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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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어떤 상황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그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 배역의 감정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감정이 완전한 백지상태니, 황우 감독님으로서 답답하셨던 것이다.
물론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욕정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내 답을 듣고 난 후에는 아예 체념하신 그런 표정이 되셨다.
“소운이 쟤보고, 가슴을 조금 더 노출해보라고 할까?”
“그건 왜요?”
“아무래도 가슴을 노출해서 그걸 보게 되면, 조금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어?”
“에이~ 제 와이프도 아닌 여자를 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그럼 자네는 서 배우하고 그 일을 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그때는 반응이 있긴 하고?”
“에이~ 저 고자 아닙니다. 솔직히 요즘은 촬영에 지장이 있다고,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것 때문에 제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데요.”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데도, 지금 아무런 감정이 생기질 않는다고?”
“저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아가씨잖습니까.”
나에겐 당연한 일이, 황우 감독님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인 모양이다.
황우 감독님뿐 아니라 스태프들까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고, 심지어 촬영감독님께서는 뭐 저런 이상한 별종이 있나 하는 그런 표정이셨다.
“한 배우, 지금까지 여자 몇 명하고 관계를 해봤나?”
“하나요.”
“서 배우 한 사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결혼한 남자가 와이프 말고, 뭣 때문에 다른 여자와 잡니까.”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자네 결혼하고 몇 번이나 잠자리를 가졌었나? 횟수로 말일세.”
“제법 될 걸요. 어쩔 수 없는 날 빼고는, 하루에 서너 번씩은 하니까요. 제가 나름 변강쇠이긴 하거든요.”
“그런데도 다른 여자에게 욕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와이프 보다 더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없는데, 뭐하려고 다른 여자에게 그런 생각을 품습니까.”
“하~아~ 정말 인연이 될 사람은 따로 있다더니만, 그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네. 남자 배우가 옆에만 가도 바짝 얼어붙어서 몸이 굳던 서 배우나, 벗고 유혹하는 여자가 있어도 아무런 욕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네나........”
예나에 문제는, 이미 이 바닥에 파다하게 퍼진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감독들은 예나가 캐스팅 되면, 스킨십이 있는 장면은 아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물론 그 덕분에, 예나에게 ‘눈빛의 여왕’이란 칭호가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말이다.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상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만들고, 그 장면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조차 그 감정에 빠져들게 만들었기에, ‘눈빛의 여왕’이란 칭호가 붙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예 그런 감정조차 표현할 수 있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니, 황우 감독님으로서는 미치고 폴짝 뛸 노릇인 것이다.
황우 감독님은 사내인 내가, 설마 그런 부분에서 정신적인 고자란 사실을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으셨던 것이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잠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황우 감독님의 땅이 꺼질 것 같은 표정을 마주하고 있는데, 예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 아직 못 찍었어?”
“뭘?”
“베드신에서 계속 NG가 나는 통에, 현장이 올 스톱 상태라고 하던데?”
“그러게. 힘들긴 하네.”
“지금 옆에 아무도 없지?”
“응. 그럼 자기 차로 가서, 차 문을 걸고 다시 전화해.”
“응?”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예나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무슨 일일까 하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차로 갔고, 예나 말대로 상호까지 쫓아낸 후에 차 문을 닫아걸고 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차 문은 걸었어?”
“응.”
“그럼 자기가 앉은 곳 커튼도 쳐. 다른 사람이 자길 보면 안 되니까.”
“커튼은 왜? 어차피 이 차도 선팅이 진하게 되어 있잖아. 그리고 여기 그늘이어서 바깥에서 안이 보이지도 않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도, 예나의 요구사항이 제법 많았다.
둘이 차 안에서 키스를 하더라도, 선팅 때문에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차인데, 커튼은 뭐하려고 친다는 말인가?
“그럼 내가 1분만 있다가 영상통화로 전화를 걸 테니, 잠시만 기다려 봐.”
그렇게 예나는 또다시 전화를 끊어버렸다.
‘헉!’
“도대체 뭐해?”
“뭐하긴 뭘 뭐해. 자기하고 하고 싶어서 그러지. 그러니 빨리 촬영 끝내고 와서 해줘~ 아~응~ 자기야~ 나 정말 자기하고 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잠시 후 예나가 전화를 다시 걸었고,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헉!’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면에는 침실에서 침대 등만 켜두고, 나를 유혹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예나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놀라움은 잠시였다.
예나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내 중심이 불끈거렸고, 촬영이고 뭐고 다 접고 집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만 머리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빨리 오케이 사인 받고, 금방 올 거지?”
“알았어. 꼼짝하지 말고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
“아냐! 자기가 오케이 사인 받고 와야지, 선물 줄 거야.”
“알았다니까. 나 지금 가서 후딱 찍고 바로 달려갈게.”
욕정이 치밀어 오른다는 말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아니 지금 내 상태는 분위기가 아닌 욕정 그 자체였고, 예나가 내 옆에 있기라도 하다면 이 차 안에서도 미친 듯 사랑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랄하고 있네. 잡놈 잡년 둘이서 떡을 치는데 사랑이라니.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그만 씨불이고, 열심히 대주기나 해!”
