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덜커덩. 덜커덩.
달구지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달구지를 끌고 있는 당나귀는 너무나도 지쳐서 거친 숨을 계속해서 몰아쉬며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녀석아. 어서 가자!”
당나귀의 주인인 농부는 당나귀를 달래듯이 등을 쓸면서 재촉했지만, 당나귀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질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온종일 내린 비에 땅은 진창이 되었고 달구지의 바퀴 중 하나는 진흙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
보통 때라면 당나귀의 힘으로 그 달구지를 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당나귀의 허리께에는 상처가 나 있었고 털에는 진득한 피가 망울져서 떨어져 내렸다.
“이거 안 되겠구먼.”
당나귀는 앞으로 나아가려 애를 썼지만, 달구지의 바퀴는 진흙 구덩이 안에서 계속 헛돌 뿐이었다.
초조해진 농부는 달구지의 뒤쪽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달구지의 뒤쪽에서 힘으로 달구지를 밀어붙였다.
“흐아아아!”
억센 팔로 그가 계속해서 밀어붙이자 비로소 달구지가 진흙 구덩이에서 조금씩 올라갔다.
“이제 거의 다 되었어!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이 녀석아!”
농부가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달구지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뒤쪽으로 내려앉았다.
그 충격에 농부는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깜짝 놀란 농부는 일어서서 달구지를 끌고 있던 당나귀에게로 달려갔다.
당나귀는 바닥에 누운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농부는 그 모습에서 당나귀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더 이상 갈 수가 없는 거냐?”
농부는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고는 손으로 당나귀의 등을 쓸어 주었다.
“수고했다, 수고했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당나귀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는 많지 않았다.
농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달구지의 옆에 서 있던 한 소녀가 농부에게 물었다.
“아빠. 당나귀가…….”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소녀는 농부의 딸이었다.
농부는 고개를 떨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은 온 힘을 다했단다. 죽어 가면서도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다주었지. 이제는 쉬게 해줄 때가 된 것일지도 몰라. 녀석을 위해서 잠시 기도를 해주도록 하자꾸나.”
농부의 말에 소녀는 쪼르르 아버지의 옆에 섰다.
부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잠깐 당나귀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자 농부는 딸에게 말했다.
“이제 이 달구지는 포기해야겠다. 짐들을 챙겨서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도록 하자꾸나.”
“응. 아빠.”
소녀는 다시 달구지의 위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달구지에 실려 있던 짐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빠, 짐이 너무 많아. 다 들고 갈 수 있을까?”
농부는 달구지 안에 실려 있는 짐들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는 것들을 다 가져갈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이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들을 추려서 챙기도록 하자꾸나.”
두 사람은 달구지 안에 실려 있는 짐들을 일사불란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녀는 짐 중 생필품을 위주로 골라 담은 다음에 두 사람이 가지고 이동할 수 있도록 짐을 작게 추려 나갔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그래. 어차피 더 들고 갈 수도 없을 것 같구나. 이것만 들고 떠나도록 하자.”
부녀는 짐들을 챙긴 뒤에 달구지를 버리고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녀는 어느 정도 걷다가 뒤를 돌아서 자신들이 남겨 두고 온 당나귀와 달구지를 바라보았다.
당나귀가 아직 죽지 않았기에 들숨과 날숨 때문에 배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두 사람은 볼 수 있었다.
저렇게 죽어 가는 동물은 식량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빨리 가자. 그놈들이 언제 여기까지 쫓아올지 모른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녀는 좀비들이 창궐한 자신들의 마을을 버리고 이곳까지 피난을 온 참이었다.
중간에 좀비들의 습격을 몇 번 받았지만, 그때마다 운 좋게 도망쳐 가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빠. 우리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거의 다 왔단다. 조금만 더 걸으면 돼.”
농부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딸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일 뿐이었다.
그도 자신이 가고 있는 목적지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알질 못했다.
두 부녀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생존자 공동체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곳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질 못했으며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 대략적인 위치만을 알고 있기도 했다.
“거기까지만 가면 다 해결이 될 거야. 그곳은 강한 기사님들이 지키고 있어서 좀비들도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는 곳이라고 들었단다.”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또 그곳에는 사람도 많고 서로서로 도우면서 지내고 있다고 들었거든.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걸 잃어버렸지만, 그곳으로 가면 새롭게 시작을 할 수 있을 거야.”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다, 아빠.”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부녀는 서로 위로하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계속해서 걷던 부녀는 이윽고 걸음을 멈추었다. 먼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은 아빠 쪽이었다.
