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여마법사는 주환의 설명을 가만히 듣더니 루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카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했다.
주환은 뭔가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여마법사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손님을 만나지 않아요.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만나지 않았죠.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입니까?”
“전…… 거짓말쟁이가 아니에요.”
여마법사의 기분이 상한 듯하자 주환은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비난할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제 동료의 아버지 이야기 말고도 조언이 필요한 일들이 많아서 마음이 급해졌어요.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들어 줄 수는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떠한 사정을 가지고 계시든 저는 관심이 없어요. 영체로 돌아다니는 건 생각보다 마나를 많이 쓰는 일이라서 이제는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에요. 아, 참. 이곳의 물건들을 다 쓰셨으면 전부 다 정리를 하고 가셨으면 좋겠네요. 관리하는 것도 일이라서요. 그럼.”
여마법사는 몸을 돌린 다음 복도를 유유히 이동했다.
세 사람은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거실로 나가 거울 쪽으로 향하던 여마법사는 문득 한쪽에 놓인 주환의 돌격 소총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거기 있는 남자분이 저 물건을 가지고 좀비들을 쓰러뜨리는 걸 수정구를 통해서 본 적이 있어요.”
여마법사는 총으로 가까이 가서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이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거죠?”
“그건…….”
주환은 이때다 싶어서 돌격 소총을 집어 들어 여마법사의 앞에 내밀었다.
“저희의 사정에 대해서 들어 준다면 이 물건에 대해서 알려 줄게요. 그게 조건이에요.”
“예? 그런 치사한…….”
여마법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고민이 되는 듯 거실의 주변을 몇 바퀴나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면서 고민을 하던 여마법사는 결심을 한 듯 손을 들어서 주환을 가리켰다.
“다…… 당신만 온다면 제 탑으로 와도 좋아요.”
갑작스러운 여마법사의 제안에 주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만 말입니까?”
“맞아요. 들여보내 줄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잠깐만 그건 안 돼.”
여마법사의 말에 루카가 반대하고 나섰다.
“너한테 가장 볼 일이 있는 건 나란 말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과 만난 적은 없어요. 이 정도면 대답이 되지 않았나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데스티나는 루카를 진정시키려는 듯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여마법사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 친구만 탑으로 들여보내 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래요……. 이건 제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기 위한 거죠.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겠다면 저는 미련 없이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잠깐만.”
데스티나는 주환에게로 다가가 속삭였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주환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혼자서라도 만나야 하겠지. 어차피 너희의 용건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저 마법사를 설득해서 제대로 된 답을 듣도록 할게.”
데스티나와 이야기를 끝낸 주환은 여마법사에게로 다가갔다.
“좋아요. 그럼 저 혼자 가도록 하죠.”
“잘 생각했어요. 물론…… 엄청나게 떨리긴 하네요.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게 얼마 만인지……”
여마법사는 불안한 듯 양손을 비비고 있었다.
“그러면 대신 저희 나머지 일행은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 집에 머물러도 괜찮습니까?”
“그건 상관없어요. 깨끗하게 쓴다면야.”
“그럼 가도록 하죠.”
“당신이 가진 모든 짐을 다 챙겨오세요. 당신이 가진 그 신기한 물건들을 다 한 번씩 보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주환은 자신의 짐들을 모조리 챙겼다.
그리고 주환은 여마법사가 이끄는 대로 거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주환의 뒤를 따르며 루카는 데스티나에게 물었다.
“저러다가 저 녀석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마법사는 뭔가 이상해. 주환 녀석. 가서 이상한 실험 같은 걸 당하는 게 아닐까?”
“만약에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구하러 가는 수밖에 없겠지.”
거울의 옆에 선 여마법사는 주환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신은 이 앞에 서주세요.”
주환은 시키는 대로 거울의 앞에 섰다.
“이건 평범한 거울이 아닙니다. 제가 있는 탑과 이 집을 이어 주는 통로 같은 거죠.”
“통로?”
주환은 손을 뻗어서 거울을 만져 보았다.
만져 보았을 땐 아무런 이상함을 느낄 수가 없는 평범한 거울일 뿐이었다.
“그렇게 만져만 봐서는 알 수가 없어요. 저처럼 영체만 보내거나 아니면 특수한 마법을 사용해야 육체까지 온전히 보낼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거죠.”
“특수한 마법이 뭡니까?”
“텔레포트에요.”
“텔레포트?”
“네. 이 거울이 있는 곳에선 아무리 먼 거리라도 제가 있는 탑까지 단 한 번에 이동할 수가 있어요. 거리가 멀면 멀수록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큰 상관은 없어요.”
“이제 저는 뭘 하고 있으면 됩니까?”
“다른 걸 할 건 없어요. 그냥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거울 앞에 서 있기만 하면 되죠.”
주환은 약간 긴장을 한 채로 거울의 앞에 서서 기다렸다.
그가 준비된 것을 느끼자 여마법사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고 있자 이윽고 거울에서 옅은 빛이 쏟아져 나와서 스포트라이트처럼 주환을 감쌌다.