“자기야, 나 정말 자기 사랑해.”
“계속 지랄하면, 앞으로 안 온다.”
그러자 소연인 슬픈 표정으로 체념한 듯 다리를 벌렸고, 나는 미친 듯 그년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칠 것 없이 초원을 내달리는 야생마가 되었고, 먹이를 앞에 둔 하이에나였다.
내가 엉덩이를 들썩거릴 때마다, 소연인 몸속 깊은 곳까지 전해져오는 자극에 달뜬 신음을 토해내고 있었고, 그런 소연이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컷! 오케이!”
한 방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내가 반쯤 풀린 눈을 하고 차에서 나가자 촬영이 시작되었고, 나는 반쯤 미친 상태로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우리 서 배우가 정말 대단하긴 대단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 한 배우를 짐승으로 만들었을까?”
황우 감독님은 갑자기 돌변한 내 태도에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조금 전 예나가 한 행동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선배님, 고생하셨어요.”
“아, 예.”
“그런데 너무......”
“예?”
“너무 짐승 같으셨다고요.”
소연이 역을 맡은 김소운이란 이름의 신인배우가, 옆에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조금 전 베드신의 여운이 남은 것인지, 신인 여배우의 볼은 아직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그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아뇨, 괜찮았어요. 아깐 정말 좋았거든요.”
“예?”
김소운이란 여배우는 뜬금없는 소릴 내뱉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선 촬영장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솔직히 나로서도 이 친구의 얼굴을 오래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공사를 하고 찍었지만 내가 잔뜩 흥분한 상태였기에, 그 신을 찍는 동안 내 빳빳한 그놈이 계속 그녀의 중심을 자극했었고, 그녀 또한 그것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니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예나가 아까 전화를 걸어서 감독님을 바꿔달라고 하더니.......”
“무슨 일은 무슨 일.”
“치! 아무 일도 없었는데, 예나 전화를 끊자마자 감독님이 스탠바이 하라고 하셨을까.”
“감독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집에나 가자.”
미정이 누나와 지민이 누나는, 갑자기 돌변한 내 태도에 의아함을 표시했다.
하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조금 전 예나와의 통화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이건 우리 부부 둘 사이의, 내밀한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열 번을 넘게 NG를 냈던 장면을 예나와 통화로 단박에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자기 왔어. 바로 나가자.”
“응, 어딜 나가자고?”
“오랜만에 분위기 괜찮은 곳에 가서,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아까 나보고 빨리 오라면서?”
“치! 자기가 감정이 살지 않아서 절절매고 있다고 해서 그런 거지.”
“그럼 아까 가짜로 그랬던 거야?”
“내가 얘기했었잖아. 촬영이 끝이 날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고.”
한마디로 미치고 폴짝 뛸 일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예나를 품을 수 있다는 기대에 잔뜩 들뜬 마음으로 집에 달려왔는데, 예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것이다.
순간 온몸의 맥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고, 세상 모든 것이 귀찮다는 느낌이었다.
“나 그냥 좀 쉴래.”
“자기 삐진 거야?”
“삐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귀찮고 피곤해서 그래.”
“자기 삐졌구나.”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언성이 올라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말의 뜻을 확실하게 경험한 것이다.
오랜만에 예나를 안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기대로, 마치자마자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왔는데, 예나의 태도에 맥이 쭉 빠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럼 당연한 것 아니야? 우리가 수십 년을 같이 산 부부도 아니고, 아직 신혼인데.”
“나중에 나이가 들면, 자기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자기가 지금 그랬잖아. 우리가 ‘수십 년을 같이 산 부부도 아닌데’라고. 그 말은 수십 년 후에는, 자기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순간적으로 뜨끔했다.
다들 그러지 않는가?
결혼 초반에는 하루가 멀다고 아내를 사랑해주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소 닭 보듯 하면서 아내보다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린다는 그런 말이 있으니 말이다.
예나는 잔뜩 토라졌고,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예나를 달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잘못한 덕분에 잔뜩 토라진 예나를 달래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리다가, 결국 예나의 말대로 바람도 쐴 겸 해서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어딜 가려고?”
“떡볶이 먹으러 갈 거야.”
“뭐? 떡볶이? 갑자기 떡볶이는 왜? 떡볶이가 먹고 싶으면 주문해서 먹으면 되잖아.”
“아니,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가게에 앉아서 먹어보고 싶어.”
“혹시 가게서 떡볶이를 먹어본 적이 없었던 거야?”
예나의 말에 ‘혹시?’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 국민 최소 95% 이상은, 언제든지 자기가 먹고 싶을 때 찾아가서 친구와 함께 수다를 떨면서 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그런 일을, 예나라면 어쩌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의 그 생각은 맞았다.
예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대답을 했지만, 그런 담담한 표정을 보면서도 왠지 나는 예나의 그 덤덤한 표정이 짠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