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크랭크인에 들어가다. (1)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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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여기서 자도 된다니까.”
“형, 아니에요. 아침에 연락 주세요.”
김영범 의원과 현서를 내려준 상호는, 누나 둘을 태우고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내 집으로 갔고, 예나와 나는 김 의원님 부녀를 집으로 안내했다.
“와! 여기.......”
현관을 들어서면서부터, 현서는 아예 입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양산에 있는 집과는 아예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예나의 집은 화려할 뿐 아니라 면적 또한 엄청났던 탓이다.
“의원님, 이리로 앉으세요.”
“그러지. 그런데 자네 안사람은 세금을 엄청 내겠네.”
“원래 잘 나가는 연예인을 두고, 걸어 다니는 중소기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말이다.
벌어들이는 것이 많으니 세금은 많이 내는 것이 당연했고, 그 규모는 웬만한 중소기업 이상이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은 단 한 번의 사소한 말실수조차도 치명타가 되는 법인데, 국민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세금납부 문제는 절대 소홀히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단지 합법을 이용해서 세금을 줄이기 위해 복지재단에 기부하는 것 등의 방법으로, 절세와 동시에 선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편법이라면 편법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배가 출출하시지 않습니까?”
“이 밤중에 뭘 먹는다고.”
“조금 있으면 제 여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그때 간단히 드시지요.”
“형, 그럼 오늘도 라면 끓여줘요?”
“현서야!”
“강수 형이 라면 엄청 잘 끓이거든요. 아빠도 드셔 보시면.......”
결국 오늘도 내가 라면 담당이 되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온 지수가 나를 발견하고, 가장 먼저 한 말이 ‘오빠, 라면’이었으니 말이다.
“지수 양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갈 생각이라고?”
“예.”
“유학생활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은데.”
“알아요. 하지만 제가 꼭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어렵더라도 극복해야죠.”
내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엉뚱하게도 지수가 김 의원님의 말상대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험생이었던 딸을 가진 김 의원 눈에는, 혼자 서울에 남아 학교에 다니고 있는 지수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의원님, 드셔 보세요.”
“이거 잘 먹겠습니다. 이런 밤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서는 야식은 꿈도 꾸지 못하는데......”
예나가 김 의원에게 라면 드시길 권하자, 김 의원은 환한 표정으로 젓가락 가득 라면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각자 앞에 하나씩 놓인 냄비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배우 자네, 여기에 특별한 것이라도 넣은 것인가?”
“파 말고는 넣는 것 없습니다.”
“그래? 그럼 이 냄비 때문에 이런 맛이 나나?”
결혼을 하고 난 후부터, 예나가 살았던 이 아파트에도 양은냄비가 열 개씩이나 준비되어 있다.
손님이 찾아와서 라면을 끓일 때, 사람 숫자가 많으면 물 조절에 실패할 위험성이 많았기에, 양은냄비를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나눠줬던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라면의 맛을 양은냄비가 불러일으키는 추억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렇게 라면으로 출출한 배를 달래고 나서야 지수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 여기 산책할 만한 곳이 없겠나?”
“그럼 같이 내려가시지요.”
혼자 내려가셨다가는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 뻔했기에, 나는 김 의원을 모시고 1층으로 내려가서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자네 집사람 1년에 얼마나 버나?”
“년 단위로는 계산을 못 합니다. 아예 1년을 꼬박 쉬게 되는 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집을 보니 내가 괜히 정치한답시고 설쳤다 싶어서.”
“에이~ 의원님 마스크로는 연예인은 못하십니다.”
“무슨 말인가? 그래도 예전에는 나보고 정치 대신에 탤런트를 하라고 권유하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었는데.”
아무튼 이 양반도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정치판에서 십수 년을 살아온 사람으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순수함이 있는 양반이었고, 저런 가벼운 농담에조차 발끈하는 그것을 보니, 내 입가엔 자연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혹시 요즘 자금 사정이 어려우신 겁니까?”
“정치하는 사람 중에서,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국민들이야 국회의원 세비가 아깝다고 아우성이지만, 우리 정치판 현실을 보면 세비만으로는 버텨내기가 쉽지는 않지. 그렇다고 집에 있는 식구들에게, 손가락만 빨고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양반이 나에 대해서 뭘 믿을 것이 있다고, 이렇게 노골적일 정도로 솔직한지 모르겠다.
사실 김 의원 말처럼, 대한민국에서 정치하려면 돈이 엄청 들어간다.
전생의 삶에서 경험한, 내 경험으로도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국회의원이 여의도에서만 생활한다면 그래도 웬만큼 버틸 수가 있다.
그렇지만 지역구를 관리해야 하는 선출직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관리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하고 지역구가 지방에 있는 의원들은 훨씬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1년에 1억5천, 매월 1,200만 원 정도가 세비로 책정되어 있으니, 단순히 금액만 놓고 본다면 국회의원의 세비는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그 금액이 국회의원으로서 활동하기에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국회의원에게 가장 많이 돈을 필요로 하는 곳이, 바로 지역구 사무실이다.
사무장과 여성위원장 또 청년위원장으로 구성되는 핵심당직자 그리고 사무실을 지킬 여직원은 둬야 하니, 인건비만으로도 최소 몇 백은 훌쩍 넘기는 것이다.