“왜 그래? 아빠?”
“우리 주변에 뭔가가 있는 것 같구나.”
“뭐가…… 있는 거야?”
겁에 질린 딸은 아빠의 품에 안겼다.
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농부는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내가 잘못 느꼈기를.’
그는 겁에 질린 상태로 두리번거렸다.
그때, 사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무언가 불쑥불쑥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이 등장하자 농부는 공포감에 휩싸이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두 사람이 마을을 버리고 떠나게 한 장본인들.
그것들은 바로 좀비였다.
“내 뒤에 숨 거라.”
“무서워! 아빠!”
“걱정 마라. 내가 끝까지 지켜 줄 테니까!”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좀비들은 썩어 버린 퀭한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움직이던 좀비들은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부녀는 자신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그곳까지도 좀비들이 길을 가로막은 상태였다.
“쿠에엑!”
좀비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부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농부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돌을 집어 든 다음 앞에 달려오는 좀비를 향해서 던졌다.
퍽!
돌에 맞은 좀비는 그 충격에 뒤쪽으로 넘어졌다.
농부는 쉬지 않고 돌을 들어서 좀비들에게 연달아 던졌다. 어떤 것은 빗나갔고 어떤 것은 정확하게 명중했다.
그렇지만 돌에 맞은 좀비 중 대부분은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왔다.
“하아. 하아.”
농부는 숨을 몰아쉬었고 그의 딸은 겁에 질린 채 그의 뒤에 붙었다.
최대한으로 발악을 해보았지만, 그로서는 역부족인 숫자였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런데 다 끝이란 말인가?”
죽음을 예감한 농부는 뒤를 돌아서 자신의 딸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휙휙!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공을 가르는 한 하나의 화살. 그 화살은 부녀와 가장 가까이 있던 좀비의 관자놀이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캬악!”
화살의 힘이 얼마나 센지 화살이 좀비의 머리를 관통한 다음 그대로 꼬치처럼 꿰어서 나무에 박혀 버렸다.
그러자 화살에 맞은 좀비는 나무에 매달린 모습이 되었다.
첫 번째 화살이 좀비를 명중하자 이번에는 다른 화살들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좀비들과 부녀의 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화살들은 그 부녀에겐 전혀 해를 입히지 않고 좀비들에게 정확히 명중했다.
부녀는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두 사람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살에 명중당한 좀비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농부는 당황하여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두 사람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아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좀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들 모두는 하얀색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손에는 커다란 석궁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농부는 용기를 내어서 그렇게 물었다.
갑옷을 입은 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투구가 없었으며 붉은색의 망토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가볍게 점프하여 단숨에 두 사람과의 거리를 좁혔다.
붉은 망토의 청년이 그들의 앞에 서자 농부와 소녀는 두려움에 뒤로 물러섰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저희는 적이 아닙니다.”
붉은 망토의 청년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저희들은 성전 기사단입니다.”
“서…… 성전 기사단?”
농부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지만 성전 기사단은 단장이 실종된 이후로 궤멸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분명 그런 적도 있었지요.”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들이 창궐하고 나서 성전 기사단은 한 번 뿔뿔이 흩어졌지만, 다시 조직을 규합하게 되었습니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성전 기사단의 부단장 ‘데미안’이라고 합니다.”
청년이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자 농부의 눈이 커다래졌다.
“다…… 당신이 그 데미안이란 말입니까?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검의 성기사 데미안’, ‘괴수 돌렉을 쓰러뜨린 자!’, ‘100년에 한 번 나올 귀재!’”
계속되는 옛 칭호에 쑥스러워졌는지 데미안이 손을 들었다.
“아아. 거기까지 말씀해 주시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한때는 그렇게 불리던 일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일 뿐이죠.”
“옛날이야기라뇨. 지금도 생생한걸요.”
데미안이 무서워서 농부의 뒤에 숨어 있던 소녀가 조금 앞으로 나와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아저씨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야?”
“유명하다마다. 대단히 강하신 기사분이지.”
“아저씨가 저희를 구해 주러 오신 건가요?”
