레나의 대답에도 루카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건 예상할 수 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그렇게 양질의 음식을 손에 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마족이니까. 자기만의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데스티나의 말에 루카는 그녀에게 물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데스티나로서도 제대로 상상하기 힘든지 그녀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엘레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음식이 아닌 걸 환각을 걸어서 음식처럼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지. 주변에 있는 흙이나 나뭇잎 같은 것들 말이야.”
엘레나의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찡그렸다.
“상상하기도 싫군.”
데스티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걱정 마. 그럴 리 없으니까.”
주환은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나는 이브랑 같이 식사한 적이 많아. 이브한테까지 그런 걸 먹일 리는 없으니까. 적어도 분명히 식사를 조달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다는 거겠지.”
“하긴 그렇네.”
루카는 주환의 말에 수긍했다.
이브와 타마두크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던 주환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타마두크와 이브는 역시나 계약 관계로 묶인 건가?”
그러한 주환의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이는 이곳에선 엘레나밖에 없었다.
주환의 예상대로 엘레나가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너희가 보기에 이브가 타마두크 덕분에 편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거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브는 가문의 죄를 떠안고 있을 뿐이야.”
가문의 죄.
엘레나의 말에 주환 일행은 의아함을 느꼈다.
“무슨 소리야?”
“알케비젼이라는 가문이 있어.”
엘레나의 말에 데스티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알케비젼?”
데스티나가 그렇게 되물었다.
“어. 알고 있나 본데?”
“딱히 교류가 있진 않지만, 그 이름을 듣지 못할 수가 없다. 그들은 구국의 12 가문 중 하나이니까.”
데스티나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주환은 데스티나의 가문 역시 구국의 12 가문에 속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 정도로 명문 가문이라면 서로 친하지는 않을지언정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구국의 12 가문 중에서도 알케비젼 가문은 상당히 베일에 싸여 있는 가문 중 하나이지. 흑마법에 심취한 나머지 수도에서 쫓겨났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 알케비젼 가문이 이브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야. 이브는 알케비젼 가문의 일원이니까.”
엘레나의 말에 루카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꽤 지체 높으신 가문의 따님이라는 거네.”
“알케비젼 가문은 흑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가문이지. 흑마법은 배척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 가문이 구국의 12 가문까지 오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 역시도 흑마법이었어. 알케비젼 가문에서는 가문의 수장이 바뀔 때마다 가문의 가장 큰 행사가 열려. 바로 마족과의 계약이지.”
“소문대로 불경한 가문이로군.”
“마족과의 계약이 갱신될 때마다 마족들은 그 가문에 나름대로 축복을 부여해 줘. 마족의 축복이니 정상적인 축복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 어떤 방법보다도 강력한 힘을 부여해 주는 것이 사실이야.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의 결말이 언제나 그렇듯이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지.”
“그게 뭐지?”
“마족과의 계약은 언제나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야. 알케비젼 가문에서는 가문만의 비법을 통해서 그 대가를 오로지 한 사람이 짊어지게 할 수 있어. 그래서 재계약을 할 때마다 반드시 한 명씩 저주받이 역할을 하는 인물이 나오게 되어 있지.”
“설마 그게 이브가 하는 역할이라는 거야?”
“맞아. 이브는 사실상 마족들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거나 다름이 없는 거지.”
“이해가 안 가는데? 그런 것치고는 저 마족은 이브를 꽤 잘 돌봐 주고 있잖아? 앞뒤가 맞질 않는걸?”
“뭐, 나도 그 이상의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정 그렇게 궁금하다면 나중에 이브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거기까지 말한 엘레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어느 한 정착지의 작은 실루엣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저기가 바로 내가 말한 로즈버드 빌리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