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크랭크인에 들어가다.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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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실이나 촬영 현장에서 귀신을 보면 대박이 난다는 이야기는 이미 이 업계에서 정설로 굳어진 이야기다.
그런데 오늘처럼 촬영 첫날에 NG 없이 깔끔하게 촬영이 끝 난 작품이, 대박 아니면 쪽박을 찬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예나도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을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그냥 허튼소리로 치부하고 넘어갈 그런 문제는 아니다.
“오늘 촬영 분위기는 어땠어?”
“NG 하나 없어 잘 넘어갔으니 당연히 좋았지. 황우 감독님도 신이 나셨고.”
“황우 감독님이 이번 영화에 자신이 있으신가 보다.”
“응?”
“황우 감독님이 그런 소문을 모르고 계실 것도 아닌데, 걱정하기보다 오히려 기분이 좋으셨다니까 하는 말이야.”
하긴 내가 봐도 시나리오는 재미가 있었고, 함께 촬영한 배우들과도 합이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늘 촬영도 빨리 끝이 났는데, 한잔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어?”
“감독님이 촬영 끝났다니까 모두 뿔뿔이 흩어지던데.”
“좀 특이한 사람들만 모였나? 하긴 그렇긴 하겠다.”
“뭐가?”
“아니야.”
예나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 짐작되는 일이다.
첫날 촬영을 무사히 마치면, 경력이 좀 있는 선배 배우가 후배들을 이끌고 술집으로 가서 자축 아닌 자축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앞장서서 분위기를 이끌어나갈 만한, 중견 배우가 없다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저들에게는 신인인 내가 먼저 나설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잠시 머뭇거리다가 촬영장을 떠났다.
‘형, 바빠요?’
‘아니. 왜?’
‘지금 통화해도 돼요?’
뜬금없이 현서에게서 톡이 왔다.
“나 잠시 통화 좀 할게.”
“누구?”
“김현서.”
“그 친구가 왜?”
“나도 모르지.”
예나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고, 나는 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선배 왜?”
“아직 촬영하고 있어요?”
“오늘 첫날이라서 촬영이 일찍 끝났어. 무슨 일이라도 있어?”
“혹시 아빠하고 촬영장 구경을 갈 수는 없나 싶어서요.”
“잠깐만 기다려 봐. 내가 집사람에게 물어보고, 5분 내로 전화를 다시 해줄게.”
전생의 삶이라면 몰라도 이번 생에서는, 아직 내 처지에 누굴 촬영장에 초대하고 말고 할 짬이 아니었다.
감독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한다면 거절하시진 않을 것이지만, 아직 신인배우에 불과한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시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
“김 의원님하고 현서가, 촬영하는 것 구경을 할 수 없겠느냐고 묻는데 어쩌지?”
“촬영장 구경이 어때서.”
“아직 내가 감독님께 이런 문제로 부탁을 드릴 짬은 아니잖아.”
“알았어. 내가 말씀드릴게. 언제 온다고 해?”
“이제 물어봐야지.”
“그럼 나한테 전화 좀 바꿔줘. 내일 된다면 내일 하지.”
“당신 내일도 촬영이 없잖아.”
“그러니까 내일 하자고 하지. 자긴 촬영이 비는 날이 없잖아. 그런데 자기네들끼리 보다가 가라고 할 거야? 누군가는 옆에서 같이 있어 줘야지.”
나는 전화를 다시 걸어서 예나를 바꿔줬고, 내일 촬영장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촬영 마칠 때까지는 그냥 자.”
“왜?”
“자긴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지 몰라도, 앞으로 촬영을 계속하려면 체력적으로 부담이 엄청 되거든. 그런데 벌써부터 힘을 빼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럼 앞으로 촬영 끝날 때까지, 이렇게 손만 잡고 자야 한단 말이야?”
“손만 잡긴 뭘 손만 잡아. 이렇게 꼭 안고 있는데.”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내 손이 슬며시 예나 가슴으로 향하니, 예나는 내 손등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린다.
그러고서는 촬영이 끝이 날 때까지는 부부관계는 없다고 선언했고, 그런 예나의 냉정함에 나는 잔뜩 풀이 죽어 버렸다.
아무리 크랭크인에 들어가면 바쁘다고 하더라도 아직 초반이기도 하고 힘이 펄펄 넘치는데, 이제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독수공방해야 하는가 말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번 영화를 하지 않았을 텐데.”
“왜?”
“우리 아직 신혼이잖아. 그런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라고?”
“자기 힘들어서 병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석 달만 참으면 촬영 끝나잖아. 그러니 조금만 참아. 응?”
예나는 마치 나를 어린아이를 달래듯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풀어지진 않았다.
아직 한창나이인 내가 이렇게 예쁜 여자가 옆에 누워 있는데, 그냥 안고 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야, 일어나.”
“으~음~”
벌써 시간이 5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오늘 콜업 시간이 7시란 점을 생각하면 결코 이른 시간이 아니었기에, 나는 간단한 샤워 후에 예나의 입맞춤을 받으면서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늘 국회의원이 오기로 했다면서?”
“아! 집사람하고 같이 올 겁니다.”
“한 배우도 잘 아는 사람이야?”
“그렇게 잘 안다는 것보다는 이야기가 좀 통하는 분이고, 학교 선배 부친 되시는 분입니다.”
어젯밤 예나가 감독님께 허락을 받으려고 통화를 했던 것 때문인지, 황우 감독님은 나를 보자마자 김영범 의원에 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참, 오늘 베드신은 잘 소화해낼 수 있겠어?”
“그다지 하드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오늘 그 양반이 올 때, 서 배우도 같이 따라온다면서?”
