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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의 이세계 뽀개기-22화 (22/182)

22화

데스티나는 나무 한 그루를 마주하고 있다.

그 나무는 푸른 잎을 피우고 있는 신선한 나무가 아니었다.

그건 황야의 풍파에 견디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진 죽은 나무.

죽은 나무이긴 하지만 그 둘레는 상당히 넓어 그 앞에 서 있는 데스티나를 압도했다.

“흐읍.”

데스티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천천히 검집에 꽂혀 있는 롱소드의 손잡이로 이동했다.

순간, 데스티나는 눈을 뜨면서 재빠르게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러곤 죽은 나무를 향해서 횡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퍽!

검은 나무의 몸통을 어느 정도 베다가 중간에서 멈추었다.

검이 완전히 나무를 베지 못한 것을 본 데스티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죽은 나무조차 완전히 베지 못한다는 말인가?”

나무를 노려보고 있던 데스티나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나무에서 검을 뽑아냈다.

“누구지?”

“나야.”

데스티나를 찾아온 주환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모닥불에서 너무 멀리 온 거 아니야?”

“정신을 집중하기에는 이 정도가 좋다.”

데스티나는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을 바라보았다.

“달빛도 좋으니 좀 멀리 가도 상관이 없지. 그런데 무슨 일인가?”

“좀 걱정이 되어서 와봤어. 아까 봤던 그런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면 혼자서는 위험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주환은 데스티나가 베려던 나무로 다가갔다.

“그런데 검으로 나무를 한 번에 벨 수 있긴 한 거야? 그렇게 쉽게 벨 수 있다면 도끼 같은 게 필요 없지 않아?”

“벨 수 있다.”

데스티나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나는 벨 수 없지만.”

“어떻게 하면 벨 수 있지?”

데스티나는 주환을 빤히 바라보더니 나무로 다가와서 등을 기댔다.

“주환. 넌 마나라는 것을 알고 있나?”

“아니. 전혀.”

데스티나는 주환에게 마나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이자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궁극의 에너지원.

“보통 마나를 마법사들의 전유물로 알고 있지만, 검의 길에서도 마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검사를 일명 ‘소드마스터’라고 부르지.”

“소드마스터?”

“검을 수련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 우주를 떠돌고 있는 마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느끼는 수준에 머물지만, 수련을 거듭하면 나중에는 그 마나를 검에 실을 수 있는 수준에 올라가는 거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강해지는 거지?”

“검에 마나를 실을 수 있으면 갑옷도 우습게 베어 버릴 수가 있다.”

“아직 이 나무를 베지 못했다는 건.”

주환은 나무에 생긴 검 자국을 만졌다.

“데스티나는 아직 마나를 검에 싣는 경지에는 못 올라갔다는 이야기야?”

“창피하지만 그렇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수준까진 올라갔지만, 그것을 검에 입히는 것은 아직은 불가능하지.”

“창피할 것까지 있나? 소드마스터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보지만 그건 정말 검의 길을 오랜 시간 걸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일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데스티나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누구?”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 ‘데미안’.”

“데미안?”

“100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고 불리는 기사다. 이미 20대 때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괴물 중의 괴물이지.”

데스티나의 이야기를 듣던 주환은 앞뒤가 맞지 않음을 느꼈다.

“잠깐만. 데스티나 너,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다. 성전 기사단이 와해한 이후론 더 이상 내가 단장이 아니지만.”

“데스티나.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 딱히 네 실력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지만.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어째서 실력이 더 좋은 자가 단장을 하지 않았나. 그거 아닌가?”

“말하자면 그렇지.”

데스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서 달을 바라보던 데스티나는 미소를 지었다.

주환은 자신의 눈에 비친 데스티나의 미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건 실력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데스티나는 옷의 안쪽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꺼내서 주환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우리 가문의 문장이다.”

어두워서 잘 보이질 않았기에 주환은 데스티나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목걸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금으로 된 목걸이에는 깃발을 들고 있는 그리핀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구국의 12 가문’ 중 하나라고 불리는 가문이지. 구국의 12 가문은 심각한 반역이 일어났을 때 황제를 위해서 싸웠던 12개의 가문을 말한다. 즉, 황족들과 깊게 연관이 되어 있는 가문이라고 할 수 있지.”

“대단히 높은 계급인 듯한데.”

“부정은 하지 않겠다. 내가 속해 있던 성전 기사단은 우리 가문과 연관이 깊은 기사단이지. 우리 아버지는 성전 기사단의 단장은 반드시 가문의 일원 중의 한 명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네가 단장에 오르게 된 건가?”

“내 의지는 아니었다.”

데스티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라는 것은 어릴 적부터 간직해 왔던 꿈. 성전 기사단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지만 실력에 걸맞지 않은 지위를 탐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버지의 명을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들어주시지 않았구나.”