거기에다 사무실 임대료뿐 아니라, 지역구 내의 경조사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다.
그러다 보니 지역구 관리를 철저히 하는 국회의원의 경우에, 지역구 사무실 운영에만도 자기 세비를 모두 털어 넣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원 본인 가정의 생활비 또한 필요로 할 것이니, 국회의원들이 항상 돈에 쪼들려 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다.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망각하고 국회의원 임기 동안에 국회의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을 마음껏 누리는 부류도 한둘이 아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본분인 입법 활동조차 도외시하면서, 개인적인 인기영합만을 추구하는 인간들도 많다.
또 비례대표로 당선된 인간들은 4년이란 임기 동안, 소속 정당이나 청와대의 하명에 충실하다가 임기를 마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김영범 의원처럼 지역구 관리에 충실하면서도 국회의원의 본분인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 세비로 버텨내기엔 그 세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김영범 의원이기에, 지금 이 집을 보고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월 조금씩 지원해드리면 안 되나?”
“걸리면 바로 정치자금법 위반이야.”
“걸리긴 왜 걸려? 그냥 눈치껏 다른 사람이 보지 않을 때 드리면 되지.”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집으로 올라와서 김 의원님은 손님방으로 주무시러 들어갔고, 나는 우리 방으로 돌아와 예나 옆에 누웠다.
예나가 조금 전 김 의원님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 했고, 내 말을 들은 예나는 당장에라도 통장이라도 건넬 것처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감독님 안녕하셨어요.”
“어이쿠! 우리 서 배우님은, 결혼 전보다 훨씬 얼굴이 예뻐지셨네.”
“잘 부탁드려요.”
“무슨 그런 말씀을. 오히려 내가 서 배우께 부탁해야지. 한 배우는 준비 다 했지?”
“예. 감독님. 잘하겠습니다.”
“잘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지난번 오디션 날 했던 만큼만 하면 충분해.”
그렇게 감독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고, 촬영감독님과 오디오 감독님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건넸다.
상호는 감독님들과 주변 스태프들에게 음료를 건넸고, 감독님들께 인사를 끝낸 나도 상호 뒤를 따라다니면서 스태프들과 단역배우들과 인사를 나눴다.
“어! 형!”
“오랜만이다.”
“형은 어쩐 일이세요?”
“우리 팀도 이번에 합류하잖아.”
“오늘은 아니잖아요?”
“고사에 참여하려고, 감독님하고 둘만 왔어.”
“감독님은요?”
“오시다가 아시는 분을 만나셨거든. 아마 조금 있으면 올라오실 거다.
액션스쿨 투의 사범으로 있는 장수 형을 만났다.
스턴트 배우들은 내일인가 모레부터 촬영이 예정되어 있는데, 고사 때문에 김영웅 감독님과 장수 형 둘이 오늘 오게 된 모양이다.
“양산 생활은 어때?”
“시골 생활이야 뻔하잖아요. 조용하게 도 닦는 기분입니다.”
“그건 아닌 모양이던데. 며칠 전에도 보니 떠들썩하더니만.”
“그건 교수 중에서 좀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요. 그런데 다른 형들은 다 잘 계시죠?”
“그래. 아무튼 이번에도 잘 맞춰보자.”
“형들 실력이 어디 가요. 그냥 나야 형들이 하는 것에 맞추기만 하면 되죠.”
“그 맞추기가 쉽지 않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지. 아무튼 잘 부탁한다.”
[잠시 후부터 고사를 진행할 예정이니, 배우님들과 관계자들께서는 모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장수 형하고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있으니, 스피커에서 조감독의 말이 흘러나왔다.
“넌 서 배우 옆으로 가서 서야 하잖아.”
“에이~ 제가 아직 그 정도 급은 아니잖아요. 괜히 다른 배우들에게 눈총이나 받을 일을 왜 해요.”
고사를 지낼 때도 배우의 급은 분명히 존재한다.
분명 내가 이번 ‘도시의 하이에나’에서 공동 주연 중의 한 사람이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단번에 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예나를 비롯한 Top급 배우들이 서 있는 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제주이자 초헌자인 황우 감독님께서 첫 술잔을 올리고 재배 후에 꿇어앉자, ‘유세차~’로 시작되는 축문이 조감독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독축을 끝낸 조연출은, 축문을 신위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고사 절차가 끝나자 예나와 Top급 배우 셋이 차례로 잔을 올렸고, 이어서 나를 비롯한 배우들이 차례로 잔을 올렸다.
“한 배우님, 이건 너무 과한 금액입니다.”
“아뇨, 이건 저하고 서 배우 두 사람 몫입니다.”
“서 배우님은 조금 전에 하셨습니다만.......”
“서 배우가 한 것은 회사에서.......”
공동주연이지만 명색이 주연배우인데, 달랑 5만 원짜리 한 장을 꽂기는 얼굴이 뜨겁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예나와 의논 끝에, 아예 100만 원을 봉투에 넣어 꽂았다.
만약 나 혼자 100만 원이든 50만 원을 꽂았다면, 대놓고 시건방지다고 욕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나라면 100만 원이 아니라 500을 꽂는다고 하더라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환영할 일이다.
그래서 내 체면도 살리면서 욕도 얻어먹지 않는 방법으로, 예나와 둘 몫이란 핑계로 돼지 입에 봉투를 물렸다.