“기분이 이상한데.”
“금방 끝날 거니까. 안심해요.”
여마법사가 그를 안심시키는 동안 거울에서 나오는 빛이 너무 강렬해져서 주환은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 저의 탑에서 보도록 해요.”
더욱더 강렬해지는 빛과 함께 주환은 더 이상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 * *
주환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 거울은 없었다.
“여기는.”
주환은 눈을 깜빡거려서 아직 흐린 눈을 바로잡았다.
그가 있는 곳은 꽤 넓으면서도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주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택에서 봤던 것과 똑같이 생긴 거울이 그의 등 뒤에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갑자기 들려오는 한 남성의 목소리에 주환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주환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옆에 누군가가 와서 서 있었다.
그는 회색빛의 머리칼을 가진 키가 크고 날렵하게 생긴 남성.
머리칼의 색에 비해서 외모는 30대를 넘어 보이진 않았다.
그는 집사를 연상하게 하는 옷을 입었으며 특이하게도 푸른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너무나도 오랜만의 손님이시라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여기는 어딥니까?”
“저의 주인님이 거하시는 탑의 안입니다.”
“주인님?”
“예.”
남자는 빙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옷 뒤에서 검은색의 꼬리로 보이는 무언가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주환의 눈에 포착되었다.
‘이 남자, 인간이 아닌 건가?’
“아무튼 제 소개가 너무 늦은 것 같군요. 저는 이 탑을 관리하고 있는 집사인 타마두크라고 합니다. 주인님께 손님을 맞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렇게 모시러 왔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짐은 저에게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타마두크가 주환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주환은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짐들을 타마두크에게 넘겼다.
타마두크는 짐을 들고는 주환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타마두크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주환은 그 뒤를 따라서 나갔다.
방 밖으로 나간 주환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앞에 긴 복도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건물 전체가 당신의 주인 거라는 거죠?”
“물론입니다. 주인님은 어릴 적부터 아주 큰 유산을 상속받으셨죠.”
타마두크는 앞장서서 걸어갔고 주환은 그 뒤를 따랐다.
주환이 타마두크의 뒤를 따라서 갈 때, 그의 허리 쪽에서 삐죽이 나와 있는 꼬리를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 꼬리는 동물의 꼬리와는 좀 달라 보였으며 채찍을 연상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이쪽으로.”
복도를 걷다가 이리저리 꺾어져서 이동했기에 주환은 자신이 원래 나왔던 방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죠?”
“거의 다 왔습니다.”
주환이 최종적으로 안내된 곳은 복도를 벗어난 넓은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은 원형으로 되어 있었으며 꽤나 넓었는데 사방에는 이상한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응접실의 가운데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주환은 응접실의 누군가가 자신이 보았던 그 여마법사인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주인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고마워요. 타마두크.”
여마법사의 모습은 영체로 등장했을 때와는 달랐다.
영체였을 때에는 유령처럼 보이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은 마법사답게 풍성한 붉은색 계통의 풍성한 로브를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당신이 아까 그 저택에서 보았던?”
주환이 묻자 여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브라고 합니다.”
“처음 봤다니. 아까 만났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건 영체로서의 만남이었고 육신으로서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 차이가 있는 건가요?”
“남들은 모르지만, 저로서는 의미가 있는 일이죠. 영체 상태가 아닌 진짜 육신을 가진 인간을 만나는 건 꽤나 오랜만의 일이니까요.”
“육신을 가진 인간에 집사는 포함되지 않는 거군요.”
주환의 말에 이브는 타마두크에게로 눈을 돌렸다.
“보시다시피 그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렇기에 카운트에는 들어가지 않아요.”
“꽤나 까다로운 기준이네요.”
주환은 인사를 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섰다.
“저는 김주환이라고 합니다.”
주환이 악수를 청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자 갑자기 이브는 뒤쪽으로 슥 하고 물러났다.
“죄, 죄송하지만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말아 주시겠어요?”
주환은 민망해진 손을 뒤로 뺐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어째서 그렇게 사람들을 멀리하는 거죠?”
“그건…… 저는 타인들과 접촉하는 게 극도로 싫기 때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싫다는 이야기인가요?”
“네. 그래요. 정확한 사정을 설명해 드리기는 힘들지만 제 목숨을 유지하는 중요한 일이죠. 만약에 당신의 특별한 물건들이 아니었으면 당신 역시도 만나지 않았을 거고요.”
이브는 옆에 서 있는 타마두크를 보면서 말했다.
“손님을 위해서 차를 좀 준비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바로 대령하도록 하죠.”
타마두크는 들고 있던 짐을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이브는 주환을 그 테이블 쪽으로 안내했다.
타원형의 테이블은 매우 넓었으며 이브는 주환이 자신에게서 가장 먼 쪽에 자리 잡아서 안게끔 유도했다.
“그럼 이제부터 서로가 궁금했던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이브는 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