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쪽으로.”
주환은 이브가 이끄는 대로 복도를 통과했다.
지금 이브가 안내하고 있는 곳은 주환이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가 이 검은 탑에 온 뒤로 가볼 수 있었던 곳은 중앙홀과 텔레포트 거울이 있는 방, 그리고 식당 정도뿐이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제 연구실이요.”
주환이 묻자 이브는 가볍게 대답했다.
복도의 끝에는 다른 방문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박격포도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은 육중한 철문이 주환을 맞이했다.
손잡이에는 쇠사슬이 칭칭 감아져 있었고 풀어낼 수 없도록 자물쇠까지 채워진 상태였으며, 문의 한가운데에는 위험을 알리는 해골 마크까지 그려져 있었다.
“여기 안전한 거 맞습니까?”
“물론 안전해요. 아무거나 만지지 않는다면.”
“그런 걸 보고 보통 위험하다고 하죠.”
이브는 열쇠를 이용해 빠르게 자물쇠를 연 다음 쇠사슬을 풀고 문을 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주환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는 거예요? 지금 엘레나가 막 올라오고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마련해 둔 함정이 있으니까 시간을 좀 벌 수는 있어요.”
“엘레나에게 그 함정이 먹힐까요?”
“사실 안 먹힐 거예요.”
“그럼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시간을 벌기에는 아주 좋죠. 스승님은 차근차근 그 함정들이 몇 점짜리 들인지 하나씩 평가를 하면서 올라오실 테니까요.”
“당신이 왜 그 사람한테서 도망쳤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주환은 이브를 따라서 연구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실 안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벽의 한쪽에 크게 설치되어 있는 아궁이였으며 그 아궁이에는 아주 약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궁이의 옆에는 플라스크들과 실험 기구들이 놓여 있었으며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들이 담겨 있었다.
“꼭 학생 때의 과학실에 들어온 기분인데?”
왼쪽 벽에는 나무 선반이 있었고 나무나 금속으로 된 기계 장치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반대쪽 벽에는 겉보기에는 어디에 쓰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이상한 아이템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상태였다.
“의외네요.”
주환이 그렇게 말하자 이브가 물었다.
“뭐가요?”
“나는 마법사들의 작업실이라는 건 그냥 벽에 마법진 몇 개 그려져 있고 아궁이에 이상한 스프가 끓고 있는 정도만 상상했거든요.”
“그렇게 생각해도 크게 틀린 건 아니에요.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없는 마법사들은 주환 씨가 생각하는 식의 실험만을 하니까요. 첫 번째는 이런 실험 기구를 들여놓을 자본이 없는 마법사. 그리고 두 번째는.”
이브는 책상 위에 올라가 있던 카드 한 장을 들어서 주환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없는 마법사들이죠.”
주환은 그 카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카드는 그가 현실 세계에서 보던 자격증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증명사진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가 들어가 있었다.
“마도 과학 2급 자격증?”
“네. 맞아요.”
“근데. 이건…….”
주환이 말을 이으려고 하자 이브가 황급히 가로막았다.
“알아요. 저 정도 되는 마법사가 1급 자격증이 없다는 건 이상하다는 말이겠죠. 그렇지만 1급 자격증은 실기 시험이 있는데 시험장까지 가서 봐야 한다잖아요? 그래서 1급은 떨어지고 말았죠. 제 실력이면 1급은 문제가 없었는데.”
“아니, 아니. 저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어차피 마도 과학이 뭔지조차 모르는데요.”
“아, 그랬군요. 난 또 1급 자격증이 없다고 무시하려는 줄 알았어요.”
“난 그렇게 안 유치해요.”
“아무튼 마도 과학이라는 건 마법의 하위 분야예요. 마법과 기술이 결합한 형태라고 할 수 있죠. 인간과 드워프가 합작으로 만들어 낸 기술이지만 드워프들이 인간과 결별한 이후 인간들이 스스로 키워 낸 분야죠.”