데미안은 소녀의 눈높이까지 몸을 낮추고는 손들을 들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제 안심해도 된단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오실 수가 있었던 겁니까?”
농부의 물음에 데미안은 몸을 일으켰다.
“이 부근에 생존자들의 공동체가 있다는 소문이 돈 이후로 두 분뿐만 아니라 많은 피난민이 이곳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습격을 당해서 목숨을 잃는 분들도 많았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저희가 이 부근을 순찰하고 있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동체 이야기가 사실이었군요.”
“예. 사실입니다. 현재 다시 재모집된 성전 기사단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서 저희들이 있는 곳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모이고 있죠. 저희는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 예정입니다. 우선 이동을 하도록 하죠.”
데미안은 기사들이 늘어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싱클레어 님.”
“예. 부단장님!”
데미안의 호명에 기사들의 무리에 있던 한 남자가 대답했다.
그는 짧은 머리에 근육질의 다부진 몸을 소유하고 있는 덩치 큰 기사로서, 그 분위기에서부터 다른 기사들과는 차별화되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이동하도록 하죠. 그리고 이 두 분에게 어떠한 위험이 없도록 특별히 신경을 써주시길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싱클레어가 대답하자 데미안은 앞장서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허겁지겁 농부 부녀가 쫓았다.
그러자 싱클레어의 일사불란한 지휘에 따라서 멀찍이 서 있던 기사들이 점점 모이더니 부녀의 뒤쪽에 두 줄로 모여서 질서정연하게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걷던 그들은 이윽고 좁은 산길에서 넓은 풀밭이 있는 곳으로 나갈 수 있었다.
시야가 확 트이는 곳으로 나간 그들은 이윽고 자신들이 갈 길을 막고 있는 존재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꺄악!”
그것을 마주한 소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버지의 뒤로 곧장 숨어 버렸다.
“저…… 저것은?”
농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들은 거대한 독거미들이었다.
인간보다 몇 배나 큰 독거미 세 마리가 입에서 끈적한 액체를 흘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털이 수북하게 난 다리 하나하나의 길이가 성인 남자의 키보다도 더 길었다.
“좀비들이 나타난 뒤로 어느 순간부터 저런 변형된 괴물들까지도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데미안의 목소리는 평온 그 자체였다.
“저런 괴물들은 처음 보는군요.”
“까다롭긴 하지만 퇴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부녀의 뒤쪽에 서 있던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거대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부단장님. 여긴 제가 처리할까요?”
그렇지만 데미안은 미소를 지으면서 거절했다.
“아닙니다. 여기는 제가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몸에 녹이 스는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서는 망설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데미안은 허리춤에서 하얀색의 막대를 하나 꺼냈다.
막대는 상아로 만든 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매끈했다.
그는 그 막대를 거대 거미들에게 겨누었다.
“너희가 우리와 싸울 의향이 있든지 없든지. 이렇게 만난 이상 너희를 퇴치할 수밖에는 없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하얀색 막대의 끝에서 빛으로 된 검날이 솟아올랐다.
빛으로 만들어진 검은 은은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아티팩트 중에서도 최고 등급이라고 할 수 있는 ‘오파츠’ 등급의 아티팩트로서 ‘하르페’라고 불리는 마검이었다.
“내 쪽에서 먼저 가겠다.”
그 말과 함께 데미안이 움직였다.
바람처럼 빠르면서 유연한 움직임.
그가 하르페를 한 번 휘두르자 앞에 있던 거대 거미가 단숨에 절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쩌억.
마치 절반으로 잘린 수박처럼 거미는 그렇게 쓰러졌다.
나머지 두 마리의 거미들은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데미안으로선 그들에게 도망칠 기회를 줄 생각은 없었다.
데미안은 나머지 거미들에게 여유 있게 다가간 다음 몇 번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뒤에서 데미안의 싸움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녹색의 빛이 마치 도깨비불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거미들을 향해서 검을 휘두른 데미안은 빛의 검날을 소멸시키고는 다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아,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농부가 그렇게 묻자 데미안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다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움직이도록 하죠.”
농부는 반신반의하면서 데미안을 따라서 거미들의 옆을 지나갔다.
그러나 거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굳어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일행들이 거미의 옆을 스쳐 지나갔을 때, 농부는 혹시 모르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미들은 조각조각 나면서 바닥으로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