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주환과 이브의 주의력이 흐트러진 사이에 엘레나는 옆에 있던 화분을 하나 들어서 주환에게로 휙 던졌다.
그때, 이브가 반사적으로 주환을 조종하여 총을 발사했고 날아간 애벌레 탄은 엘레나가 던진 화분에 정확히 명중했다.
파사삭!
터진 애벌레의 체액이 화분의 식물에 묻으면서 식물의 잎 부분을 완전히 부식시켜 버렸다.
“뭐였죠? 방금 그 힘없는 공격?”
이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화분을 던져서 주환 씨를 맞히려고 하신 건가요? 스승님치고는.”
“치고는?”
“너무 구린 공격인데요?”
“하하하하!”
엘레나는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이래서 네가 귀엽다는 거란다.”
“그게 무슨 뜻이죠?”
“지금 저 남자의 상태가 안 보이는 거니?”
엘레나는 손을 들어서 주환을 가리켰다.
지금 주환은 반쯤 기절해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몸을 가눌 수가 없는 듯 비틀거리더니 이윽고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어? 어?”
이브는 당황하면서 황급히 컨트롤러를 움직여 보았지만 주환의 몸을 조종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의 의식이 있어야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이지? 지금 저 남자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으니까 당분간 네 뜻대로 조종할 수 없을 거야.”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죠?”
“음. 별거 없어. 그러니까 내가 식물학을 충분히 공부해 두라고 했잖니? 이 정도도 깨닫지 못하니 이렇게 괜찮은 재배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활용할 줄을 모르는 거야.”
“아.”
엘레나의 말에 이브는 짚이는 게 있는 듯 바닥에 떨어져 있는 화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지금이면 이제 너한테도 닿았겠구나.”
엘레나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브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뒤로 서서히 넘어졌다.
타마두크는 잽싸게 움직여서 넘어지는 이브의 몸을 받았다.
타마두크는 엘레나에게 물었다.
“뭔가 수를 쓰셨군요?”
“그렇지.”
엘레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사되는 애벌레의 모습을 보고 파르조니 나방의 애벌레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지. 저 바보 제자는 애벌레의 체액이 산성인 걸 보고 단순한 무기로 사용할 생각이었겠지만 그 애벌레의 체액 성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그 체액은 특정한 식물과 만나면 사람을 잠들게 하는 수면 가스를 만들어 내지.”
“이브 님은 그 특정 식물을 이 재배실에서 키우고 계셨던 거고요.”
“그 두 가지 성분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잘 모르고 있었겠지. 나야 지금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서 내 주변에는 맑은 공기만 돌아다니게 해두었으니까 상관없지만.”
“그렇군요. 저는 마족이니까 그런 수준의 가스에는 면역이고요.”
“그건 내 관심 밖의 일이고. 이제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너는 어떡할 거야? 네 주인을 위해서 끝까지 한번 해볼 거야? 아니면 집사답게 이 모든 일을 원만하게 끝내려고 노력할 거야?”
엘레나의 제안을 듣고 있던 타마두크는 이브를 부축하고 있지 않은 나머지 손을 들면서 미소 지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항복입니다. 오늘은 주인님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죠.”
* * *
훌쩍.
루카와 싸우던 청동 인형은 무기를 내려놓고 한쪽 바닥에 쭈그려 앉아 급격한 우울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실제로 눈물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훌쩍거리는 소리가 청동 몸체 안쪽에서 울려 마치 동굴에서 들리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 냈다.
그런 인형의 모습에 조금 짠해진 루카는 인형에게 다가가서 주먹으로 그의 팔을 툭툭 쳤다.
“너, 너무 그렇게 우울해하지 마.”
“저는 이제 큰일 났어요.”
인형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뜻밖에 어린 소년 같은 미성이었다.
그렇지만 동굴 울림 소리는 여전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형태를 띠고 있는 청동 인형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은 목소리에 루카는 놀랐다.
“어려!”
“네. 저 같은 자동 인형은 만들 때 죽은 인간의 영체가 사용되는데 기억에는 없지만 저는 아마 어린아이의 영체였나 봐요.”
“어쩐지 어리게 들리더라.”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인가요? 이제 저는 없어져 버릴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당신이 말한 대로 저곳으로 올라가는 사람을 막지 못했으니까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엄청나게 당황했거든요. 다른 데 신경이 팔려 있는 사이에 갑자기 들어가 버리니까 미처 막을 새가 없었어요.”
“그래 그건 확실히 네 잘못이긴 하지.”
“그렇죠?”
루카의 말에 인형은 더욱더 우울해진 듯 자신의 양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브 님이 이걸 아시면 저는 분해되어 버릴지도 몰라요. 분해된 다음에 용광로에 들어가서 다 녹아 버리겠죠. 아. 사실 이런 일보다는 다른 일이 하고 싶었는데.”
“잠깐잠깐.”
루카는 놀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 때문에 네가 녹아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럴 거예요.”
루카의 머릿속에는 악랄한 마법사의 포스를 물씬 풍기고 있는 이브의 모습에 대한 상상도가 떠올랐다.
영체로 가끔 본 것을 제외하고 루카가 이브의 모습을 직접 본 일은 없었지만, 루카는 이브에 대한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역시 마법사란 것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린 루카는 마음을 바꾸어 인형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너 이름이 뭐야?”
“갈로스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갈로스. 만약에 네 주인이 너를 해코지하려고 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막아 줄게. 그 정도 실수를 했다고 너를 없애 버린다는 건 너무한 일이잖아?”
루카의 말에 갈로스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정말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갈로스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어. 약속할게. 어차피 네 주인, 마음에 안 들었거든.”