이브는 설명하면서 자신의 작업대로 다가갔다.
작업대로 간 이브는 작업대 위에 올라가 있던 물건을 들어서 주환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이게 그 마도 과학의 결과물이고요.”
이브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것을 주환에게 내밀었다.
주환은 이브가 내미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이브에게 맡겨 두었던 돌격 소총과 분명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었지만 많은 것이 달랐다.
그보다 더욱더 화려하고 더욱더 과격하게 커스텀이 되어 있는 총기였다.
“이게 뭐죠?”
“당신이 주었던 그 돌격 소총이라는 무기예요.”
“예?”
놀란 주환은 돌격 소총을 받아들었다.
상당히 미래지향적으로 설계된 외형을 가졌지만 실 작동 방식은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별반 다르지는 않아 보였다.
“대체 어떤 식으로 개조를 한 겁니까?”
“별로 많이 손대진 않았어요. 그냥 여러 가지 탄을 쓸 수 있게 한 정도? 우선 기본 탄은 그대로 나갈 수 있게 해놨어요.”
이브는 마개조 된 돌격 소총의 탄창을 빼서 주환에게 보여 주었다.
탄창 안에는 주환에게 익숙한 5.56mm 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주환 씨가 주신 그 탄환과 이 돌격 소총의 구조를 통해서 기본 탄환도 잔뜩 만들어 두었어요. 이제 주환 씨가 탄 부족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탄을 쓸 수 있죠.”
이브는 주머니에서 새로운 탄창을 꺼냈다.
원래의 탄창은 금속으로 되어 있지만 새로운 탄창은 투명해서 안에 들어 있는 탄을 볼 수 있었다.
탄창의 안에는 주환이 처음 보는 탄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새로운 탄 하나하나의 크기는 5.56mm 탄보다 훨씬 굵어서 많은 탄을 넣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투명한 탄창과 깔 맞춤을 하려는 작정인지 탄창 안에 있는 탄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투명했다.
주환은 그 탄을 보면서 포르말린에 담가 놓은 표본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탄의 안쪽은 푸른색의 액체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액체의 안에는 징그럽게 생긴 노란색의 애벌레가 둥둥 떠 있었다.
애벌레의 크기는 주환의 엄지손가락 못지않았다.
“파르조니 나방의 애벌레에요. 지금은 그냥 잠들어 있는 상태죠. 잠든 상태에서 ‘마나겔’로 굳혀 놓은 거예요.”
“이 애벌레들은 총알로 쓸 수 있는 겁니까?”
“그래요. 겉보기엔 평범한 애벌레들일 뿐이지만.”
“아뇨. 절대 평범하진 않아요.”
“아무튼 이 애벌레들은 몸의 구성물의 70%가 산성이기 때문에 충돌을 시키면 터지면서 상대를 녹여 버릴 수가 있어요. 그것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 낸 ‘애벌레 탄’이죠.”
애벌레 탄을 찬찬히 관찰하던 주환은 그녀에게 물었다.
“다른 탄들은 없나요?”
“물론 있죠. 화염탄, 전기탄 등등. 지금 개발 중이라는 게 문제지만.”
“으음. 그렇군요. 그런데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주환은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이상함을 이브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도 괜찮은 건가요?”
그제야 이브도 자신과 주환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침묵을 하던 이브는 옆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투구를 천천히 뒤집어썼다.
“저도 몰랐어요…….”
이브는 민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줄은.”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을 거죠?”
“그러기에는 타이밍이 늦었잖아요. 지금 그렇게 해봐야 꼴불견이죠.”
“어째서 이번에는 괜찮은 걸까요?”
“모르겠어요.”
이브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작업대로 다가갔다.
“이제는 주환 씨에게 좀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죠.”
이브는 작업대에서 조끼 같은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환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당신이 맡겼던 플레이트 캐리어예요.”
“설마 그것도 엄청나게 마개조가 된 건가요?”
주환은 붐스틱을 찾는 의뢰에서 돌아온 후 자신이 입고 있던 플레이트 캐리어를 이브에게 맡긴 적이 있었다.
