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황제 폐하의 일행들이 영원의 교차점에 계신다고 들었다. 신하된 자의 도리로서 당연히 폐하를 모시기 위해서 찾아가야 하지 않겠나?”
주환 대신 대답한 이는 데스티나였다.
“인간족의 황제가 영원의 교차점에 있단 말이지?”
엘레나는 재미있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생선을 뼈를 발라내고 있던 루카가 엘레나에게 물었다.
“고고한 엘프. 넌 우리가 처음에 만났을 때 했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잖아. 애초에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줄 능력은 있는 거야?”
루카의 물음에 엘레나는 갑자기 루카 쪽으로 손을 내뻗었다.
엘레나가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한 루카는 깜짝 놀라면서 양손을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안 해. 하하하!”
엘레나가 비웃자 루카는 분노와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놀리는 거야, 지금?”
“아. 역시 귀엽네. 그렇게 강한 척, 겁 없는 척하는 것도 귀엽단 말이지. 영원의 교차점에 데려다줄 수 있느냐고?”
엘레나는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그 정도는 당연히 어렵지 않지.”
“정말이야?”
주환이 묻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당장 데려다줄 수 있는 건가?”
데스티나도 흥분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엘레나의 대답은 주환 일행의 반응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했다.
“당장은 안 돼.”
“어째서?”
“뭐긴 뭐겠어? 큰소리는 쳤지만 실제로는 그런 실력이 안 되는 거겠지.”
루카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영원의 교차점은 정령계와 인간계의 중간에 있는 장소야. 정령 마법에 통달한 이라면 영원의 교차점으로 갈 수 있는 차원의 문을 열 수 있어. 황제의 측근 중에도 정령 마법의 달인이 있으니 영원의 교차점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거고.”
“즉 정령 마법에 도가 튼 사람만이 영원의 교차점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단 이야기지?”
“그렇긴 한데. 그건 영원의 교차점을 열 수 있는 조건 중 절반일 뿐이야?”
“그럼 다른 조건이 더 있단 말이야.”
“그렇지.”
“그게 뭔데?”
주환의 물음에 엘레나는 침묵했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건 말해 주기 싫어.”
“뭐야! 알려 줘.”
“그건 알려 줄 수 없어. 사실 그걸 알려 줄 필요도 없거든. 나는 그 두 가지 조건을 다 만족하고 있기에 영원의 교차점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건 확실하니까. 아무튼, 영원의 교차점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문제 되는 것은 거리가 아니야. 문제는 시간이지.”
“시간?”
“조건만 맞는다면 영원의 교차점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어디서든 열 수 있어. 문제는 원하는 시간에 열 수는 없어. 열리는 특정 날짜, 특정 시간이 있거든.”
“그 시간이 언제지?”
“알 수 없어.”
“어째서?”
“그건 영원의 교차점의 특성 때문이야. 영원의 교차점은 차원과 차원 사이라는 아주 특수한 환경에 자리 잡고 있지. 그렇기에 그 영원의 교차점이 열리는 시간을 알려면 충분한 관측 시간을 가져야 해. 그 관측은 오로지 엘프들의 숲에서만 할 수 있고 말이야.”
“산 넘어 산이 아닌가?”
데스티나는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시간이 언제가 되었든 우리를 도와서 그곳에 보내 주는 건 확실한 건가?”
“내가 너희를 도와야 할 이유가 있나?”
“결국에는 도와줄 수 없다는 건가? 아니면 그에 맞는 대가를 원하는 건가?”
데스티나는 엘레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가문은 구국의 12 가문 중 하나이며 나의 종착지에 계신 분은 바로 황제이시다. 우리가 그분에게 도달할 수 있다면 엘레나 자네는 분명 분에 넘치는 대가를 얻을 수가 있을 터.”
“선 도움 후 대가 같은 달콤한 헛소리로 나 같이 산전수전 다 겪은 엘프를 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 확실하게 말해! 우리도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야. 사람 가지고 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우리끼리 알아서 할 수 있어.”
루카는 엘레나에게 그렇게 엄포를 놓았다.
루카와 엘레나 사이에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주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아마도 우리한테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네 성격에 우리를 이렇게 오래 상대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주환은 엘레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말이 틀려?”
“그래. 너희한테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긴 해.”
엘레나는 선선히 인정하였다.
“그게 뭐지?”
“그건…….”
* * *
뚜벅뚜벅.
어두운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
발소리의 주인공은 복도를 가로지르며 조심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는 목적한 곳에 도착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려서 문 하나를 마주했다.
그리고 노크하기 위해서 손을 들었다가 무엇인가 망설여지는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가 문 앞에서 한참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한 그림자가 그의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무슨 일이시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 앞에 서 있던 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뒤차기를 날렸다.