“예 그러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묻는 말이잖아. 서 배우 앞에서 베드신 연기하려면 많이 불편할 텐데.”
그러고 보니 예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연기라고 하지만, 남편인 내가 다른 여자 배우와 베드신을 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연기하는 나도 예나가 촬영장에 있다면, 예나를 의식해서 연기가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죠?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분이 좀 그러네요.”
“먼저 베드신부터 찍고 가지.”
“진수정 배우는 도착했습니까?”
“걔도 오전에 촬영분량이 있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독님의 배려 덕분에 베드신을 먼저 찍기로 했다.
하지만 문제는 감독님이 아니라 진수정 배우에게서 나왔고, 그녀의 요구는 명분상으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연기인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한다는 것은 배우로서 자질 문제 아닌가요?”
“배우님, 아무리 그래도 한강수 배우와 서예나 배우는, 아직 신혼이잖습니까?”
“그건 조감독님 생각이시죠. 한강수 배우야 신인이라고 하지만, 서예나 배우는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이잖아요. 저 같은 것은 우러러보기조차 힘든 그런. 그런 분이 베드신 때문에 삐지기라도 할까 봐서요?”
조감독의 말에 진수정 배우는 날 선 반응을 보였고, 덕분에 조감독은 진 배우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형님, 어딜 가시려고요?”
“내가 부탁을 좀 해보려고.”
“그냥 조감독님에게 맡겨 두세요. 형님이 가서 부탁하시면 오히려 기고만장해집니다.”
“나 때문에 조감독이 저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잖아. 그런데 저 양반도 어지간하다.”
“저 여자 원래 저래. 이 바닥에 소문이 짜한 거든.”
“누나도 저 양반에 대해서 좀 알아요?”
“당연히 알지. 좀 얼굴 반반한 남자 배우가 있으면, 먼저 들이대기로 유명하잖아. 아무튼 지금은 네가 나서기보다는 조감독님에게 맡겨두고, 나중에 조감독님 기분이나 좀 풀어줘.”
“하~아~ 돌겠네.”
“저 여자, 예나한테 질투를 느껴서 그래.”
“자기가 뭔데 집사람한테 질투를 느껴요?”
“그렇잖아. 지 말대로 예나가 우러러보지도 못할 만큼 위에 있으니, 당연히 질투가 날밖에. 거기에다 예나를 배려해서 베드신 촬영을 당기자고 하니, 속에서 얼마나 열불이 나겠어.”
결국 조감독은 진 배우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감독님께 향했고, 황우 감독님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진 배우에게 다가갔다.
“얘 담당 매니저야?”
“예. 감독님.”
“얘 데리고 꺼져!”
“예?”
“소문 더럽게 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회사 대표 부탁 때문에 캐스팅했더니, 감독 지시에 불응하는 이런 애는 필요 없으니까 데리고 꺼지라고!”
“감독님.”
“빨리 데리고 내 현장에서 꺼져!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 처먹고서는.”
뜻밖에 일이 커져 버렸다.
감독님의 고함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하던 일까지 멈추고 무슨 일인가 하고 잔뜩 긴장한 상태가 되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진 배우의 매니저는 황우 감독님께 빌기 시작했다.
“너희 대표에게 전해. 앞으로 이 바닥에서 배우들 팔아먹으려면, 접대하는 짓거리부터 집어치우라고. 배우가 연기로 승부를 볼 생각을 해야지, 구멍장사로 배역을 딸 생각이나 하면 회사 금방 말아먹는다고.”
“감독님!”
“왜? 내 말이 틀렸어? 얘, 캐스팅해달라고 찾아왔던 날, 호텔 객실 키를 넘겨주려던 사람이 당신 아니었어? 내가 아무리 딴따라라고 하지만, 그딴 짓까지 하면서 영화 찍은 적은 없다! 데리고 빨리 꺼져!”
황우 감독님 말에 매니저는 얼굴이 벌겋게 되었고, 진 배우는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황우 감독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황우 감독님 말에 따르면, 이번 영화출연을 위해서 회사대표까지 주도해서 성 접대를 하려다가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우 감독님은 진 배우를 캐스팅했다가, 결국 쫓아내려고 하시는 것인 모양이다.
결국 더 있어 봐야 망신만 당할 것으로 판단한 것인지, 매니저는 진 배우를 아예 끌어안다시피 해서 현장을 벗어났다.
그렇게 진 배우와 매니저가 현장을 떠나자, 감독님은 잔뜩 성난 목소리로 30분간 촬영 중단을 선언하시고 담배를 입에 무셨다.
그러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뭔가 아는 것이 많은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설치다가, 기어코 개망신을 당하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 없단 말이 딱 맞았네.”
“그런데 배우가 빠지면 촬영이 딜레이 될 텐데.”
“어차피 진수정이 맡은 역할을, 할 배우야 수두룩할걸.”
베드신 때문에 여자배우들이 꺼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영화에서 베드신은 단 한 차례고 그 강도 또한 딱히 하드하지도 않기에, 대타를 구하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조감독은 휴대전화를 들고 주차장 쪽으로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감독님,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이게 왜 한 배우 때문이야.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저런 년이 문제지.”
“하지만 촬영 일정이.......”
“초반이라 괜찮아. 그리고 저런 년은 한번 오지게 당해봐야, 다른 작품에서도 설칠 생각을 하지 못해. 투자사서 소개한 덕분에 대표라는 인간을 만났다가,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단단히 얘기까지 했는데도 저 지랄이니........”
황우 감독님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것인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씩씩거리셨다.
“감독님, 커피라도 한잔 드세요.”
때맞춰 상호가 얼음이 가득한 커피를 가져왔고, 감독님은 속이 타는지 커피를 벌컥벌컥 목구멍으로 넘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