플레이트 캐리어 역시 이브가 보기에는 아티팩트급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으니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이브는 좀 손봐주겠다는 이유로 그에게서 플레이트 캐리어를 받아 갔고, 주환으로서는 며칠간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브가 내민 플레이트 캐리어는 주환이 주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조끼 형태인 것은 같았지만, 조끼의 바깥에는 금속으로 된 패드들이 모자이크처럼 붙어 있었다.
패드들은 각각 구획이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입고 움직이는 데에 큰 불편함이 없는 디자인이었다.
“마법 방호 기능을 탑재했어요. 물론 막아 낼 수 있는 마법은 기본적인 공격 마법 정도고 그것도 연속으로 맞으면 이 방어 패드가 파괴되게 되어 있어요.”
“확실히 실용성이 있겠네요.”
“지금 한번 입어 볼래요?”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이럴 시간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이브는 엘레나는 아예 안중에도 없어진 건가?’
주환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브가 직접 조끼를 입혀 주려고 했기에 굳이 토를 달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이브는 꽤 다정한 모습을 연출하면서 주환에게 조끼를 입혀 주었다.
“잘 맞나요?”
“네. 이 정도면 맞춤복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네요.”
“그럼 다행이네요. 자,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았어요.”
“마지막 단계?”
주환이 그렇게 물었을 때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타마두크가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주환이 현실 세계에서 많이 보던 게임기 컨트롤러와 아주 흡사하게 생긴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건?”
타마두크는 주환의 말엔 대답하지 않고 그 컨트롤러를 이브에게 건네주었다.
이브는 컨트롤러를 받아 든 다음 주환을 향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환 씨. 마법사란 족속은 굉장히 호기심이 많아요. 저는 이번에 마법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궁금증을 해결했나요?”
“아직까진 해결하지 못했지만 지금 바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바로?”
거기까지 들은 주환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고는 자신이 입고 있는 조끼와 이브가 들고 있는 컨트롤러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자, 잠깐만!”
이브의 의도를 눈치챈 주환은 놀라면서 재빨리 이브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이브가 들고 있는 컨트롤러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이브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이브는 손가락으로 컨트롤러의 스타트 스위치를 올렸다.
“으읏!”
주환은 곧장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힘이 빠져나갔지만, 그는 바닥에 쓰러지거나 주저앉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치 막대기처럼 온몸이 뻣뻣해진 채로 연구실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주환은 이브에게 그렇게 외쳤다.
눈을 깜박이는 것, 숨을 쉬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
이 세 가지를 제외하고는 주환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끼에 착용자의 신체를 조종할 수 있는 장치를 삽입해 두었죠. 이번에 처음 만들어 본 거지만 결과물은 생각보다 성공적인 것 같네요.”
“대체 무슨 의도로?”
“다른 게 아니에요. 이제부터 주환 씨가 제 스승님과 당신의 동료를 막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주환은 기가 막혀서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제가 여기까지 올라온 건 이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지 당신 대신 싸워 주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그러곤 주환은 눈동자를 굴려서 타마두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싸움이라면 당신 집사를 시키든지 해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타마두크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엘레나 님이 상대라면 제가 너무 진심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요.”
“그러면 시험 가동을 좀 해보도록 할게요.”
이브는 양손으로 컨트롤러의 레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자 주환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환은 자신이 마리오네트가 되어서 타인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주환은 오로지 이브가 조종하는 대로 행동하는 인형 상태에 불과했다.
이브가 계속해서 컨트롤러를 통해 주환의 몸을 조종하여 이번에는 개조된 돌격 소총을 들게 했다.
“이제 주환 씨가 할 일은 그 무기를 들고 탑 밑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저 무자비한 침입자들을 제압하는 거예요. 그럼 이제 출발하도록 할까요?”
주환은 저항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해도 몸에 힘을 넣을 수가 없었다.
주환은 이브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여서 연구실의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