“좋으신 분이네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만 놔둘 수가 없잖아.”
그때, 계단을 통해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갈로스는 버릇처럼 바닥에 놓아두었던 검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털컹!
문을 열면서 안으로 들어온 자는 바로 슬라임으로 변한 데스티나였다.
“아직도 여기에서 발이 묶여 있는 건가?”
데스티나는 들고 왔던 옷과 툴레오의 갑옷을 바닥으로 던지면서 갈로스를 향해 슬라임화 된 손을 내밀었다.
“덤벼라. 모습은 이래도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자. 동정심 따위는 필요치 않다. 내가 상대해 주마.”
갈로스는 당황한 듯 루카를 내려다보았다.
진지하게 자세를 잡은 데스티나를 보면서 루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 없어. 데스티나. 이 친구는 더는 우리의 적이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인가?”
“데스티나. 기사는 약자를 돕는 사람들이지?”
“당연하다.”
“그래. 그러면 저 녀석을 도와줘.”
“흠.”
루카의 제안에 흥미가 동한 듯 데스티나는 자세를 풀었다.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는 건가?”
“그 사악한 마법사가 여기 있는 이 갈로스를 녹여서 없애려고 하면 같이 막아 주는 거야. 알았지?”
“그 정도야 어려울 것은 없다. 지금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대충 알겠군.”
“아. 저기.”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갈로스가 조용히 손을 들고 두 사람에게 질문했다.
“근데 어째서 혼자서만 올라오신 거죠? 분명 내려갔던…….”
“아. 우리를 습격했던 그 골렘 말인가? 하아. 설명하자면 꽤나 기네. 대단한 싸움이었지. 내가 모든 마나를 방출했음에도 제대로 결착을 짓지를 못했어. 그래서 나는 궁여지책으로 이 슬라임화 된 몸을 적극 전투에 이용하였지. 손가락을 길게 늘여 그 골렘의 중추를 붙잡았다.”
“그…… 그럼?”
“중추를 빼냈더니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다시는 일어나는 일이 없겠지.”
“그렇군요.”
“무슨 문제가 있나?”
“사실 그 골렘, 제 친구였거든요.”
갈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공간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성실한 친구였는데. 그렇지만 이것도 그 친구의 운명이겠죠?”
민망한 공기가 세 사람의 사이에 흘렀다.
“다시 못 살리는 거야?”
루카의 물음에 갈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추가 남아 있으면 혹시 모르지만요.”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데스티나에게 향했다.
데스티나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양손을 폈다.
“중추는…… 바닥에 던져서 파괴해 버렸다.”
또다시 흐르는 침묵.
루카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하여 재빨리 갈로스를 향해 외쳤다.
“너, 너는 확실히 우리가 지켜 줄게.”
“……네”
* * *
주환은 자신의 앞에 있는 기다란 타원형의 식탁에 올라가 있는 음식들에 시선을 두었다.
신선함으로 꽉 차 있는 맛있는 과일들.
양쪽으로 찢으면 마치 쫄깃한 떡처럼 수분감 충만하게 늘어나는 식빵.
그 맛있을 음식들을 즐기고 있는 이는 수면 가스로 두 사람을 제압했던 장본인인 엘레나였다.
엘레나는 우아하게 딸기를 들어서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한바탕의 소동이 끝난 뒤 그들은 검은 탑의 식당에 다시금 모일 수 있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엘레나와 이브를 제외하고 모두 자신의 식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엘레나는 이미 식사를 시작했으며 이브는 한쪽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든 채였다.
그녀는 수면 가스에서 다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그때, 식당과 연결되어 있는 부엌의 문이 열리면서 요리사 복장을 한 타마두크가 음식들을 양손에 가득 들고 입장했다.
“새로운 음식이 나왔습니다.”
주인이었던 이브가 엘레나에게 제압당하자 타마두크는 지금은 엘레나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타마두크는 테이블을 돌면서 능숙하게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데스티나 님은 근손실을 막아 줄 육즙 풍부한 스테이크입니다.”
먹음직스러우면서도 커다란 스테이크가 데스티나의 앞에 놓였다.
“루카 님은 담백하면서도 영양이 듬뿍 담긴 생선 요리입니다.”
“생선 좋지.”
잘 익은 생선찜이 루카의 앞에 놓인다.
“그리고.”
덜컥.
주환은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보았다.
그 그릇은 비어 있었다.
“내 건 비어 있는데?”
“네. 엘레나 님께서 주환 씨께는 저녁을 주지 말라고 명령하셨거든요.”
주환이 맞은편의 엘레나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를 공격했으니 그 정도 벌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억지로 한 건데 정상참작은 안 해주는 건가?”
“그래서 최소한 식탁에는 앉게 해줬잖아. 너도 이브처럼 벌을 받고 싶은 건 아니겠지?”
주환은 고개를 돌려 벌을 받고 있는 이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브는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우…… 저도 배고프네요. 밥 먹고 싶어졌어요.”
그러더니 다시 잠에 취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데스티나는 주환의 빈 그릇을 가져가더니 자신의 음식 중 절반을 잘라 그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
“먹어라.”
데스티나가 그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루카도 자신의 생선 일부를 잘라 그릇에 담았다.
“내 것도 같이 먹어.”
어느새 음식이 가득 담긴 그릇이 돌아오자 주환은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잘 먹을게.”
그 모습을 보던 엘레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제법 의리들이 있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
“임무 완수라. 그러고 보니 너희는 영원의 교차점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지?”
엘레나는 주환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째서 영원의 교차점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