그러자 그림자에서 손이 뻗어 나오더니 그 공격을 걷어 내었다.
발차기를 날린 이는 공격이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몸을 돌리면서 그림자를 향해서 주먹을 날렸다.
쑤욱.
그림자의 안에서 팔이 하나 더 튀어나왔다.
그 손에는 촛불이 들려 있었다.
주먹은 촛불의 앞에서 멈추었으며 그 불빛 덕분에 주먹을 날린 이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루카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을 하자 그림자의 안쪽에서 인간의 형상이 꿀렁거리면서 빠져나왔다.
당황한 루카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림자가 사라지고 완성된 인간의 형상은 바로 집사 타마두크였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계시다뇨.”
낮에 식당에서 한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주환 일행은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브의 성에 머물렀다.
이브의 성에 방은 셀 수도 없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머무는 데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이브가 가스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날치기로 결정된 사항이긴 했다.
“길을 잃으신 겁니까?”
타마두크의 물음에 루카는 고개를 저었다.
밤이 되자 루카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방을 빠져나왔고 이곳에까지 이르게 것이다.
루카가 두드리려고 했던 문은 바로 이브의 방문이었다.
그녀가 밤에 움직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집사의 방해 없이 단둘이서 이브를 만나는 것.
분명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타마두크가 그녀보다 한 수 더 위였던 모양이다.
“돌아가시죠. 오늘의 소동 때문에 주인님은 너무 지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게 있더라도 얻을 수 있는 건 없을 겁니다.”
타마두크가 그렇게 권했지만, 루카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야겠어.”
루카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제대로 된 대답이라. 그럼 지금까지의 대답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네가 방해한다고 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
“눈빛을 보고 그럴 거로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물을지도 대강 예상이 가고요.”
이브의 방문을 바라보던 타마두크는 루카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죠. 주인님의 휴식이 방해받는 것은 원치 않으니 제가 성심성의껏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신 제 방에서 이야기하는 거로 하죠. 괜찮으십니까?”
루카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루카는 각오하고 왔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마족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민을 마친 루카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좋아. 그럼 너의 방으로 안내해 줘.”
* * *
“여긴….”
타마두크의 방으로 안내받은 루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가구나 생필품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은 텅 빈 방으로 안내받은 루카는 방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런 곳에서 산단 말이야?”
“네. 일단은요.”
타마두크는 들고 있던 초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루카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저 초까지도 이 방에서는 불필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자거나 앉거나 하는 일은?”
루카의 말이 끝나자마자 타마두크는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공중 부양을 하던 타마두크는 공중에서 눕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이렇게 지내면 의지나 침대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 루카를 보며 타마두크는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손님용 의자는 필요하겠네요.”
“나는 괜찮아. 그냥 이야기만 할 거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도 진지하게 임하도록 하죠.”
타마두크는 공중에서 내려오며 말을 이었다.
“물어보고 싶으신 것은 아마 루카 님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겠죠?”
“맞아.”
“그 문제 대해서는 저희 주인님께서도 충분히 대답하신 것 같은데요?”
“알아. 그렇지만 직접 대답을 듣지는 못했으니까.”
“처음부터 마법사에 대한 믿음이 없으신 것 같은데요?”
“당연하잖아. 지금까지 정상적인 마법사는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편견을 가지고 계시면 저희가 무슨 대답을 하든지 믿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제가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 문제에서 저희 주인님의 대답에는 한 점 거짓도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그래 봐야 너는 그 마법사의 집사잖아. 같은 편이고.”
“보증할 수 있습니다. 당신 아버지를 만난 사람은 저뿐이거든요.”
“뭐라고?”
루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 아버지로 예상되는, 이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아빠를 만났다고?”
“예. 주인님이 주무시는 동안 밖에 볼일을 보러 잠시 나갔다가 숲에서 헤매고 있는 남자를 구출한 적이 있죠. 그를 별장으로 데리고 가 음식을 대접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은 주인님은 모르고 계십니다.”
“이야기를 나누었단 말이야?”
“네. 그분에게서 가족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환 님께 루카 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분이 루카 님이 찾던 분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아빠는 지금 어디에?”
“모릅니다. 이곳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또 훌쩍 떠나 버렸으니까요.”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지? 어째서 그걸 숨긴 거야?”
“어째서 숨긴 거로 생각하십니까?”
“내가 지금 묻고 있잖아!”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 뭘……?”
“더는 당신의 아버지를 찾지 마십시오. 만약에 당신이 아버지를 찾는다면 당신은 반드시 상처받을 겁니다. 이것은 당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호의의 한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