“그렇다. 모두가 흠모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부단장과 갑자기 가문을 등에 업고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를 꿰찬 단장. 언제나 비교당할 수밖에 없었지. 데미안은 좋은 친구이자 전우이고 존경하는 대상인지만 언제나 내가 넘어서야 할 벽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데스티나. 너도 노력했잖아.”

데스티나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필사적으로 노력했었다. 남들보다 몇 배나 노력을 했었지. 쉬는 것을 줄이고 노는 것을 줄이고 자는 것을 줄이면서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데미안은 어느새 저만치 앞서갈 뿐이었다.”

데스티나는 상기된 얼굴로 주환을 바라보았다.

“오늘 확실히 느꼈지. 만약에 데미안이었다면 모든 것을 손쉽게 끝냈을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을 절대로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진정한 기사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데스티나는 감정이 격해지는 듯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난 언제까지나 그를 넘어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주환 너와는 달리 루카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나에게는 기사로서 우리의 백성이었던 자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제 앞으로 우리의 도움을 바라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이렇게나 실력이 부족해서야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가 있겠나?”

“그런 소리 하지 마.”

주환은 흙집에서 있었던 그 일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모두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나머지 두 사람을 먼저 올리기 위해서 끝까지 남아 있던 데스티나의 모습.

그 모습은 주환의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너는 오늘 최고로 기사다웠어. 정말로 기사의 참모습이었다고. 너처럼 남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남들을 도울 수 없다면 대체 누가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거야? 넌 지금도 충분히 기사답고 의지가 되는 동료야. 강해질 수 있다면 더 좋겠지. 그렇지만 그 데미안인지 뭔지 하는 녀석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나쁘게 보는 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야.”

주환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데스티나는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진짜라니까. 정말이야. 그리고 우리는 동료야. 동료는 누가 지켜 주고 지킴을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서로서로 도울 수가 있어야 하잖아?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앞날을 헤쳐 나가는 거. 나는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

“그리고 루카는 농부의 탈을 쓴 괴물이라서 네가 그렇게 책임감을 갖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녀석이야.”

“하핫.”

주환의 농담에 데스티나는 크게 웃음을 지었다.

“위로해 줘서 고맙다.”

“딱히 위로하려는 건 아니야.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이니까. 그나저나 난 네가 이렇게 크게 웃는 거 처음 봐. 미소 짓는 건 봤지만.”

“난 안 웃었다.”

데스티나의 표정은 금세 진지하게 돌아갔다.

“아니야. 진짜로 웃었다니까?”

“정말로 웃지 않았다.”

“웃으면 뭔가 큰일이라도 나는 거냐?”

“웃음은 악마가 입으로 들어와서 허파를 거쳐 나가는 행위다. 크게 웃을수록 큰 악마가 들어오지.”

“그럴 리가 없잖아?”

데스티나의 대답에 주환은 웃음을 지었다.

데스티나는 웃고 있는 주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데스티나의 시선을 느낀 주환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주환, 너는…….”

데스티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다시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인가?”

“그래야지. 이브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니까.”

“그렇군. 당연히 돌아가야 하는 거겠지. 자네는 그곳에 모든 것을 두고 왔을 테니까.”

데스티나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살짝 묻어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어떡할 건가?”

“글쎄.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무조건 돌아간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까.”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염두에 두지 않을 생각이야. 그걸 염두에 두면 내 마음이 약해져 버릴 것만 같거든.”

주환은 야영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너나 루카나, 다 좋은 녀석들이니까 말이야.

“주환,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곳도 이미 좀비들이 점령한 상황이라면서.”

데스티나의 물음에 주환은 아까 이브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만약 이곳에서 좀비를 다시 인간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걸 내가 살던 세계에 적용해 볼 생각이야. 그러면 내가 살던 세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멋진 계획이다.”

데스티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러면 나도 힘을 내서 반드시 네가 돌아가는 방법을 찾도록 해주지.”

“나도 네가 황제 일행을 찾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서 도와주도록 할게.”

“약속이다.”

데스티나는 자신의 주먹을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주환은 자신의 주먹을 그녀의 주먹에 가져다 대었다.

서로 약속을 한 주환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오래 있지는 마. 나는 우선 루카한테 돌아가 보도록 할게. 또 그 녀석 혼자 남아 있으니 걱정이 되네.”

주환은 그 말만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야영지 쪽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던 주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데스티나는 자신이 베려고 했던 나무로 다시 다가갔다.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앞날을 헤쳐 나가는 거. 나는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데스티나는 주환이 했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래. 한 번으로 베어 내지 못했다면, 한 번 더 베면 되는 거다. 끈덕지게 휘둘러 결국 베어 버리면 되는 것. 한 번이 안 되면 여러 번, 한 사람이 못 한다면 동료와 함께.’

데스티나는 정신을 집중하고는 아까 자신이 휘둘렀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이 나무를 파고 들어가 아까 베어 낸 홈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었다.

쿵.

큰 소리와 함께 나무는 서서히 미끄러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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